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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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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14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1.10 09:00
조회
569
추천
3
글자
11쪽

대학교 -8-

DUMMY

오래된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를 뽑아낼 동안, 나는 자꾸만 끝 부분이 열려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힘주어 닫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마지막 1밀리미터는 닫히지 않았다. 포기하고 종이에 인쇄된 내용을 확인한 다음 가위로 필요한 부분만 잘라냈다.


나는 그것을 내 방 한쪽 벽에 붙였다. 이로써 54번째 서류 탈락, 벽에는 그동안 내가 인쇄해 붙여놓은 탈락 통지서가 벽지처럼 붙어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대체 뭘까 이건. 한국이란 나라에 회사는 저렇게 많은데 나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참으면서 남들 하는 거 이상으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겨우 이거인가?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54개나 되는 메일 중에 단 하나도 내가 탈락한 이유를 적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판에 박힌듯한 문장으로 나를 조롱했다. 금번 채용에 대해 깊은 관심과 참여에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귀하의 능력과 자질은 뛰어나지만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비슷비슷한 문장이 메일을 열 때마다 반복돼서 거의 외워버릴 정도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옛날 전화기 소리로 해둔 덕분에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발신자를 확인하니 송아였다. 반가운 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웬일?”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이 돌아왔다.


-으음, 우리 김민지 씨는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군요.


마치 연구자 같은 말투는 진학하기로 한 대학원의 영향 아니면 송아 스스로 뽐내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저 내 힘을 북돋아 주려는 농담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뭐.”

-그런 의미에서 저녁 함께 먹지 않을래? 내가 쏠게.

“저녁이라…….” 컴퓨터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맛있는 거 사줘야 갈 건데?”

-샤브샤브 사줄게.

“콜.” 반사적으로 엄지를 들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아, 혹시 한 명 더 데려가도 될까?”

-알았어. 데려와. 분명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겠지?


송아는 내 말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반쯤 포기한 목소리였다.


“미안, 그럼 어디서 만날까?”






송아는 수수한 검은 코트를 입고 상점가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 말아 올린 머리가 그 애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줬지만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드는 행동과 충돌되어 결국 내가 알던 송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송아가 일부러 삐친 듯이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난 일찍 나왔어. 이 잘난 분께서 늦어서 어쩔 수 없었지.”


나는 팔꿈치로 재명 오빠의 옆구리를 쳤다.


“야, 너무 세다.”

“어머 미안. 아무튼 변명은 오빠가 하셔요.”


내 말에 오빠는 짧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면서 송아에게 말했다.


“내가 분명 평소 나오는 대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버스가 늦게 오더라고. 우리 집 근처가 공사 중이었는데 며칠 전에 눈이 내려서 길까지 얼어서 그랬나 봐.”


송아가 재명 오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몇 분 전에 나왔는데요?”

“40분 전에.”

“이런, 화내려고 했는데.” 송아는 아쉬운 듯이 웃더니 내 팔을 낚아채며 “그럼 샤브샤브나 먹으러 가자.”


자연스럽게 나와 송아가 앞장서고 재명 오빠가 뒤를 따라오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상점가를 걸으며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송아는 대학원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듯했다. 대학 입학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로서 거기에 같이 웃고, 화를 내줘야 마땅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짐이 너무 컸다. 대화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한쪽 벽을 장식한 수많은 탈락 메일이었다.


송아는 보통 사람들이 만나면 인사말 대신하는 것처럼 요즘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을 즐길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것들만 화제로 삼았다. 저 오징어 맛있겠다, 닭강정집 요즘 많이 생기더라, 이런 곳에 오락실이 있었네 등등.


우리는 송아가 미리 조사한 샤브샤브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만들어 진지 얼마 안 돼서 넓고 깨끗한 가게였고, 손님도 많아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재명 오빠가 코트를 의자에 걸자마자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볼일 본 다음에는 손 빡빡 씻는 거 잊지 마.”


재명 오빠는 종업원에게 다가가 뭔가를 묻더니 곧 기둥 뒤로 사라졌다. 저쪽에 화장실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송아가 내 쪽으로 몸을 불쑥 내밀면서 말했다.


“저 오빠도 참, 사람 됐다.”

“그런가?”

“그렇지. 예전에는 표정도 음침하고 옷 입는 센스도 구질구질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볼만하잖아. 네가 저 사람 개조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면 입이 안 다물어진다 얘.”


나는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이 동해 입꼬리가 말리는 걸 겨우 참으며 말했다.


“힘들긴 했지. 그래도 사람은 겉모습보다 내면이다. 내면.”

“내면이라 말해도…….” 송아는 과거 어느 지점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예전에 저 오빠는 기껏 네가 사람들 소개시켜줘도 말도 안 해요, 기껏 말하면 단답형으로 대화를 팍팍 끊어요, 그리고는 저기 구석에 가서 자기 혼자 놀아요. 아무리 내성적이라 해도 답이 없었잖아?”

