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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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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28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1.19 09:00
조회
513
추천
3
글자
10쪽

회사 -1-

DUMMY

일하던 회사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들이 몇 있었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실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키보드 치는 소리, 환기가 되지 않아 어딘가 매캐한 공기, 청소하지 않아 더러운 바닥,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선명하게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진한 커피 냄새.


취업 재수까지 해가면서 내가 들어간 곳은 어느 잡지사였다. 하는 일은 어렸을 때 좋아하던 그림과도 대학 때 전공했던 영문학하고도 별 관련 없는, 기자분이 작성한 기사에 편집부가 보유한 사진 중 어울리는 사진을 찾아내 붙이는 일이었다. 아, 동시에 오타나 맞춤법 검사를 하는 건 덤이었다. 이렇게 다듬은 기사를 넘기면 나보다 오랫동안 일한 선배가 제목을 붙이고, 페이지에 기사를 배치하는 식이었다. 일감이 폭주하는 마감 때가 되면 제목 붙이는 일이 나한테 넘어오기도 했다.


제목은 중요하다. 기사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사람들 눈에 띄도록 적당히 자극적이어야 했다.


“이번 달도 다들 수고했어요.”


편집장님의 그 한마디는 짧은 휴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말이 들릴 때면 편집부의 모두가 일제히 한숨 비슷한 걸 쏟아내면서 책상 위에 늘어지거나 의자 등받이에 쓰러졌다. 그 느낌은 이번 달도 열심히 일했어 보다는 이번 달도 끝났다에 가까웠다.


“마감기념 회식하려고 하는데 갈 사람 있나?”


편집장님의 말에 좀비가 된 몇몇 인물이 꿈틀대지만 가겠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인스턴트 식품으로 연명했으니 위장에 기름칠 좀 해줘야 마땅했지만 현재로써는 식욕보다 수면욕이 앞선 상태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편집장님은 고개를 저으며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내가 살게요.”


그 한마디에 이곳저곳에서 새순 올라오듯 칸막이 위로 손들이 올라왔다. 그중 제일 먼저 올라오는 건 항상 내 손이었다. 내 돈 안 쓰고 배를 채울 기회를 그냥 넘겨버릴 내가 아니었다.


편집장님이 올라온 손들을 손가락으로 세면서 말했다.


“민지 씨는 회식에 빠지는 날이 없네.”

“집이 가난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난 결의에 찬 것 같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행동의 이유를 당당하게 밝히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물론 지금처럼 경제사정과 밀접한 발언은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되고, 장난기로 살짝 감싸주는 편이 좋다. 그래야 듣는 상대방이 부담받지 않았다.


“그럼 우리 아가씨 가장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인가요?”


아가씨 가장이란 별명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재 내 상황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제목’이었다. 매달 받는 얼마 안 되는 월급 중 1/3을 항상 집으로 송금하고 남은 돈으로 월세, 각종 공과금, 식비에 교통비까지 내야 하니 내 생활은 그야말로 팍팍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대학 다닐 때보다 더 힘든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근처 고기 뷔페로 이동했다. 전문 고기 집보다 싸고 최소한 인스턴트보다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애용하는 가게였다.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근방에 일 다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와봤을 정도였다. 인기 많은 고기 뷔페는,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도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곱 분인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종업원은 우리를 벽에 붙은 커다란 테이블로 데려갔다. 두 개의 테이블을 붙인,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자리를 받았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나쁜 자리는 아니지만 좀 지루하다고나 할까.


모두 자리에 앉자 편집장님이 같이 앉은 얼굴을 쓱 둘러보고 말했다.


“고기 담당 지원자 구합니다.”

“저요!”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뷔페에 오면 메뉴별로 다 먹는다고 맛없는 부위까지 가져와서 처리에 애를 먹게 했는데 난 그게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막내였다.


편집장님은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다른 테이블에 앉은 경석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테이블에선 경석 씨가 가는 게 좋겠네요.”


자신과 편집장님 이외에는 모두 여자라는 걸 다시금 확인한 경석 선배는 어딘가 곤란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고기 사냥하러 가볼까.”


