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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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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25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2.03 09:00
조회
344
추천
5
글자
10쪽

회사 -7-

DUMMY

“김민지 씨. 잠시만 이리로 오세요.”


한창 마감 중에 들려온 편집장의 싸늘한 목소리는 목덜미를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편집장을 바라봤다. 편집장은 시선을 책상 위에 고정한 채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아 선배를 슬쩍 봤다. 진아 선배는 다른 사람들이 불러갈 때와 다르게 칸막이 끄트머리에 눈을 걸치고 편집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어줘서 조금 안심이 됐다.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어서 편집장의 책상 앞에 섰을 때는 입안이 바싹 마른 상태였다.


“김민지 씨, 이러면 재미있어요?”


공격적인 편집장의 첫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 감도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편집장이 보고 있는 것이 내가 번역한 기사인 걸 눈치챘다.


“뭔가 잘못되었나요?”

“여기 보세요.” 편집장은 손가락으로 문장 하나를 가리키며 글자마다 힘을 주며 소리 내어 읽었다. “장인으로 유명한 일본계 미국인 와타나베 게이스케 씨는.”


멀리서 듣는 것과 다르게 바로 앞에서 듣는 편집장의 지적은 커터 칼로 하나하나 잘라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왜 멀쩡한 문장 가지고 시비인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편집장님.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정말 모르겠어요?”


편집장이 신경질적으로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끝으로 문장을 찔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잘못되었어요. 이름이.”


이름? 그제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편집장이 손톱 끝으로 와타나베 게이스케, 그중에서도 게이스케를 콕 찌르면서 말했다.


“내가 이거 보고 좀 이상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일어도 그렇고 영어로도 케이스케더라고요? 왜 멀쩡한 사람을 게이로 만들고 그래요?”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을까? 솔직히 좀 웃기긴 했다. 이전 편집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가볍게 웃으면서 이유를 말했겠지만, 현재의 편집장에게는 웃음을 보이는 것조차 신중해야 했다. 나는 얼굴에 살짝 떠오르려던 웃음을 거두고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를 내보이려 애썼다.


“그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일본어 표기법에 의거해 그렇게 표기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사람 이름이잖아요?”


편집장의 목소리는 높았고 대답도 빨랐다. 마치 내가 할 말을 예상한 듯싶었다. 생각해보면 편집장의 자리에 올라간 여자가 일본어 표기법의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 나에게 무의미한 싸움을 건 것이 아닐까? 생각이 그렇게 뻗어 나가자 좀 화가 났다.


편집장이 또 한 번 손톱으로 게이스케를 찍으면서 말했다.


“제대로 된 이름으로 바꾸세요. 지금 당장.”

“하지만 편집장님…….”


편집장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평소 큰소리를 낼 때의 그 눈빛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소리 듣겠구나 하는 그때, 옆에서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편집장님 말대로 하도록 해.”


진아 선배가 편집장의 손톱 끝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편집장을 바라봤다. 편집장은 놀라움을 억지로 감추며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아 선배가 손가락 끝으로 내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예전부터 좀 신경 쓰였었거든.”

“그래도 선배 인쇄물인데 표기법을…….”

“괜찮아. 편집장님 명령이잖아.” 진아 선배는 편집장의 눈을 바라보며 “큰일이야 없겠지만 뭔 일이 있으면 막아주시겠지. 안 그래요?”


편집장은 불쾌함을 겨우 감춘 표정으로 진아 선배를 빤히 바라봤다. 몇 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무실 공기가 시베리아 벌판처럼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은 비단 나 홀로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렇죠.”


불만족스러운 눈빛을 흘리긴 했지만, 편집장은 의외로 순순하게 진아 선배의 말에 동의했다. 등 뒤에서 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편집부 최대, 최고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데 대해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끼며 업무로 돌아가는 소리가 분명했다.


편집장은 진아 선배를 슬쩍 봤지만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김민지 씨, 지금 당장 수정하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진아 선배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는 순간 낭떠러지 끝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긴장이 풀리면서 입 밖으로 기다란 숨이 뿜어 나왔다.


진아 선배가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걸로 빚 한 번 진 거다.”

