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81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10 10:19
조회
286
추천
3
글자
12쪽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DUMMY

중앙황천 다움성 뒤쪽은 깎아지른 듯 거대한 돌산이었다.


가림산의 가파른 정상에 오르면 다움성의 넓은 터가 내려다보였다.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성을 한데 아울러 다움성이라 불렀다.


왼쪽 지평선에는 중천의 검붉은 빛이 아득하게 보였다. 오른쪽 지평선에 영천옥의 개심수 숲이 희미하게 보였다.


영천옥 너머로 한참을 날아야 대명천에 닿을 것이다. 그 남쪽 끝에 마음숲이 있었다.


다움성에서 멀어질수록 천인과 차사의 저택은 적어지고 산과 강, 호수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끝까지 다다르면 붉게 이글거리는 별밭을 보게 될 것이다.


가림산 꼭대기에 아담하고 깔끔한 별채 예사당이 있었다. 중앙황제 현원이 분신처럼 아끼는 예사달이 머무는 곳이다.


별채는 그 모양만으로도 고즈넉하지만, 키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울타리를 이루고 때때마다 꽃을 피우며 운치를 더했다.


울타리 안쪽 작은 샘에서 맑은 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다. 종종 작은 새들이 날아와 쉬기도 했다.

예사달은 이곳을 뜰안샘이라 불렀다.


다움성은 하늘열림날로 들떠있지만, 떠들썩한 기운이 이곳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예사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고요했다.


정갈하게 손질된 마당으로 한 천인이 연기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깡마른 몸에 갸름한 얼굴이었다. 푸른 빛과 흰빛이 섞인 머리카락 때문에 나이는 중앙황제와 비슷해 보였다.


긴 저고리를 허리띠로 묶고, 통이 넓은 소매 안에 두 손을 감춘 모습은 여느 천인과 똑같았다.


중앙황천에서는 연노랑이나 황금색, 황톳빛 저고리에 가장자리를 고동색으로 마무리하는데, 그의 저고리는 옅은 연둣빛에 가장자리를 검은색으로 마감하였다.


검은색 도련과 진회색 바지는 북방흑천의 것이었다. 머리에 쓴 두건조차 검은색이었다.


큰 귀와 검푸른 눈동자, 천사장을 닮은 이목구비가 북방흑제 전욱의 아들, 다훤임을 알려주었다.


“이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네.”

방문이 열리고 한 사내아이가 반갑게 다훤을 맞았다. 아이는 느긋한 걸음으로 대청마루에 나와 섰다.


다훤은 꼬마 예사달을 보자 빙긋이 미소 지었다.

“다움성에 오면 늘 그 모습이구먼.”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효자의 마음이라 해두게.”

아이의 모습만큼이나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다훤은 그의 말을 듣고 짧은 콧소리를 내었다.


중앙황제를 곧잘 어머니라고 부르니 넉살 좋은 친구였다. 예사달이 현원의 오른쪽 눈이라는 것을 천선인 모두가 알고 있는데.


두 번째 대혼란에서 현원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때 떨어져나온 눈알이 우주를 떠돌았다.


눈알은 무결의 고리에 들지 못하고 죽은 천인들의 정기를 받아 생명을 가졌다. 생명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을 흡수하며 서서히 자라났다.


비록 모양은 없어도 살아있는 존재였고, 우주 근원의 지식을 받아들이며 현자의 수준까지 스스로 터득했다.


우주의 가장자리를 떠돌던 덩어리를 알아보고 예사달이라 이름 지어준 이가 다훤이었다.


다훤은 신비한 덩어리에서 현원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는 예사달을 중앙황제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또렷이 기억했다.

살아있는 덩어리가 중앙황천에 들어섰을 때 꿈틀거리며 모양을 갖던 순간을.


예사달은 그 순간, 자신의 기원을 알아보았다.

중앙황천에 들어서자 물컹거리는 덩어리에 불과했던 예사달은 상대의 바람대로 모습을 갖추었다.

그 후로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었다.


다훤은 대청마루로 올라가 넓고 낮은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중앙황천에 눌러있어야지. 얼마 만에 돌아온 건가?”


