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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01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1.12 09:00
조회
472
추천
3
글자
11쪽

대학교 -9-

DUMMY

모든 산업에서 코미디 장르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 만든 코미디에 한해서다. 관객을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는 이미 코미디가 아니다. 거기에 비해 잘 만든 코미디는 경쾌한 웃음을 주는 건 물론이고,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힘이 있다. 물론 작품이 끝난 뒤에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지만, 그 잠시 동안의 시간이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다.


……라고 예전에는 생각했다. 아마도 1학년 혹은 2학년 때 했던 생각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삶의 무게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면 오히려 불행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더욱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 이론을 확신했다. 이걸로 논문을 써서 발표하면 세계 코미디 사업을 모두 금지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코미디에 투자되는 돈들을 복지 정책과 시설로 돌리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간에 현재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벽에 63번째 탈락 메일을 붙이면서 생각했다.


이제는 벽이 가득 차버려서 새로 온 탈락 메일을 붙이려면 기존 메일 위에 덧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을 해상도 좋은 사진기로 찍어서 벽지 디자인으로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취업 재수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을 것 같다. 광고 문구로는 이게 딱 이겠다. 이 정도 실패하지 않았으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와, 시대의 아픔을 정확하게 꼬집는 천재적인 문장이다. 나 광고 회사 들어가도 되겠는걸?


비현실적인 생각은 집어치우고 아직 답장이 오지 않은 회사가 몇이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았다. 아직 37곳 정도가 남아있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다가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남아있는 37개의 회사 중에는 가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회사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그곳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지원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지원했던 기업들에게서 탈락 메일이 비처럼 쏟아졌을 때, 거의 공황 상태가 되어 눈에 보이는 회사마다 거의 똑같은 이력서를 보냈다. 물론 자기소개 부분에서 회사 이름을 고치는 노력 정도는 했지만, 성의 없는 글은 눈에 보이는 법이다.


컴퓨터 앞에서 바뀌지 메일 화면을 10분 정도 보고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코트를 몸에 걸쳤다. 이대로 집에 계속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주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남은 37개의 메일이 모두 도착하기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지도 몰랐다.


회색 하늘, 뺨을 베는 듯한 차가운 공기,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얼어붙은 길. 밖은 산책하기에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나는 코트를 끝자락까지 잠가 목을 보호하고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나 이외의 사람으로는 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하나같이 웃으며 최근 하는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인생이 즐거운 것처럼 보여서 부러웠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평소에 자주 다니지 않는 동네에 와있었다. 버스를 탔을 때 가끔 지나는 동네였다. 항상 버스가 다니는 길로만 봐서 안쪽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는 동네였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나는 전혀 모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버스가 지나는 길과 다르게 좁고, 인도와 차도도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골목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적당한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했다. 마치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 같았다. 지금 다시 가보면 별것 아니겠지만 그 당시에는 골목 하나하나가 너무나 길고 복잡해서 아는 길이 아니면 가볼 용기도 없었다.


