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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18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1.17 09:00
조회
803
추천
5
글자
12쪽

특별한 날 -4-

DUMMY

좁은 계단을 내려와 땅끝탑 앞에 선 나는 주변에 펼쳐진 바다를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땅끝……, 생각보다 별거 없네.”


역시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꽤 멋진 장소임은 틀림없었다. 높이 솟아있는 뾰족한 탑, 뱃머리처럼 만들어져 있는 뾰족한 난간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섬들. 하지만 내 이기적인 마음이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꿈속에서나 볼법한 환상적인 장소를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을 느낀 것이다.


“으……. 추워.”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난간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땅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그곳에 서니 아주 잠깐이지만 바다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방된 느낌, 그렇지만 속을 살짝 들여다보면 사실은 말도 못하게 무거운 것에 묶여있음을 알게 되는 슬픈 느낌. 병원에서 퇴원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는 혹시나 소문이 퍼질 걸 두려워해 입원 기간 중 알고 있는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 딱 한 곳에 연락하긴 했다.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롯데리아에 집안에 일이 생겨서 당분간 못 나가게 됐다고 전해야 했다. 그 외에는 은둔자가 된 것 마냥 휴대폰을 꺼놓고 지냈다. 그래서 입원할 때도 퇴원할 때도 혼자였다.


난 에이즈가 아니었다. 입원 첫날 담당의에게 혈액 검사를 요청해 며칠 뒤에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 마지막 섹스 날짜까지 알려줘야 했지만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깊이 안도하는 나에게 의사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회복에 집중하라고 했었다.


내 왼쪽 손목에는 지금도 희미하게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팔찌나 손목 보호대로 가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1년 내내 그렇게 생활하면 더 의심받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 왜 이렇게 오기 힘든 거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몇 시간 전에 목포역에서 사진을 찍어줬던 정신 사나운 커플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가뜩이나 저 인간들 때문에 좋지 않은 옛날 일이 떠올랐는데 이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커플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려 했다.


“어라?” 아, 안 돼.

“왜 그래 오빠?” 제발 알아차리지 마.

“저기 혹시 아까 목포역에서 사진 찍어주신 분 아닌가요?” 아아아아!


빠른 걸음으로 무시하고 가려고 했는데 단발의 무개념녀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오더니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아닌가.


“어머? 정말 아까 그 언니네? 반가워요. 또 만나네요.”

“하, 하하……. 네.”


나는 겉으로 웃으면서 약간의 원망이 담아 그녀의 남자친구를 노려봤다. 그는 내 뜻을 눈치챈 건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시선을 피했다. 어쩜, 눈치까지 빠르다. 이런 무개념녀의 남자친구라는 게 더더욱 믿겨지지 않았다.


“언니 여기 혼자 왔어요? 왜? 어째서? 혹시 그건가? 자아를 찾는 여행 같은 거. 그것도 아니면 애인에게 차였어요?”


무개념녀는 정말이었다면 남에게 상처가 될 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내게 해당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요. 그냥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그러는 그쪽은?”

“에헤헤, 저희는요. 우리 경석이 취직 기념으로 온 거예요.”

“응? 취직했는데 평일에 이런 곳에 와요?”

“다음 주부터 출근이거든요. 그래서 그 전에 가고 싶은 곳 다 가보기로 한 거예요.”


과연, 이해가 됐다. 그런데 가고 싶은 곳 다 간다면 대체 몇 군데나 돌아다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시야 안에 내 것이 아닌 스마트폰이 들어왔다.


“저기 언니, 저 난간이 멋있어서 그러는데 이번에도 사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싫어! 하고 나는 속으로 무개념녀를 향해 외쳤다. 내가 네 사진기사냐? 라는 후속타도 잊지 않았지만 모두 마음속의 외침이었다. 실제 현실 속의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무개념녀의 스마트폰을 받고 있었다.


“저기 바람이 좀 센 거 같으니까 조심하세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무개념녀는 난간 끝으로 가더니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이 했던 것처럼 양팔을 벌리고 서서 남자친구에게 뒤에서 안아달라고 졸랐다. 결국 그 자세를 완성한 무개념녀는 감격에 겨웠는지 “나는 세상의 왕이다~!”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 대사 그 장면에 나오는 거 아닌데.”


