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02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0.20 09:00
조회
653
추천
4
글자
18쪽

중학교 -7-

DUMMY

다음날, 4교시가 시작될 때까지 셋 중 그 누구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셋이 학교에 반드시 있을 시간에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한다고 내 머릿속의 또 다른 내가 충고했지만 만약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 때문에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정작 만나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어제 점심 시간에 왜 구석 자리로 안 왔어? 하고 묻을 수 없었다. 미연이, 마루, 지인이는 내 의견 따윈 묻지 않고 나하고 같이 밥을 먹어줬다. 그러니 그 애들 마음대로 떠난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오늘은 셋과 만나겠지 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마루가 우리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소리 지를 뻔한 걸 손으로 간신히 막으며 마루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느껴지는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마루는 필요 이상으로 무표정했고, 내가 아니라 비어있는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루야, 다른 애들은?”


마루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을 찡그리고 한참 뒤에야 속에서 올라오는 뭔가를 간신히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지야, 잠시 얘기 좀 하자.”


본능적으로 학원에 관련된 얘기는 아니란 걸 직감했다.


“무슨 얘긴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마루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교실 뒷문으로 나갔고, 난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루가 걸음을 멈춘 곳은 평소 잘 쓰이지 않는 건물 뒤쪽 계단이었다. 나는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와본 건 처음이었다. 환기가 잘되지 않아 바닥에 포장된 시멘트와 고무 냄새가 한데 섞여 진동했고, 구석에서는 오래된 담배꽁초가 보였다.


혹시 나쁜 애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그때, 마루가 계단 난간 앞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 금요일 오후에 시내 갔었어?”

“응?” 뜬금없이 무슨 얘긴가 했지만 일단은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랬는데?”

“그럼 거기서 먹자골목에도 들어갔었겠네?”

“그냥 둘러보기만 했어.”


마루의 얼굴에 점점 어두운색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나는 뭔가 더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려 했지만 이번에는 마루가 빨랐다.


“그런데 왜 그랬어?”

“응?”

“왜 그랬냐고!”


빈 계단에 마루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처음이었다. 마루가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본 건, 그리고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부여잡고 물었다. “나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미연이도 그때 거기에 있었대.”

“응?”

“운이 없게 나쁜 놈들에게 걸려서 돈 뺏기고 주먹과 발로 맞았대. 너무 아파서 소리 못 지르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야. 열 받는 건 보고도 모른 척한 사람도 있었어. ……너.”


머리가 멍해지면서 가슴이 빠르게 뛰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겨우 잊었던 그 날의 일이 방금 전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게 미연이였다고?


“나는……. 미연이인줄 몰랐어.”

“눈이 마주쳤다던데?”

“난 몰랐어!” 나는 커진 목소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어두워서 맞고 있는 사람 교복만 겨우 봤어. 진짜야.”

“교복…….”


마루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도 마루를 제대로 볼 수 없어 바닥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정적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도 마루도 감히 정적을 깰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계단 아래에서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올라오더니 이윽고 우리와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수다를 떨고 있던 그 아이들은 나와 마루 사이의 분위기를 감지하더니 입을 다물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지나 1학년 복도로 들어갔다.


그 애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을 때 마루가 입을 열었다.


“넌 거기 있었고, 미연이는 널 봤어.”


마루가 몸을 돌려 복도로 돌아가려고 하길래 난 그 등에 대고 물었다.


“잠깐만, 미연이는? 미연이는 어떻게 됐어?”


마루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시간을 보낸 다음 말했다.


“병원에 있어.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 있어야 한대.”


입원이라는 단어를 듣고 난 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마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다.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둘이서만 나눈 대화가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1학년 전체에 퍼져있었다. 나는 갑자기 쌀쌀해진 여은서의 태도에서 그걸 눈치챘다.