우리 둘은 좁은 통로를 지나 고기가 비치된 유리 냉장고로 걸어갔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안에 어떤 고기가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혹시 했는데 인기 있는 등심 부위는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몇 없었다. 등심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는데 경석 선배가 접시를 들고 삼겹살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어어, 선배. 그러면 안 되는데…….”

“응?” 경석 선배는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들고 있던 집게로 고기를 가리키며 “삼겹살이잖아?”

“삼겹살이 기름기가 많잖아요. 처음부터 먹으면 기름으로 배가 차서 많이 못 먹는다고요.”

“그거 확실한 거야?”

“제 몸이 증거입니다.”


내가 오른손으로 배를 팡팡 치자 경석 선배는 가볍게 웃었다.


“알았어. 그럼 처음에는 기름기 없는 것부터 갈까.”


우리 둘이 한 접시 가득 고기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테이블 위에 수저부터 쌈장까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내 바로 위의 여자 선배 두 명이 테이블 하나씩 맡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 그럼 굽겠습니다.”


나는 소매를 걷고 가위와 집게를 양손에 들어 가져온 고기를 차례차례로 불판 위에 올렸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다른 쪽 테이블에서는 서로 굽겠다는 부하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편집장님이 고기를 굽고 있었다.

편집장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몰랐지만 얼핏 들리는 소문이나 겉모습을 보면 50대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부하 직원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써주시고, 지금처럼 고기도 직접 구워주시는 등 상사보다는 아빠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타, 부적절한 단어와 사진 사용을 발견하는 건 물론이고 마감 직전까지 나오지 못한 제목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는 부분이 이 정도고, 다른 사람들 일까지 모두 관리하시니 실제로는 그 배 이상을 항상 체크하고 계신 거다. 처음에는 여성 잡지에 남성 편집장? 이었지만 요즘은 저분이 있어서 그나마 잡지가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민지야.”


옆에 앉아있던 진아 선배가 어깨를 건드려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네?”

“편집장님이 부르시잖아.”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니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았다.


“저런 집중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편집장님의 말에 다들 건전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단지 불판 때문은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편집장님은 주변을 둘러보시더니 “음, 그러고 보니 여기는 시끄러워서 얘기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네요. 이 얘기는 다음 주에 출근하면 하도록 합시다.”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했던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기를 먹는 내내 계속 신경 쓰였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나오지 않을 타는 고기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진아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배, 편집장님이 무슨 말씀 하려고 했던 거예요?”

“으이구, 그걸 이제 신경 쓰니 둔탱아.”


진아 선배는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세 개나 상추에 얹어 먹었다.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씹는 선배의 모습이 고기 굽는데 정신 팔려 편집장님의 말을 흘려버린 나를 간접적으로 혼내는 행동이라 느꼈기에 조용히 기다린 다음 말했다.


“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응. 편집장님 말을 씹었지. 교수형 감이다.”

“선배에.”


같은 여자에게도 애교는 통하는 법이다.


“알았어 알았어. 얘는 뭐 장난을 못 치니. 걱정 마. 나쁜 소식은 아닐 테니까.”

“정말이요?”

“너 편집장님이 사람 많은 곳에서 누구한테 화내는 거 봤니?”


그 말에 나는 반년 동안의 회사 생활의 기억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선배 말대로 편집장님의 그런 모습을 내 기억에 없었다. 싫은 소리를 아예 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때면 굵고 낮은 목소리로 최대한 완곡한 표현을 써서 잘못에 대한 질타만 하셨다. 물론 아직 일에 여유가 없던 나는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몇 시간이고 꽁해 있었지만 말이다.


“따로 부르는 건 대부분 칭찬이나 좋은 소식. 그러니까 너는 다음 주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편집장님을 만나면 돼. 오케이?”


나는 선배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선배, 아직도 소녀 감성을 가지고 계시네요.”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어린아이를 품고 있다잖아. 넌 아니야?”

“음, 제 안의 어린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감과 동시에 세상은 살기 쉬운 곳이 아니란 걸 알아버려서 꽤 조숙하네요.”

“그렇게 일찍?”

“네. 그렇게 일찍.”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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