나는 중얼거리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먼저 찍고 이어서 난간에 허리를 걸치고 상체와 팔을 최대한 밖으로 내밀어 옆모습을 찍었다. 이왕이면 영화에서처럼 정면 45도 각도에서 찍어주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내가 공중부양을 할 수 있어야 했기에 포기했다.


“언니, 사진 찍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무개념녀에게 돌려줬다. 그 애는 처음에는 눈을 반짝였지만 곧 실망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띄우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잘 안 나왔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나는 익숙한 서비스직의 미소를 띄웠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즐거운 여행되세요.”


나는 두 사람의 인사를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등을 돌렸다. 이 이상 저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향해 걸었다.


“아, 저기 잠시만요!”


목소리가 작았으면 못 들은 척 지나갔겠지만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어느 노부부까지 들은 마당이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부른 사람보다 왜 불렀냐고 묻는 듯한 표정의 무개념녀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나에게 세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저희 사진도 두 번이나 찍어주셨는데…….” 그는 옆에 바짝 붙은 여자친구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요?”


대답에 앞서 무개념녀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그 애는 내가 아니라 남자친구를 보고 있었는데 당장에라도 ‘너 미쳤어?’ 하고 소리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해는 갔다. 이제 회사에 다니게 되면 서로 만날 시간도 적어질 테고 이렇게 평일 날 여행하는 건 꿈 같은 일이 될 테니, 무개념녀는 이 소중한 시간을 되도록 남자친구와 단둘이서 보내고 싶을 것이다. 평소의 나였다면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비켜줬겠지만, 지금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세상은 네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그쪽에서 사는 거라면 그렇게 할게요.”

“하하, 물론이죠. 시연아, 너도 괜찮지?”


남자친구의 말에 무개념녀는 상황을 인식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 물론이지! 밥은 여럿이 먹을수록 더 맛있는 법이잖아!”


나도 저런 성격이었으면 세상 사는 게 조금은 편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셋은 규모가 조금 있는 횟집에 들어갔다. 나는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완전히 싫은 건 아니고 먹는 건 나쁘지 않은데 일부러 먹고 싶진 않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앞서 걷고 있는 커플을 저지하지 않은 건 당연히 내가 돈 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광어회 3인분 부탁합니다.”


남자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정중한 말투로 주문했다.


나는 근처에 있던 수저통을 열어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 건넸다. 남자는 “고맙습니다” 하며 자기 것을 받아 든 반면, 시연이란 이름의 무개념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힐끗 쳐다 보기만 하고 스마트폰 세상으로 돌아갔다. 보면 볼수록 이 두 사람이 커플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저 세팅을 끝낸 남자는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가는 곳마다 계속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혹시 모르니 다음 목적지를 미리 밝혀보죠. 헤어졌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보다 처음부터 같이 움직이는 게 더 즐겁지 않겠어요?”

“아하, 그런 수가…….”


나는 눈동자를 살짝 굴려 무개념녀를 살펴봤다. 여전히 스마트폰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지만 공기가 들어가 크게 부푼 두 뺨은 당연 독보적이었다. 에구구,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되는데. 다음 목적지는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거든.

남자가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저희는 오늘 여기서 묶고 내일 두륜산에 가보려고 해요. 어떻게, 목적지가 같나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다르네요. 저는 오늘 내에 다른 지방에 가봐야 하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남자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저희처럼 그냥 즐기는 여행은 아닌가 보네요.”


즐기는 여행이라는 표현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마도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동시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여행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침에 시작해서 밤에 끝나는, 그런 짧은 행동도 여행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렇다 치면 지금 나는 자살여행을 하는 중이겠지.


치마 주머니 속의 유리병을 손바닥으로 만지며 나는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즐길 수가 없네요.”


