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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15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0.22 09:00
조회
520
추천
7
글자
11쪽

특별한 날 -3-

DUMMY

“아, 망할.”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러보기도 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도 보며 생각을 날려버리려고 애썼지만,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자리는 또 왜 이렇게 좁은 거야?”


처음으로 탄 KTX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비행기 일등석처럼 쾌적하고 안락하며 식사에 와인까지 나오는 좌석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시외버스보다 좁게 느껴지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추수가 끝난 황량한 논과 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몇 년 만에 보는 그 풍경에 마음이 빼앗길 법도 하건만, 나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긴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에 5초도 되지 않아 식상함을 느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따, 아니 괴롭힘을 당했던 때, 처음으로 자살 시도를 했던 때. 내 삶에서 중학교 1학년은 여전히 나에게 커다란 트라우마였다.


수면제를 통한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는 거의 체념하다시피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는 연습장에 그림 그리기도 중단했다. 아이들이 내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너처럼 그림 못 그리는 애는 처음 봤다, 따라 그리면 누가 이 정도도 못 그리냐 등등,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마루, 지인이는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는 않았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무시할 뿐이었다. 미연이는 한 달 정도 뒤에 다시 학교에 나왔지만 역시 둘처럼 날 못 본 체했다. 셋이 뭉쳐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시작되기 직전, 하늘이 도왔는지 전학을 가게 됐다. 한곳에 자리 잡아 착실하게 지내보려던 아빠의 노력이 실패한 것이다. 아빠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때 얼마나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았던 신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할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 죽다 살아난 것 같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다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KTX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고 있는지 떠올라서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헛웃음도 웃음인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나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옆자리에 누가 앉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화장하고 예쁜 옷까지 입었지만, 얼굴 그 어디에서도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에 목포역에 도착했다. 역시 평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봤는데 군인들이었다. 대부분 20대 초반으로 이제 막 군인이 된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멘 채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저 애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회사 다니던 때에 남자 직원이 했던 말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이 된 듯한 느낌이라던데 정말로 그런 걸까? 아니지. 평소에 허풍이 심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과장이 섞였을 거야.


내 마음이 멋대로 현재의 나와 저 군인들 중에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 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답이 나올 수 없었고, 답이 나와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교였다. 저들이 더 불행하다고 해서, 내가 더 불행하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바뀌는 건가? 아니었다. 이건 마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과 비슷했다. 살기 힘들다고 푸념하는 사람에게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기라는 말 같은 거.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지금 힘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란 말이다.


“저기 언니~.”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아찔하게 귀여운 척하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단발이 잘 어울리는 아가씨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말인가요?”

“네. 죄송한데요오~. 저하고 오빠가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 어린애 같은 말투에 짜증이 났다. 고개를 들어 아가씨 뒤에 있는 ‘오빠’를 보니,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긴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영화배우나 할 법만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멋진 남자를 본 값이라 치고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그러죠.”

“감사합니다!”


아가씨는 주머니에서 분홍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두꺼운 커버가 장착된 최신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앱을 실행시킨 다음 나에게 빌려줬다.


“저어기 설 테니까 목포역 글자가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알겠죠?”

“네, 네.”


아가씨가 남자친구에게 돌아가는 동안 나는 각도에 따라 햇빛을 반사하는 스마트폰을 살펴봤다. 같은 여자지만, 저런 비효율적인 커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작사에서는 최대한 두께와 무게를 줄이면서 디자인을 살리려고 수개월을 노력하는데, 이건 제작사의 노고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하긴 이런 사람 덕분에 액세서리 회사가 먹고 사는 거겠지.

나는 휴대폰을 가로로 들어 화면에 표시된 커플을 바라보며 촬영 버튼을 터치했다. 찰칵하는 구형 카메라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최신 기종답게 잘 찍혔지만 혹시 몰라 두 번 더 찍은 다음 아가씨에게 걸어갔다.


“여기 있어요.”


아가씨는 휴대폰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남자친구에게 잘 나왔다고, 역시 최신기종은 다르다는 둥 바로 옆에 있는 나는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했다. 거기에 화를 내려고 할 때, 그녀의 남자친구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사과의 표시였다. 어떻게 저런 무개념녀에게 저렇게나 개념이 착실하게 잡힌 남자친구가 있는지 미스터리가 따로 없었다.


