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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21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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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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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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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중학교 -5-

DUMMY

짧아도 즐겁게 지내면 된다. 나는 마루의 그 말에 일종의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어 늦게나마 학교생활을 고쳐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숙제나 준비물을 잊어버린 아이에게 먼저 도움을 줘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입학부터 내가 만들었던 ‘외톨이 나’라는 인물은 이미 정형화되어 있어서 아무리 새로운 일을 해도 ‘외톨이 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솔직히 실망했지만 스스로 쌓아온 업보로 인정하고 남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학교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나쁜 기억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훨씬 컸다.


미연이, 마루, 지은이는 이제 가끔 쉬는 시간에도 우리 반에 찾아왔다. 알고 보니 셋 다 반이 각각 달랐다. 미연이는 2반, 마루는 1반, 지은이는 5반이었고 나는 3반. 어쩐지 점심 먹을 때마다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때까지 얘깃거리를 쌓아둔 거였다.


점심도 여전히 셋이서 같이 먹는다. 가끔 평화로운 점심이 그리워질 때면, 주말에 항상 누리고 있음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시끌벅적한 점심 식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던 어느 순간, 나는 학교를 즐겁게 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딱히 나쁜 일도 없었고, 공부도 그럭저럭 잘 됐다. 반 아이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속상한 일이 아예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때는 그림이 나를 도와줬다.


다만, 언제 전학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마음 언저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덧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지 않기도 하고, 또 시험에 집중하기 위해 셋과 만나지 않기로 미리 합의를 봤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루와는 또 다른 약속을 하나 더 했다.


“민지야. 시험 끝나는 날 우리 집에 놀려올래?”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 미연이와 지은이가 돌아간 뒤에 마루는 그렇게 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눈을 크게 깜박이며 대답했다.


“너희 집에? 나야 상관…… 아니, 괜찮긴 한데. 미연이와 지연이도 같이 가는 거지?”

“아니. 너만.” 마루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전에 그림 보여준다고 했잖아.”


나는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아! 그랬지. 그랬었지. 그런데…… 정말 나 혼자만 가도 돼?”


내 말에 마루는 입술을 살짝 내밀면서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싫으면 말고.”

“아, 아니야. 싫기는, 좋기만 한걸.”

“그럼 시험 마지막 날에 우리 집에 오는 거다? 다른 약속 잡지 말고,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시험 끝나고 대기하고 있어. 알았지?”


평소 셋 중 누구보다도 가장 남의 말을 존중해주던 마루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자리를 뜬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루네 집에 놀러 가서 마루의 그림을 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들떴다. 미술하는 애 방은 어떤 모습일까? TV에서 보는 것처럼 방에 캔버스가 걸린 이젤과 각종 물감이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마루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오르는 궁금증은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내게는 적당히 집중하기란 재능이 있었다. 왜 단순하게 집중하기가 아니라 적당히 집중하기냐면 집중 상태가 오래가지 못해서였다. 단 한순간, 짧게는 몇 초에서 최대로 길게는 15분 정도가 내 한계였다. 딱 학교 쉬는 시간과 맞는 시간. 딱 두 배만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 재능 덕분에 시험공부에 큰 불편은 없었다.


하루를 두 개로 나눠 오전 중에는 시험을 치르고, 오후에는 다음날 시험을 대비하는 식으로 지내다 보니 그야말로 쏜살같이 시험이 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답안지가 제출된 뒤에는 머릿속은 뭔가를 할 힘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연신 떠들고 이곳저곳에 놀러 갈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는 퓨즈 나간 로봇처럼 책상에 축 늘어져 있었다.


“민지야. 김민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준 덕분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어느 사이엔가 종례가 모두 끝나고 반 아이들 모두 요란하게 책상을 끌며 교실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날 깨워준 아이를 바라봤다. 내 짝꿍, 여은서가 가방을 메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대체 뭘 했길래 끝나는 것도 모르고 기절해 있어?”

“음……. 시험공부?”

“에이, 그럴 리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여은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어깨를 콕콕 찔러댔다. 나는 반사적으로 무시하려다가 짧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지내자고 다짐한 걸 떠올리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럼 넌 어젯밤에 뭘 했는데?”


여은서는 이를 보이며 씩 웃더니 목소리를 바꿨다.


“소녀, 황금 같은 평일 오후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 시내의 유명한 가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조사하였사옵니다.”

“갑자기 웬 사극 말투?”

“재미있지 않사옵니까?”

“재밌다기보다는 당황스럽…….”


그때 세 명의 반 아이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 여은서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은서야, 가자.”

“어, 알았어.” 은서는 가방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저기, 민지야.”

“응?”

“우리 이대로 점심 먹고 노래방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나는 대답에 앞서 여은서 친구들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다들 별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놀라웠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면 다들 불편해했을 텐데. 아니, 그 전에 같이 가자는 제의 자체가 없었을 거다.