그때 아주머니가 광어회를 가지고 와서 식탁 위에 올렸다. 상당히 빠르구나 하는 감탄과 미리 잘라놓은 걸 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런 경우, 나는 웬만하면 직접적으로 의심을 먼저 말하는 성격이었지만, 내 돈 주고 먹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예상대로 남자는 상큼한 미소로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말만 했다.

다행히 회 자체는 비린내도 적고 신선했다.


“이거 꽤 맛있네요.”


실로 오랜만에 음식을 먹고 내뱉는 감탄이었다.


“역시 회는 바다 근처에서 먹는 게 제일인 거 같아요. 시연아, 너는 어때? 맛있어?”

“응. 맛있네.”


무개념녀는 빠른 젓가락질로 살점들을 입에 가져갔지만 시선은 여전히 휴대폰에 박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나 또한 저랬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 말해봤자 쓸데없는 화만 돋울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행동이 어리석다고 스스로 깨닫겠지.


“사실 저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어요.”


남자의 말에 드디어 무개념녀의 시선이 휴대폰에서 떨어졌다. 저 애는 부정적인 말에만 빠르게 반응하는구나.


“무슨 소리야? 출발 전까지 그런 말 없었잖아?”

“잠깐만 시연아.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지.” 무개념녀를 안정시킨 남자는 힘없이 웃으며 “그동안 취업활동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고, 쉴 때도 쉬는 게 아니어서 정말 답답했었는데, 오늘은 오전 오후로 돌아다녔을 뿐인데 기분이 정말 상쾌해졌거든요.”

“내 덕분이네? 내가 여행 오자고 했잖아.”

“하하, 맞아. 당연히 네 덕분이지.”


두 사람은 내가 앞에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볼을 비비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만화였다면 등 뒤에서 꽃이 피어날 정도로 닭살이 돋는 광경이었다. 나는 괜히 화가 나서 광어회를 두세 점씩 집어 먹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꼭 여행을 왔기 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직에 성공했으니 그동안 자신을 누르고 있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건 당연했다. 딱히 여행이 아니라 동네를 걷기만 해도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꼈을 터였다. 방안에 처박혀 있는 동안 바뀐 동네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한가로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다시금 깨닫고, 취업 활동 때문에 접어야 했던 취미에 다시 손을 대는 것 등……. 한동안은 자신이 노력해서 쟁취한 성공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리라. 그래, 한동안은.


“실례가 안 된다면…….”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 말을 하려면 상대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말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뭐가 잘났다고 남의 인생에 개입한단 말인가.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물어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회를 집어 입에 넣었다.


쓴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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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회사 -6- 14.12.01 533 4 14쪽
26 회사 -5- 14.11.28 505 3 11쪽
25 회사 -4- 14.11.26 651 2 10쪽
24 회사 -3- 14.11.24 712 2 15쪽
23 회사 -2- 14.11.21 464 2 10쪽
22 회사 -1- 14.11.19 513 3 10쪽
» 특별한 날 -4- 14.11.17 804 5 12쪽
20 대학교 -10- 14.11.14 581 3 14쪽
19 대학교 -9- 14.11.12 473 3 11쪽
18 대학교 -8- 14.11.10 570 3 11쪽
17 대학교 -7- 14.11.07 593 3 14쪽
16 대학교 -6- 14.11.05 481 3 8쪽
15 대학교 -5- 14.11.03 574 4 12쪽
14 대학교 -4- 14.10.31 385 4 12쪽
13 대학교 -3- 14.10.29 647 3 11쪽
12 대학교 -2- 14.10.27 679 3 9쪽
11 대학교 -1- 14.10.24 728 6 13쪽
10 특별한 날 -3- 14.10.22 521 7 11쪽
9 중학교 -7- 14.10.20 654 4 18쪽
8 중학교 -6- 14.10.17 776 5 15쪽
7 중학교 -5- 14.10.15 596 4 17쪽
6 중학교 -4- 14.10.13 741 5 11쪽
5 중학교 -3- 14.10.10 614 5 10쪽
4 중학교 -2- +1 14.10.08 796 6 8쪽
3 중학교 -1- 14.10.06 699 6 14쪽
2 특별한 날 -2- 14.10.03 1,164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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