나는 사진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점심때라는 걸 떠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맞은편 골목길에 건물 1층을 모두 쓰고 있는 분식집이 있어 그곳에 가기로 했다. 육교가 있어 기다리는 시간 없이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갈 때마다 꼭 먹어줘야만 하는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우동이었다. 그래서 고속버스와 KTX 중에 뭘 선택해야 할지 굉장히 고민했다. 고속버스라면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우동을 먹을 수 있겠지만, KTX는 도중에 먹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아무 고민도 없이 룰루랄라 목포에 내려가는 거라면 나는 당연히 고속버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효율적으로 써야 했기에 KTX밖에 답이 없었다. 좀 더 빠르게 가자면 비행기가 있겠지만……,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문제였다.


한적한 밖과는 다르게 분식집 안은 꽤 붐볐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자극적인 음식 냄새에 배가 요란을 떨었다. 내가 비어있는 2인용 식탁에 앉자마자 앞치마를 한 젊은 여종업원이 다가와 전라도 억양이 묻어있는 말투로 물었다.


“뭐로 드릴까요?”


아직 메뉴판을 보지도 않았다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넘어가기로 했다.


“우동 주세요.”

“네.” 종업원은 주방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4번 테이블 우동 하나!”


씩씩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아까 전에 만났던 귀여운 척하는 아가씨와 비교됐다. 만약 한 명과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어떨까? 종업원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내는 방면, 아가씨 쪽은 의지할 사람만 찾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굶거나 사고를 당하겠지. 재난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진부한 이야기처럼 말이야.


허황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 여러 명이 시끄럽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살을 찡그리며 돌아보니 목에 사원증을 건 젊은 사람들이었다. 남자 둘에 여자 둘. 이상적인 비율에 흥분한 건지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나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서울과는 확연히 다른 억양에 내가 목포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감상에 젖기보다는 항상 생각하던 걸 정말 행동으로 옮겨버렸구나, 하는 놀라움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차분했다. 어째서일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에 비슷한 대답을 찾았다. 지금 나는 마치 영화관에서 배우들을 바라보듯이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쟤가 여행을 떠나는구나, 사진을 찍어주네, 식당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네. 내 행동들은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객관적인 시선에 의해 나에게 전해졌다.


청산가리가 담긴 유리병은 여전히 내 치마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순간 기차를 탔을 때부터 꾸준하게 나를 따라다닌 불안감이 다니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물건을 너무 안이하게 보관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 말이다. 그래도 내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보관하는 게 역시 마음이 편했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가방은 실수로 잃어버릴 수도, 소매치기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치마 주머니는 너무한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내 시야에 커다란 그릇 하나가 들어왔다.


“맛있게 드세요.”


친절한 종업원의 인사와 함께 내려진 그릇에서는 우동이 김을 모락모락 피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느낀 첫 느낌은 실망이었다. 역시 분식집 우동은 휴게소 우동과 달랐다. 바로 옆에 두고 비교해보지 않으니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건 분명했다.


젓가락을 들어 우동을 맛보려고 할 때,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분식집 안을 가득 채웠다. 반사적으로 눈에 독기를 품고 네 명의 사원을 바라보다 안쪽에 앉아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깜짝 놀라서 입을 동그랗게 말더니 알아서 동료들에게 조용히 하자고 말했다.


나는 다시 우동으로 돌아와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우동은 면발도 쫄깃하고 간도 너무 짜지 않아 맛있었다. 이 정도라면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멀리 떨어져있던 또 다른 시선이 내 안으로 돌아왔다. 그건 문제였다. 이제까지 가슴 안에 꾹꾹 눌려졌던 감정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두 손으로 그릇을 잡고 우동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처럼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갓 나온 우동의 열기가 얼굴에 닿았다. 굉장히 뜨거워서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나는 입술을 그릇 가장자리에 대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되살아나던 감정들이 국물과 함께 다시 속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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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사 -2- 14.11.21 464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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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대학교 -10- 14.11.14 581 3 14쪽
19 대학교 -9- 14.11.12 4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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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대학교 -7- 14.11.07 593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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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대학교 -3- 14.10.29 647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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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학교 -3- 14.10.10 613 5 10쪽
4 중학교 -2- +1 14.10.08 796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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