“그걸 어찌 세나? 어차피 천계에서는 시간도 쉬다 가는 것을.”

아이의 모습을 한 예사달은 다훤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는 자네는 어디를 그렇게 떠돌았나? 북방흑제께서 어찌나 염려하시던지.”

“하하, 나도 바쁜 몸이네. 우주의 별밭과 달숲만 찾아다녀도 볼 것이 어찌나 많은지.”


“그러니까···, 결국 나들이였군.”

“다음에는 공간의 겹을 훑어볼까 해.”


다훤의 말에 예사달은 해맑게 웃었다. 두 눈이 반달처럼 감기며 볼살이 도톰해지니 더욱 어려 보였다.


“그거 흥미롭군. 우선 차 한 잔 마시게. 어머니께서 선물을 보내셨어.”

예사달이 탁자 위에 다섯 개의 찻잎 통을 늘어놓았다.


다훤이 싱글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뭔가? 아날빛숨의 차 아닌가?”


“종류별로 준비했다네. 특별히 자네를 위해서 말이지. 아날빛숨의 차라면 아주 유명하지 않은가?”


아닐빛숨을 칭찬하는 말에 다훤은 눈썹을 실룩거렸다.

“허, 이번에는 제자 자랑인가?”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나 할까? 하하하.”

예사달이 함박웃음을 짓자 양쪽 볼이 발그레해졌다.


대청마루는 그윽한 차향으로 물들었다.

아릿하며 달콤한 향기가 가득 차자 찻잔에는 투명한 연둣빛 물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예사달은 손바닥에 찻잔을 올려두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가다듬었다. 다훤도 말없이 한 모금 차를 머금었다.


예사달은 눈을 뜨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쓰다듬었다.

“말해보게. 이번에는 어떤 환시였나?”


“자네가 본 것과 다르겠지. 우리는 늘 같은 사건의 다른 장면을 보니까.”

“한얼에 대한 것인가? 아끼는 제자를 인도자로 보내다니? 북방흑천에 있어도 천사직을 충분히 잘 해낼 텐데.”


다훤이 반쯤 남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검푸른 눈동자가 잠시 짙어졌다가 엷어졌다.


“자네가 데려오라고 할 때부터 그 아이는 인도자였어.”

그는 먼 하늘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천력을 담지 못하던 아이가 잉걸둥지의 선택을 받다니···.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군.”

예사달의 말에 다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많이. 웬만한 차사보다 천력이 높을 걸세.”


다훤은 숨을 들이마시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검은 꽃을 보았네.”


그의 말을 듣자 예사달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나올 때 북방흑제가 들었다는 그 소리. 검은 꽃 한 송이가 허공에 떠 있었어.”

“그게 어디였나?”


예사달이 묻자 다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공이었네. 아무것도 없었어. 꽃은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졌지.”


“그게 한얼과 관계있나?”

“그건 모르겠네.”


다훤은 예사달의 크고 둥근 눈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떤 환시를 보았나?”


예사달은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의 맑은 소리라서 장난처럼 들렸다.

“자네의 제자가 죽어있었네.”


“저런. 어디서?”

“몹시 어두웠어. 계곡이었나, 동굴이었나. 온통 피에 젖어 있더군. 숨도 끊어지고.”


“흐음.”

다훤은 눈을 감고 턱을 쓰다듬었다.


“혼은 영천옥으로 갈 테니 중간자의 죽음이 나쁜 일만은 아니지. 한얼이야 씻김을 빨리 끝낼 거고. 대명천이든 낙원이든 바로 가겠지. 다만···.”


다훤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예사달이 이어받았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사건이 무엇이냐, 그게 문제로군.”


예사달은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아이의 모습이라 팔이 짧아 엉성해 보였다.


그는 아랑곳없이 차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검은 꽃과 한얼이라···. 그 아이가 예언의 주인공일까?”


다훤도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손에 턱을 기댔다.

“지금까지의 환시를 살펴보면···, 아닐세.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변이 보였으니까.”


“무슨···. 자네의 예언은 늘 정확하잖나?”