때문에 애들과 함께 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선약이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미안, 나 오늘 다른 데 가기로 했거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같이 놀자.”


여은서는 손을 흔들며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뒤에 따라가던 한 명도 조그만 목소리로 한 박자 늦게 “안녕” 하고 인사해줬다. 나는 얼떨결에 들어 올린 내 손을 빤히 바라봤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이 왼쪽 가슴에서 피어나는 걸 느꼈다.


빠르게 비워지는 교실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이제 몸만 움직이면 되는데 아직 마루가 도착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이 교실 청소를 시작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교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조금이라도 빨리 학교를 벗어나려는 아이들로 인해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나는 교실과 복도의 경계선에 서서 마루를 기다렸다. 다들 바삐 움직이는데 느긋하게 서 있으니 마치 나만 특별한 공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민지야.”


수십 개의 목소리 속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언제나 제대로 들렸다. 기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가방을 멘 마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아이들의 파도에 합류해 있기 때문인지 마루는 멈춰 서지 않고, 지나가는 와중에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거기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하교 행렬에 합류했다.






마루네 집은 학교에서 TV에 광고도 종종 나오는 유명한 아파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컸다. 아파트 단지만으로 하나의 동네를 이룰 만큼. 안내판을 보니 내가 들어간 입구는 후문이었는데 건물에 슈퍼마켓과 편의점은 물론 미용실, 학원, 문방구에 은행까지 들어서 있었다.


나는 마루를 따라 단지 내로 들어가다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단지 내에 학교에 도서관 심지어는 파출소까지 있어 내가 지금 한국에 있는 건지 아니면 어느 외국의 잘 사는 동네에 있는 건지 혼란이 올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일 년 내내 안락과는 거리가 먼 반지하의 우리 집을 떠올렸다.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이쪽이야.”


마루가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척척 길을 찾아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건물들을 살펴봤는데 이 건물이 저 건물 같고 저 건물이 이 건물 같아서 혼자 왔다면 일백 퍼센트 길을 잃어버렸을 것 같았다.


105동 건물 앞에 도착한 우리는 굳게 닫힌 문과 마주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마루는 이번에도 익숙하게 TV 속에서나 보았던 디지털 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간단한 음과 함께 자동문이 열리고 우리는 곧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다. 상가나 큰 건물이 아니라 아파트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처음이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생각보다 깔끔했고, 생각보다 느렸지만 생각보다 편안했다.


“너 아까부터 무슨 생각해?

“응?” 얼굴을 화악 뜨거워졌다. “아니야. 아무것도.”


마루의 집은 굉장히 넓었다. 단순히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거실만으로 이미 우리 집의 전체 크기를 뛰어넘었으니 말이다. 숨이 콱 막히면서, 이 세상에는 아직 계급이 남아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민지야, 여기.”


마루를 따라 들어간 곳은 네 개 정도 연달아 붙여놓은 것처럼 커다란 방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참으려고 애쓰면서 방 안을 살펴봤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침대에, 최근에 산 것처럼 세련된 컴퓨터와 책상, 그리고 한쪽 벽을 장식한 커다란 책장이 전부였다. 기대했던 이젤이나 캔버스는 없었다. 무엇보다 물감 냄새 같은 것도 전혀 나지 않았다.


마루는 가방을 컴퓨터 책상 옆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네 가방도 여기에 내려놔.”

“어, 으응.”


나는 마루의 가방 옆에 내 가방을 내려놓다가 그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제까지는 나란히 볼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더럽고 오래된 내 가방은 깨끗하고 튼튼해 보이는 마루의 가방과 비교됐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열등감을 입술을 질끈 깨물어 날려보낸 다음 마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마루야. 그림은 어디 있어?” 나는 키보드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태블릿을 바라보며 “혹시 컴퓨터 안에 있는 거야?”


어느새 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마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림은 다른 방에 있어.”

“다른 방?”


마루는 따로 설명하지 않고 손짓과 함께 방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들어서자,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부드러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건 얼핏 바나나 냄새와 비슷했지만 바나나처럼 차갑지 않고 따뜻해서 시간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계속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나는 마루에게 물었다.


“집에 아무도 안 계셔?”

“응. 다들 저녁이 돼야 들어올 거야. 어쩌면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더 늦을 수도 있고.”


