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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김민지 씨의 도도한 자살여행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4.10.01 16:52
최근연재일 :
2014.12.10 0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07
추천수 :
137
글자수 :
169,110

작성
14.10.13 09:00
조회
740
추천
5
글자
11쪽

중학교 -4-

DUMMY

유지인도 미연이처럼 지갑 속에 더 울프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받아내는 과정은 꽤나 험난했다. 처음에는 넙죽 줄 것처럼 내밀다가도 내가 잡으려고 하면 곧바로 손을 거둬 두 손으로 꼬옥 잡기를 하지 않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를 하지 않나, 결국 마음먹고 나한테 다시 내밀 때는 무슨 영화라도 찍는 마냥 비장한 목소리로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가져가” 라는 진부한 대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유지인의 눈초리가 너무 매서워서 결국 교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지난번 미연이 빌려준 사진과 같은 종류의 사진으로, 이것 또한 흑백에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이것도 그리는 맛은 있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미연이에게 준 그림처럼 일주일을 모두 쓰자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주말을 반납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역동적인 사진이라도 비슷하다면 역시 두 번째 그릴 때는 매력이 반감됐다.


결국 학교에서만 완성하기로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라면 적당히 괜찮은 퀄리티로 나올 테니까. 만약 유지인이 왜 우리 오빠 그림이 더 못한 것처럼 보이냐고 따지면 내 애정도의 차이라고 말해줘야지.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고.






“와, 진짜 잘 그렸다.”


지인이의 감탄에 나는 마시고 있던 물을 내뿜을 뻔했다. 가까스로 참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점심시간에 사건 하나를 더 추가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어디 나도 좀 보자.”


맞은편 미연이가 그렇게 말하며 지인이가 쥐고 있던 연습장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적당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따지듯이 말했다.


“이거 우리 지웅 오빠 그림보다 더 신경 써서 그린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애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미리 준비했던 말의 대상이 지인이에서 미연이로 바뀌어버렸다. 이렇게 사용해도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한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데 미연이 옆에 앉아있던 마루가 내 그림을 쓱 보더니 말했다.


“괜찮네. 저번 그림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말대로 이번에는 적당한 퀄리티만 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힘을 뺐었으니까.


“그게 보여?”

“저번 그림하고 비교하면.” 마루는 간단하게 대답하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아, 물론 내가 보기에 그렇다고.”


혹시라도 공격으로 오해할까 봐 서둘러 말을 덧붙이는 마루의 모습에 나는 안심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걸.”


또래 간에 훈훈한 말을 하는 건 어떻게든지 어색한 상황을 만들고 또 주변에 확산되기 때문에 우리 넷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숟가락 젓가락을 움직이기만 했다.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지인이가 내 그림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밥 먹고 문방구에 가서 아스테이지 좀 사와야겠다.”


그 말에 맞은편의 미연이가 반응했다.


“아스테이지는 왜?”

“민지 그림 코팅하게. 이대로 놔두면 금방 누렇게 되고 연필 번지고 할 거니까.”

“오호, 그거 괜찮은데. 나도 같이 가자.”


그리고 맞은편의 마루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민지 그림 못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네?”

“그, 그러네.”

“얘는, 그렇게 정색하지 마. 난 자급자족하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나중에 이때다! 싶을 때 내가 직접 그릴 거야. 그 때 되면 너도 보여줄게.”


처음 마루의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 ‘귀찮다’ 였기 때문에 거짓말이 탄로 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내가 지은 웃음은 진짜였다. 잡지에 실리는 프로들의 그림이 아니라 제대로 미술을 하는 또래의 그림을 볼 기회는 나에게 있어 처음이었다.


“그림 보여주면 정말 좋겠다.”


말을 한 직후, 나는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만 한다는 게 진짜로 말이 되어 나온 거라서였다. 절로 얼굴이 붉어지며 다른 애들 눈치를 살폈다. 옆의 둘은 점심시간에 교문을 나갈 계획으로 열심히 토론 중이라 내 얘기는 듣지도 않았지만, 마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야겠는걸.”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마루가 금방 그림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지만 거의 한 달이 되도록 그림은커녕 선 하나 보지 못했다.


그랬다. 미연이와 지은이에게 그림을 그려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셋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말이든 행동이든 처음 마음먹었을 때 해야 하는데, 그 시기가 지나가니 더 이상 같이 점심 먹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돼버렸다.