“확실히 예전에는 좀 그랬지.”

“그때 주변에서 너 불쌍하다고 얼마나 뭐라 그랬는지 아니? 누구는 저 오빠가 숨겨진 재벌 아들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니까?”


나는 그 말에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뻔하다가 간신히 멈췄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옆에 붙어있어서?”

“딩동 댕동. 뭐 결국에는 추측에 그쳤지만.” 송아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요즘 저 오빠 만나는 사람들은 옛날 얘기 들으면 못 믿을걸. 그걸 보면 넌 상담사나 재활치료사 같은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길은 생각해본 적 없는데.”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 힘든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재명 오빠가 돌아왔다. 나는 오빠가 자리에 앉자마자 손에 묻은 물기를 확인했다.


“손 빡빡 씻었어?”

“비누로 두 번이나 씻었다니까.”


난 싱긋 웃으며 오빠의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와 냄새를 맡았다. 비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좋아. 합격.”


오빠는 물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마저 닦으며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산다. 송아야,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말에 송아는 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민지가 오빠한테 해준 걸 생각하면 아직 멀었지.”


우리 둘은 빙긋 웃으며 식탁 위에서 손바닥을 부딪쳤다.






“이야, 잘 먹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주변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고 그에 비례해 사람들도 더 많아졌다. 나는 카운터에서 가지고 나온 박하사탕을 재명 오빠와 송아에게 나눠주면서 말했다.


“이제 뭐 하지?”

“으음, 나는 이만 집에 갈래.”


매번 식사, 영화에 이어 노래방까지 두루 섭렵해야 직성이 풀리는 송아가 한 말이었기에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네가 잘도 그러겠다.”

“그럴 수 있어요, 김민지 씨. 오늘은 내 기분 좋자고 나온 게 아니라 네 기분 풀어주려고 나온 거거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송아를 바라봤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은 기분이었다.


“야, 너 그래서 오늘 나 보자고…….”


송아는 부끄러운 듯이 씩 웃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돌아갈게. 덕분에 식사 즐겁게 했어. 그리고 재명 오빠, 민지가 스트레스 안 받게 평소에 좀 신경 써주세요.”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해.”


오빠의 변명 가까운 말에 송아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금방 다시 웃으며 버스 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송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명 오빠의 팔에 내 팔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송아의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꾸짖듯이 말했다.


“최선을 다하는 우리 오빠는 평소 뭘 하고 계시나?”

“솔직히 내가 뭘 해주려고 해도 네가 맨날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싫다고 했잖아.”

“아하하, 내가 그랬던가?”


우리는 사람들 속을 느긋하게 걸었다. 생각해보면 재명 오빠를 보는 것도 이 주일 만이었다. 오늘 송아가 불러내지 않았다면 이 주일이 넘도록 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오빠 말대로 오늘도 그런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상점가 거의 끝까지 걸어 큰길에 도착했다. 보통은 여기를 지점으로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몸을 돌리며 오빠 팔을 잡아당겼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오빠를 돌아봤다.


“왜 그래?”

“아, 민지야. 그게 있잖아…….”


오빠는 약간 상기된 얼굴에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보다가 시선을 길 건너로 넘겼다. 지금 서 있는 길과 비교해 사람 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그 길에는 식당과 편의점 대신 다른 건물들이 잔뜩 줄지어있었다.


그 거리는 모텔촌이었다. 재명 오빠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다른 사람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까 지금, 취업의 압박에 시달리다 간신히 한숨 돌린 여자친구에게 저길 가자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오빠는 곁눈으로 나를 흘깃 보다가 다시 앞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긴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좀 실망스러웠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방금 전에는 송아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으면서 속으로는 이것만 떠올리고 있었나?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꽥 지르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일단 얘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왜 그걸 하자는 건지 이유나 들어보자.”


재명 오빠는 머리를 긁다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힘들게 입술을 뗐다.


“섹스가 스트레스 해소와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대.”


어디 인터넷에서 찾아온 것 같은 말이었다. 기가 막혀서 뭐라 하려 했지만 마음속의 무언가가 목소리가 나오는 걸 막았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면서 그게 뭔지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오빠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2주일 전, 3년 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연인이라 해도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저, 정말?”


오빠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저 색골.


“대신 솔직하게 말해봐. 날 생각해서라기보다 그냥 오빠가 하고 싶어서지?”


오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당황이 떠올랐다. 거참, 알기 쉽네.


“어……,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너와 나의…….”

“궁극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오빠의 팔을 잡고 길 건너편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모텔비는 오빠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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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특별한 날 -4- 14.11.17 803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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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대학교 -9- 14.11.12 473 3 11쪽
» 대학교 -8- 14.11.10 570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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