처음에는 누가 퍼트린 건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마루? 지인이? 아니면 얘기 중에 지나갔던 그 두 명? 하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 날 거기 있었던 건 사실이고,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맞는 걸 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내 주변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여은서는 짝꿍이라 수업시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내 옆에 앉아야 했지만, 우리의 책상은 손바닥 크기만큼 떨어져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구석 자리에 나 홀로 앉았다. 가끔 함께 줄을 서는 마루와 지인이를 보았지만 둘은 구석 자리가 아니라 아이들로 가득한 다른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기껏해야 학기 초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필사적으로 스스로 위로했지만, 아무것도 누리지 않던 생활과 즐거움을 누리다가 잃은 생활은 달랐다. 그것들을 잊기 위해 연습장에 그림을 그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내 집중력을 잃고 책상 위에 쓰러지듯 몸을 뉘이기만 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학교에서 원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내게 새롭게 붙은 이름은 바로 배신자였다. 누가 처음으로 썼는지 몰랐지만 심증은 있었다. 마루나 지인이일 것이다. 둘 중에서 누가 더 가능성이 높냐고 하면 역시 지인이였다. 마루는 그렇게 생각 없이 말하는 아이가 아니니까.


아이들은 내 바로 근처에서 들으란 듯이 배신자여 배신자여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내 등 뒤에 저는 배신자입니다 하고 적힌 종이를 붙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배신자에서 배를 빼서 신자라고 불렀다. 그다음에는 교묘하게 비꼬아서 신자 님이 되었다.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미연이를 때린 그놈들인데. 왜 내가 그 녀석들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고 있는 걸까? 다들 미연이를 때린 나쁜 놈들 앞에서도 이럴 수 있을까? 아니, 못하겠지. 얼어서 벌벌 떨기나 하겠지. 나니까 이럴 수 있는 거겠지.


그래. 나니까…….






집에 들어서니 저녁을 만들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오니?”

“응. 오늘은 일찍 왔네?”

“그러는 넌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다 오는 거니?”

“학교에 좀 일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내 등에다 대고 물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그거 어떻게 됐어? 학원 간다는 거 말이야.”


속이 찌릿한 느낌과 함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마루네 집에 놀러 간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도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강하게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게 행사기간이 끝나서 더 이상 안 된다네.”

“그래?” 엄마는 실망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고 “아이고, 엄마가 미안해. 우리 딸 학원도 못 보내주고.”

“으응. 괜찮아.”


엄마가 말을 덧붙일까 두려워 곧바로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책상 옆에 집어 던진 채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점심때 꾸역꾸역 삼켰던 음식이 다시 올라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 5분 정도 지나자 증세가 누그러졌다. 나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열어 안에 들어있던 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교과서 세 권, 공책 네 권.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방을 나가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반사적으로 나오는 말을 입안에서 한 번 고쳤다. “우리 정말 이사 안 가는 거지?”


된장에 넣으려고 두부를 자르고 있던 엄마가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너희 아버지 성격에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그럴 것 같구나. 왜 그러니? 전에도 비슷하게 묻더니.”

“아니야. 확실하게 해두려고.”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댔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초등학교 때는 싫다고, 싫다고 해도 잘만 이사 다니더니. 왜 정작 필요할 때는 한곳에 정착하려고 하는 건지, 도대체 아늑해야 할 집이 왜 이렇게 방해만 하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엄마에게 이사 가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전학을 가면 다행이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지 않는 이상, 일만 크게 벌이고 학교는 그대로 다닐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건 해결이 아니라 악화였다.


나는 책들 옆에 놓여 있던 지갑을 챙기고 빈 가방을 메면서 방을 나섰다.


“엄마,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오자마자 어딜 가니? 게다가 이 시간에?”

“친구가 뭐 좀 빌려주기로 했거든. 금방 갔다 올 거야.”