더군다나 우리가 구석 자리에서 항상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전혀 상관없는 애들까지 구석 자리로 몰려와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제 나 혼자 밥을 먹게 돼도 상대적으로 조용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구석 자리에 사람이 늘게 된 덕분에 잔반통을 더럽게 쓰는 아이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미연이가 식사 중에 물었다.


“그런데 김민지.”

“응?”

“그동안 보니까 너 친구 사귀는 거 싫어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왜 전에는 항상 혼자 있었어?”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위로 들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잠시 대기했다.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솔직하게 내 사정을 설명할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말로 꾸며낼 것인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미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민지야.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마치 우리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내려 셋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얘가 대체 왜 이래?’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어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헛기침을 자작이지만 자작이 아닌 것처럼 세 번 한 뒤 약 5초 동안의 침묵으로 분위기를 리셋 시키고 셋의 얼굴을 살폈다. 내 행동은 반만 먹힌 듯, 여전히 표정에 당황이 묻어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됐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감각에 집중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리고 결정했다.


“실은 우리 집이 초등학교까지만 해도 이사를 일 년에 대여섯 번은 하고 다녔거든.”

“그래?”

“그러다 보니 애들하고 지낼만하면 전학 가고, 또 지낼만하면 전학 가니까 이거 뭐 적응하는 것도 힘들더라고. 서로 연락한다고 해도 전학 가고 처음 일이 주뿐이고. 사실 귀찮겠지. 나도 귀찮은데 그 애들은 오죽할까. 친한 친구들은 전화기 너머가 아니라 학교에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일부러 애들하고 알고 지내는 것도 귀찮아지더라고. 뭐,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바로 근처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의 수다 소리부터 시작해, 벽에 튕겨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1학년 전체의 목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그 속에 내가 들어야 하는 세 사람의 목소리는 없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두서없이 장황하게 얘기했기 때문일까? 마루와 지인이는 말을 하기 전의 나처럼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미연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해는 되는데 이해가 가지 않네.”


미연이 본인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그 말이 나오게 한 장본인인 나는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지었고, 마루와 지인이는 덩달아 팔짱을 끼더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도 이해가 되는데 이해가 안 된다.”

“이하동문.”


둘은 사뭇 진지한 척했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이 한 말이 참을 수 없는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그 분위기에 동참할 수 없었기에,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셋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이윽고 처음 말을 꺼냈던 미연이가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리고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친구를 만들지 않으려는 건지 이해가 가.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미연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일부러 학교생활을 고독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


그 말을 듣고 나는 지인이를, 지인이는 마루를, 마루는 나를 바라봤다. 우리 셋은 동시에 무언가를 깨닫고 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말이 점점 더 꼬이잖아.” “모순되잖아.” “있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좀 간단하게 말해.”


숨 쉴 틈도 없는 삼 연속 공격에 미연이가 움찔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아, 왜 그래. 솔직히 너희 다 이해하고 있잖아.”


그 말은 자기방어에서 나오긴 했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난 미연이의 의도를 이해했고, 마루와 지인이도 슬금슬금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았다.


슬슬 미연이를 압박하는 걸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연이가 말을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일단은 나도 같은 생각.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선생들이 열심히 괴롭혀 주는데 일부러 학교를 힘들게 다닐 필요는 없잖아?”


마루는 시선을 옮겨 지은이에게 배턴을 넘겨줬다. 지은이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난 기권. 친구가 전학 가본 적이 있어야 알지.”


그 말에 미연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뭔 소리야. 6학년 때 소영이 전학 갔었잖아.”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걔는 네 친구였지 내 친구는 아니었다고.”

“어? 그랬어?”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며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확실히 그런 경우도 없잖아 있었다. 나하고 누군가는 친구가 아닌데 내 친구와 누군가는 친구인 그런 경우 말이다.


“아무튼 민지야.” 상황을 정리하듯 말을 걸어준 건 마루였다. “네가 언제 전학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평범하게 지내자. 살다 보면 짧게 만나는 사람도 있고 길게 만나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짧은 만남이라면, 짧지만 즐겁게 지내면 되잖아?”


보통 때 같았으면 주변의 소음에 묻혀버렸을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동시에 가슴 한곳이 뭉클해졌다. 혼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안도감이 몸 전체로 퍼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몸에 밴 습관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겨우 진정돼서 다시 대화로 돌아가려 했더니, 미연이, 마루, 지은이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서투른 배려에 나는 아직 울음기 남은 얼굴로 웃어보려고 애쓰면서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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