성장했다는 증거로 나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너무나 간단하게 길을 찾아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동차가 쌩쌩 지나가면서 일으킨 바람에 손질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으며 동시에 바람으로부터 얼굴을 가렸다. 차가운 공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적응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지도로 현재 위치를 확인하며 집으로 돌아갈 방향을 잡았다.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야자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거리가 어중간해서 걸어서 집에 돌아가려던 게 화근이었다. 안 그래도 낯설어서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했던 길이었는데 사방이 깜깜한 밤에 돌아가려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큰길 쪽으로 걸은 것 같았는데 내 앞에 이어지는 길은 점점 좁아지는 골목이었고, 심지어는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산길까지 나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예고에도 없던 비까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해서 불안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때 이런 휴대폰이 있었다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운이 좋게도, 정말 운이 좋게도 골목을 빠져나오는 택시가 있어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우리 동네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는 옆 동네를 걷고 있었다. 그 뒤부터는 한밤중에 길을 잃어 도깨비나 귀신을 만났다는 옛날이야기를 단순히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게 됐다. 일단은 그 이야기들도 모두 사실에 기초한 것이리라. 한밤중에 초행길을 걷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집을 나와 걸은 지 한 시간 정도 되니 주변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 한쪽을 보니 가득한 회색 구름 뒤로 붉은 석양이 간신히 턱만 내밀고 있었다. 슬슬 저녁인가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차피 집에 있는 음식 이래 봐야 컵라면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왕 밖으로 나온 거 오랜만에 외식이나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식당에 들어갈지가 고민이었다. 일단 비싼 식당은 제외하고, 그렇다고 너무 싼 식당은 또 싫었다. 내 두 눈은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거리에 있는 대부분 가게가 내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주택가로 들어서는 어느 골목 입구에서 눈이 아닌 코가 나를 멈춰 세웠다. 뭔가 그리운 냄새가 안쪽에서 풍겨오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백반집이 있었다. 시골의 별장처럼 가게 전면을 나무로 장식한 감각 있는 집이었다. 나는 잠깐의 생각 끝에 이 집에서 밥을 먹자고 결정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개방된 주방에 있던 젊은 부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카운터에는 보기 드물게 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가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족이 하는 가게인 것 같았다.


나는 한쪽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아 오늘의 백반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손님들을 살펴봤다. 가게 안은 거의 만석이었다. 나처럼 혼자 온 손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이었다. 그중 몇몇은 회사원인지 말투나 행동이 조금 사무적이었다. 밥 먹는 자리에서까지 저래야 하나 싶었지만 동시에 식사 자리에서까지 일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오늘의 백반은 괜찮았다.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백반집에는 없는 그리운 맛이 났다. 어렸을 때 소풍 가서 먹었던 계란말이 같은 맛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집을 나섰을 때와 기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걷기의 힘은 위대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인간을 적당히 살기 괜찮은 상태로 되돌려 놓았으니 말이다. 아니면 배가 불러 기분이 나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후자라면 너무나 단순한 내 몸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나는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정신적 충격에 대비하며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사실 속마음은 메일이 아예 오지 않았으면 했다. 기껏 기분이 좋아졌는데 벌써 침울해지기는 싫었다. 컴퓨터는 켜되 메일은 내일부터 확인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래된 컴퓨터는 윈도우 화면이 표시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려서 그 사이에 휴대폰을 살폈다. 산책 중에는 미처 듣지 못했는데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재명 오빠였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도착한 메시지는 총 3개였고, 미안하다는 그중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였다. 카카오톡을 실행하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나 모르게 선물을 사려고 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사지 못한 건 아닐까? 무슨 돈이 있다고? 오늘 만날 약속을 했었는데 학교 때문에 못 오게 된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만날 약속은 없었다. 헤어지자는 건가? 다른 여자? 기껏 사람 만들어줬더니 이런 식으로 배신하는 거야?

그런데 오빠에게서 온 나머지 2개의 메시지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처음 메시지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10분 뒤 [에이즈 양성 반응이래.]

1분 뒤 [미안하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휴대폰 화면 속에 있는 3개의 메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이 뚫렸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오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소리야? 농담하는 거지?] 하고. 하지만 내 손가락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마치 누군가가 송곳으로 머리를 찍는 듯한 통증이 계속됐다. 손으로 이마를 받쳐가며 간신히 버텼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록 재명 오빠로부터의 대답은 오지 않았다.

화가 난 나는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보건소는 언제 갔었어?]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밖이야?]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화가 나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녹음된 안내 메시지를 열 번도 넘게 들었지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컴퓨터로 에이즈에 대해 검색했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평소에는 잘 쓰지 않아 가물가물했던 긴 이름 뒤로 에이즈의 원인이 설명되어 있었다. 에이즈는 체액에 의해 감염되며 우리나라의 경우 성관계를 통한 감염이 97%를 넘어간다는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잡고 있던 마우스로 책상을 내리쳤다.


나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는 휴대폰을 들어 다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10분이 넘도록 오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개새끼야! 전화 안 받아?]


나는 카카오톡으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도 옆의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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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9- 14.11.12 4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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