마지막 말 때 목소리가 떨려서 도망치듯 집을 나와야 했다.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거짓말이 늘어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만든 거짓말이 사실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밤이었지만 동네는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가로등이 켜져 있는 좁은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십여 분을 걸어 술집을 지나 동네에서 제일 활기 넘치는 상점가에 도착했다. 항상 보는 편의점은 손님으로 가득했고 식당에서는 벌써부터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가게를 살피면서 걷다가 내가 필요한 것을 파는 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내 더 먼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사는 물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친구와 만난다고 했으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적당할까? 20분? 아니, 30분 정도는 괜찮겠지. 그 시간 안에 필요한 걸 다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시간은 넘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옆 동네였다. 나는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동네 경계선에서 멀찍이 떨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가다 보니 모르는 길이었다. 골목길은 깊이 들어가지 않고 큰길에서 둘러보는 형식으로 계속 걸었다. 사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내가 찾는 가게를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 컸다. 길이야 큰길로 나가면 해결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게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참을 돌아다니는 끝에 어느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금은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약국을 발견했다.


나는 약국 앞에 서서 짧게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젊은 언니가 나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을 대한다기보다는 아는 동생을 맞이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히려 그게 불편했다. 나는 거기에 답도 하지 않고 약사 언니가 아닌 뒤쪽의 진열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제가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데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혹시 수면제 파나요?”

“수면제요? 물론 있죠. 잠시만요.”


약사 언니는 먼저 진열대를 살펴보다가 약을 찾을 수 없었는지 내가 볼 수 없는 뒤쪽으로 들어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혹시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밖에 안 되는 애가 수면제를 사는 걸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정말로 경찰이 오면 도망쳐야 하나? 출입문이 겨우 한 명 통과할 정도로 작아서 불가능했다. 경찰에게 잡히면 추궁이 이어질 테고, 그러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계속 샘솟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약사 언니가 손에 납작한 종이 상자를 들고 나온 덕분에 극적으로 마음의 안정이 돌아왔다.


“이건 알약 형태고 잠자기 30분 전에 먹고 편안하게 누워있으면 돼요.”

“센 건 아닌가 봐요?”

“먹자마자 잠자는 약은 여러 가지로 위험하니까요. 이걸로 드릴까요?”

“네.” 나는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아, 제가 학원 때문에 자주 오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몇 개 더 살 수 있을까요?”

“그래요? 몇 개나?”

“한…… 다섯 개?”


순간 약사 언니의 얼굴에 꺼림칙한 기운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섯 개는 역시 너무 티가 났나? 적당하게 세 개 정도만 말할 걸 난 왜 다섯 개를 말했을까.


그때 약사 언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많이는 못 드릴 것 같고요. 두 개면 이 주일은 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드릴게요. 괜찮죠?”


두 개라니. 너무 적다고 생각됐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잘못 말하면 한 개도 못 사게 될 것 같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약사 언니가 비닐 봉투에 넣어주려는 걸 거절하고 그냥 맨손으로 상자를 들고 나왔다. 가격은 한 개에 2,500원으로 생각보다 싼 편이었다. 한 상자에 알약 10개가 들어있으니 두 박스면 총 20개였다. 숫자만 따지면 많아 보이지만, 약효로 따지면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계속 옆 동네를 돌아다녀서 약국 두 곳을 더 들러 각자 수면제 두 상자를 샀다. 집에 돌아갔을 때에는 집을 나가고 두 시간이나 지난 상태여서 엄마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다. 나는 친구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만약 내가 다른 애들처럼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씨도 먹히지 않았을 거짓말이었다.






자정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집안을 점검했다. 엄마 아빠는 이미 잠이 든 지 오래였고 창밖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방문을 잠그고 부엌에서 가져온 물 한 컵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 옆에는 수면제 여섯 상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창으로 들어오는 옅은 빛에 의지하며 상자를 열어, 포장에서 알약을 하나하나 꺼냈다. 한 상자당 20알, 총 60알. 책상 위에 놓이는 알약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손가락의 떨림이 심해지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횟수가 늘어갔다.