“우와, 사채업자.”

“이자는 연 50%.” 진아 선배는 한 번 쿡 웃은 다음 “그나저나 별 것도 아닌 일가지고 뭐라 하네. 너 좀 더 긴장해야겠다.”

“선배는 긴장 안 해도 돼요?”

“나? 나야 언제든지 회사 박차고 나갈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긴장 따윈 안 해.”


진아 선배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가슴 한구석을 꾹 누르는 것처럼 아픈 말이었다. 진아 선배는 편집장님이 퇴사한 이후로 사무실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진아 선배까지 퇴사한다면 그 뒤 회사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입사 때부터 옆자리에 앉아 친구처럼 지낸 선배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마감을 끝내고 아무 생각 없이 탁상 달력을 보다가 입사하고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반년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 2배를 지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하고 기특했다.


언젠가 입사 1주년을 맞이하면 조촐한 파티를 하자고 생각했었지만, 현재의 나는 파티는커녕 책상이라도 고마우니 원 없이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상에 머리를 얹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좀비라도 된 것처럼 힘없이 움직이며 귀갓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숙직실에 빈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쁨 아닌 기쁨을 느꼈다.


“민지야, 너 안 갈 거니? 택시 불러줄까?”


진아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들었다가 중력의 위대한 의지에 의해 다시 책상에 뺨을 부딪쳤다.


“오늘은 숙직실에서 자려고요.”

“숙직실?” 진아 선배는 숙직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오늘은 숙직실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요?”

“편집장이 거기서 자고 있거든.”

“아, 어쩐지 집에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라니.”


내 말에 진아 선배가 쿡하고 웃었다.


“그러면 선택해. 숙직실에서 불편하게 잘지, 집에 가서 편하게 잘지.”

“2번 고르겠습니다.”


나는 중력의 애달픈 손길에서 벗어나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던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을 서두른 사람들 덕분에 나와 진아 선배의 퇴근길은 여유 그 자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빌딩 내의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은 건 시간이 벌써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 위의 줄어가는 숫자를 보다가 바보 같은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빠른 시일 내에 편집장이 바뀔 일은 없겠죠?”

“사람이 그렇게 휙휙 바뀌진 않으니까.”

“전 편집장님은 요즘 뭐 하고 계실까요?”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겠지.”

“정말로 알콩달콩?”

“아마도 희망 사항.”


회사 근처 정류장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숨과 함께 싸지만 불편한 만원 버스와 2배 이상 비싸지만 몸은 편한 택시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선배. 반반씩 내기로 하죠.”


우리 둘이 사는 동네가 비슷한 방향이어서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진아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고 길가에 주차해있는 택시를 향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가장 앞에 있던 택시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뒷자리에 앉자마자 택시 기사의 얼굴과 면허증부터 확인했다. 범죄에 대비하는 오랜 버릇이었다.


택시의 불규칙한 진동 때문인지 아니면 차가운 공기를 잠시 마셨기 때문인지, 몸은 굉장히 무거운데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인지 계속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면서 고생이었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대고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우리 잡지 괜찮을까요?”


진아 선배는 몸을 꿈지럭거리더니 대답했다.


“외부적으로? 아니면 내부적으로?”

“내부적으로요."

“으응, 모르겠어. 괜찮을 수도 있고 안 괜찮을 수도 있고.”

“그게 뭐예요.”

“아무리 내가 편집장을 안다고 해도 그것까지 맞추면 이 일 하겠어? 로또 사지.”


나는 소리가 날 듯 말 듯 가볍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자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해서 몸에 생기가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몸은 여전히 피곤해하면서도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한 번 더 말을 꺼내버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저 오늘 입사 1년 됐어요.”

“어, 정말?”


옷이 부스럭대는 소리로 봐서 진아 선배는 시트에 눕혔던 몸을 일으킨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벌써 1년이라니 시간 참 빨리 지나가죠?”

“얘, 미리 말했으면 술이라도 사줬을 텐데.”

“저 술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그럼 고기는 어때?”

“고기 좋네요. 시간 날 때 사주세요.”


나는 선배와 일과 상관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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