“그야, 천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뻔하니까. 한 곳에만 머물지 않고 떠돌다보면 어쩔 수 없이 눈이 뜨인다고.”


다훤의 말을 끝으로 두 천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별채 전체가 적막에 싸여 소리를 잃었다. 가끔 샘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퐁퐁 들릴 뿐, 다른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예사달이 일어나 마당을 향해 섰다.

“반계의 움직임은 어떤가?”


“아직은 조용하다네.”

“우주의 힘이 반계로 많이 기울었더군. 천계도 힘을 더 키워야 할 텐데···.”


다훤도 일어나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마당에는 작은 새들 십여 마리가 날아와 열매를 쪼아먹고 있었다.


“그런 숨 막히는 일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 없나? 오랜만에 왔는데 심각한 얘기뿐이라니.”

“자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천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뻔하다고.”

예사달이 피식 웃으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예사달은 다훤이 마당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흘끗 돌아보았다.

“인간세라면 재미있으려나···?”


“오! 사빈이 왔나? 그 아이는 천사와 선사가 다니지 않는 곳으로 다니잖아?”

다훤도 마당을 가로질렀다.


작은 마당이라 열 걸음 만에 끝에서 끝으로 가닿았다. 다훤은 나무와 풀을 살피며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그믐마다 나가도 수명환을 받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그냥 돌아오는 때가 훨씬 많지. 그래도 그 시험이 재미있다네.”


예사달은 말을 마치고 껄껄 웃었다. 아이의 웃음소리 속에서 걸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빈에게 자네는 아저씨지만, 나는 할머니라고. 그러니 내가 자네보다 윗사람이군!”

예사달이 즐거워하자 다훤이 한숨을 내뱉었다.


“허! 사빈을 발견한 건 나라고.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내가 자네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지.”

다훤은 예사달의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섰다.


“그 아이 앞에서는 할머니 모습이니, 낯설긴 해.”

“어차피 난 형상이 없는 존재일세. 사빈이 그런 존재를 원해서 그리된 것이니 내 잘못도 아니지.”


예사달은 뜰안샘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훤도 그를 따라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바라보았다.


“인간세는 곧 그믐이지?”

예사달이 싱긋 웃으며 샘물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일렁이는 물비늘에 손을 얹었다.


“그렇군. 한동안 사빈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겠어. 환시가 알려준 예언이 무엇인지 지켜봐야 하니까.”


다훤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순간 예사달의 손이 움찔거렸다. 작은 손이 샘물 속으로 빠졌다 나오며 물방울을 쳐냈다.


“그때까지 여기서 지내려고?”

“그럼 내가 어디 가겠나? 여기 방도 남는데! 빈방으로 놔두는 것보다야 내가 쓰는 것이 훨씬 낫지.”


“북방흑천에 자네 방이 있지 않나? 천사장님이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예사달이 벌떡 일어났다.


다훤은 예사달의 놀라는 얼굴을 보자 더 크게 싱글거렸다.

“그래도 나는 여기가 좋네.”


“허! 자네랑 엮이면 꼭 일이 벌어진다니까.”

예사달은 환시에서 보았던 한얼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그거야. 그래서 자네한테 내가 꼭 필요하다네.”

다훤은 껄껄 웃으며 예사달의 어깨를 토닥였다.


예사달은 아이의 모습이라 어깨가 다훤의 가슴 높이밖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그게 더 나을 수도···.’

예사달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다훤의 얼굴에 물방울을 털어냈다.


짓궂은 장난에 고개를 돌리면서도 다훤의 웃음소리는 커져 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드디어 완결했어요~ ^^ +2 23.09.15 82 0 -
공지 차원의 문지기들이 궁금하시다면...? 23.09.02 84 0 -
공지 심지아와 지새늬에 대한 이야기는... 23.09.02 70 0 -
공지 완결까지 하루 2회씩 올릴게요 23.08.29 77 0 -
176 그다음_새로운 도전 (마지막 회) +4 23.09.15 99 3 9쪽
175 그다음_각자의 목표 +2 23.09.15 59 3 10쪽
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3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9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6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9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9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62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9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6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