알약을 모두 꺼냈다. 왼손에 적당한 양을 덜고 오른손으로는 다시 컵을 쥐었다. 한 번에 60알을 모두 먹을 수는 없으니 조금씩 먹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손바닥 위에 놓인 알약을 바라봤다.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고요한 방안에서 귀만 예민해져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빠르게 내 심장 소리도.


그만둬야 한다는 목소리 뒤에는 앞으로를 떠올려보라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잘못된 현실을 바꿀 힘도 없었고 도망칠 곳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수면제를 입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물 한 컵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추면 계속 이을 수 없을 것 같아 입안에서 침을 모아가며 억지로 먹어댔다. 30개 정도 먹었을 때에는 배가 불러왔고, 40개를 넘어가면서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50개를 넘어가서는 더 이상 입안에 무언가를 넣으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51개를 끝으로 알약 먹기를 중지했다. 남은 9알은 상자에 도로 집어넣어 가방에 넣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어지러웠고,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피곤함이 몸을 짓눌렀다. 이불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움직이다 큰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나는 얼굴을 바닥에 뭉갠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가슴 안쪽이 답답해지면서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지만 몸에는 아주 약간의 힘이 돌아왔다. 나는 바닥을 기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잠에 빠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듯한 지독한 피로 때문에 온몸이 쉬게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정신이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고통에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숨쉬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온몸이 추워지면서 식은땀까지 났다.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다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나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커헉!”


눈을 뜸과 동시에 막혔던 숨이 뚫리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입을 크게 벌리고 최대한 많은 공기를 마시고 뱉고를 반복하는 사이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방이었다. 어젯밤 그 난리를 쳤던 내 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몸을 살펴봤다. 땀에 흠뻑 젖은 속옷이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란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완전히 젖었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 나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바라보니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아직 엄마 아빠도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의 푸른빛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안 죽었구나.”


허무하다는 감정을 느끼자마자 뱃속이 요동쳤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기분 나쁜 녹색의 질척한 물이 입안에서 쏟아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특별한 날 -5- +4 14.12.10 974 3 12쪽
30 회사 -9- 14.12.08 477 3 16쪽
29 회사 -8- 14.12.05 473 4 8쪽
28 회사 -7- 14.12.03 344 5 10쪽
27 회사 -6- 14.12.01 532 4 14쪽
26 회사 -5- 14.11.28 504 3 11쪽
25 회사 -4- 14.11.26 650 2 10쪽
24 회사 -3- 14.11.24 711 2 15쪽
23 회사 -2- 14.11.21 464 2 10쪽
22 회사 -1- 14.11.19 513 3 10쪽
21 특별한 날 -4- 14.11.17 803 5 12쪽
20 대학교 -10- 14.11.14 580 3 14쪽
19 대학교 -9- 14.11.12 473 3 11쪽
18 대학교 -8- 14.11.10 569 3 11쪽
17 대학교 -7- 14.11.07 593 3 14쪽
16 대학교 -6- 14.11.05 481 3 8쪽
15 대학교 -5- 14.11.03 573 4 12쪽
14 대학교 -4- 14.10.31 384 4 12쪽
13 대학교 -3- 14.10.29 647 3 11쪽
12 대학교 -2- 14.10.27 679 3 9쪽
11 대학교 -1- 14.10.24 728 6 13쪽
10 특별한 날 -3- 14.10.22 520 7 11쪽
» 중학교 -7- 14.10.20 654 4 18쪽
8 중학교 -6- 14.10.17 776 5 15쪽
7 중학교 -5- 14.10.15 596 4 17쪽
6 중학교 -4- 14.10.13 740 5 11쪽
5 중학교 -3- 14.10.10 613 5 10쪽
4 중학교 -2- +1 14.10.08 795 6 8쪽
3 중학교 -1- 14.10.06 698 6 14쪽
2 특별한 날 -2- 14.10.03 1,164 1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