나는 마루를 따라 거실과 한쪽에 있는 부엌을 지나 다른 방과 이어진 작은 복도로 들어갔다. 복도 끝 부분 좌우에는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마루는 그중 왼쪽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진한 물감 냄새와 함께 상상과는 조금 다른 방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 방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방 한가운데 놓은 캔버스가 걸린 이젤을 중심으로 커다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직후 그것이 숲이 아니라 벽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놀라운 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캔버스에는 왠지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한 명 그려져 있었다. 언젠가 마루가 지갑에서 꺼내 보여줬던 더 울프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마루의 그림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했다. 항상 잡지를 보고 따라 그리며 홀로 공부했던 나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한 표현에 패배감보다는 존경이 먼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데 말이야.” 마루가 캔버스 옆에 서서 말했다. “아무래도 너무 딱딱하지?”

“응?” 나는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딱딱하다니?”

“에이, 알면서 뭘 그래. 네 그림하고 비교하면 내 그림은 무슨 동상 같잖아.”


그런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루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쳐다봤지만 별로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이 초라해져 그나마 남아있던 자신감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루는 입을 삐죽 내밀고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맨날 정물화만 그려대서 그런가?”

“정물화? 사과나 바구니. 뭐 그런 거?”

“응.”


마루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난 뒤, 구석에 있던 간이 의자를 두 개 가져왔다. 그리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그림에 대한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선이 서툴다, 형태력이 떨어진다, 톤에 대한 이해도도 없다 등등.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할 때가 대부분이어서 나는 대부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가끔가다 아는 단어나 이야기가 나오면 조잡한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뭐, 석고 얘기가 나올 때 “브루투스, 너마저…….” 하는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마루는 그림을 보여주기 보다, 그림에 대해 맘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느꼈다. 지식도 경험도 부족한 나는 그리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도, 마루는 어려운 말을 풀어서 설명하고 안 되겠다 싶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말수가 적은 마루였기에, 이런 모습은 굉장히 생소했다.


한참을 얘기하던 마루는 헛기침을 거칠게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실 것 좀 가져다줄까?”


사실 한참 전부터 목마른 상태였던 나는 웃으며 “부탁할게” 하고 말했다. 마루가 나간 사이 나는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숲의 그림을 살펴봤다. 그냥 물감이 아니라 조금 울퉁불퉁한, 왠지 끈적일 것만 같은 내가 모르는 물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끝으로 만져보려다가 그만두고 가까이에서 눈으로만 봤다.


서툰 솜씨로 움직인 붓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즐겁게 느껴졌다. 나는 뒷걸음으로 물러서 시야를 넓혔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정적인 숲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은 굉장히 활기차고 즐거웠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이전에도 몇몇 그림을 보다가 느꼈던 그런 감정이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라는 충동을 느꼈다.


“민지야. 여기.”


나는 가까스로 충동을 억제하고 몸을 돌려 마루에게서 컵을 받았다. 분홍색 곰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는 예쁜 컵이었다. 오렌지 주스의 달콤함이 혀 위에 퍼지면서 목을 넘어가자 갈증이 눈 녹듯 해소됐다.


그 때문일까? 이제까지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말이 스스럼없이 나왔다.


“이 그림 참 부럽다. 나는 집 벽에 그림 그린다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에이, 보통은 집 벽에 이런 거 안 그리지.” 마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 끝으로 그림을 만지면서 “여긴 작업실이니까 특별히 허락받은 거야.”

“작업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러움이 물밑에서 솟아올랐다. 세상에 집 안에 작업실이라니. 그것도 한 가지 일을 위한. 이 동네에 이사와 몇 평 되지도 않는 내 방을 가졌을 때 방방 뛰며 기뻐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그저 조용히 주스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민지야.” 마루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너 학원은 안 다닐 거야?”

“학원? 무슨 학원?”

“미술 학원.”


그 단어를 듣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솔직한 얘기로 학원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제대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은 욕심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고는 싶지만……. 우리 집이 좀 힘들거든.”

“아.” 마루는 입을 벌렸다가 작은 숨과 함께 닫은 뒤 “미안.”

“아니야. 뭘 사과까지야.”


씁쓸했다. 창피했다. 억울했다. 갖가지 감정이 동시에 피어올라 바닥이 보이는 오렌지 주스를 연신 홀짝였다.


“혹시 자주 전학 간다는 말도 그래서 그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적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렇다면 민지야.” 마루는 의자를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우리 학원에 와라. 한 달 정도는 친구 추천으로 공짜로 다닐 수 있어.”

“고, 공짜로?”


이번에는 마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이상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다녀보는 게 낫지 않을까?”

“글쎄……. 내가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지도 모르는데.”

“에이, 내가 보기에는 넌 앞으로도 계속 그림 그릴 거야. 보통은 너처럼 공부까지 하면서 그리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한 달 동안 최대한 많이 배우면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걸?”


마루의 목소리는 강한 확신에 차 있어서 힘을 모두 빼고 기대고 싶게 만들었다. 짧은 고민의 시간 중,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안이 자꾸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무시하지 않았기에, 불안은 이번에도 내가 자신을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불안을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컵을 밑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생각해보고 내일 학교에서 말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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