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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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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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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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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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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믐_다시 현재로

DUMMY

나는 마림 옆에 꿇어앉았다.

숨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내상을 심하게 입어 코와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림!”

등 뒤에서 슬아의 외침이 들렸다.


“마림, 마림. 왜 그래?”

슬아가 달려와 마림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마림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슬아···.”

마림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널 보고 갈 수 있어서.”

그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마고의 반지로 그의 몸을 쓸어주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스며 나와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마고의 기운으로 작별 인사는 나눌 수 있겠지.


마림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아비가 되어··· 아껴주고 싶었는데···. 행복하게···, 사랑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질 거야. 꼭 나을 거야.”

슬아가 마림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마림이 떨리는 손으로 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 가야 해. 슬아, 다음에 만나면 들려줘. 너의 세상이 얼마나 좋았는지.”


“마림, 가지 마,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

슬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마림의 손은 스르륵 미끄러졌다.


“마림! 마림!”

슬아는 마림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나는 마림의 혼을 살펴보았다. 혼은 상처 입지 않고 깨끗했다.


‘천사가 지나가면 부탁할 수 있는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천사가 저기 옵니다.”

나토두가 숲 반대편을 가리켰다.


가온이 날아왔다. 그 뒤로 저주에서 풀린 요정 미지가 날았고, 하륜은 천천히 걸어왔다.


가온은 힘이 넘쳤지만, 하륜 선위는 몹시 지쳐 보였다. 분신술로 와 있으니 두세 배는 힘들 것이다.


“사빈! 도룡은?”

“소멸했어. 마림은 막 숨을 거두었고.”

“이번에는 혼을 구할 수 있겠네!”


“천사가 지나가지 않아.”

나는 초조하게 하늘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천사를 찾는 건 무리인가.


마림의 혼이 몸을 떠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금 천사를 만나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러다 반계에 들어가거나, 다른 마물에게 먹히면 큰일이다.


“내가 찾아볼게. 지금은 천사국 소속이 아니라서 나도 혼을 이끌 수 없거든.”

가온이 손을 뻗어 둥글게 손목을 돌렸다.

마림의 혼이 그녀가 만든 공기의 결계로 들어갔다.


“바로 갔다 올게.”

가온이 훌쩍 날아올랐다.


슬아는 마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염없이 울던 그녀가 갑자기 허리를 세웠다.

“마림, 네가 없으면 나도 살 수 없어. 내가 갈게. 네가 있는 곳으로.”


슬아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안돼!”

단도가 저고리 앞섶에 닿는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시간을 멈추었다.


슬아는 단도를 쥔 채 굳어버렸다. 숨도 쉬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하···, 이거··· 이걸 어쩌지?”

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륜이 다가와 마림과 슬아를 살펴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빈님, 슬아가 죽는 건 맞아요. 마고가 되려면 영천옥에 들지 않은 혼이어야 하고, 백령성에서 사빈님을 만나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병으로 죽었어요. 마림을 기다리다 병을 앓았다고요. 지금 죽으면 안 되잖아요?”


“어차피 과거가 바뀌었어요. 그것이 사빈님이 원하는 거였지요. 슬픔을 덜어주어 자신이 만든 사슬에서 나오게 하는 거요.”


“그렇지만···.”

슬아는 병에 걸려 해를 넘기지 못했으니, 몇 달 차이는 나지 않는다.


나는 돌처럼 굳은 슬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의 결계를 풀면 저 칼은 곧바로 심장을 찌를 것이다.


“이전과 같은 날에 죽을 때까지만··· 어떻게 안 될까요?”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대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혼이 떠나면 다음 마고의 인연도 끊어질지 모르잖아.


하륜이 슬아가 쥔 단도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단도를 검집에 잘 넣은 뒤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봉인의 주술을 지켜야 해요. 슬아가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혼을 데리고 장미산에서 함께 기다려야 해요. 사빈님이 찾아갈 때까지.”


그건 아무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토두와 바나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도 없고···.


“내가 지킬게요.”

요정 미지가 작은 날개를 펄럭였다.


“용서받고 싶어요. 도룡의 저주에 걸린 거지만, 어쨌든 사람을 괴롭힌 건 나니까요. 슬아를 지키고 기다릴게요.”

미지가 내 옆으로 날아왔다.


“어디서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괜찮겠어? 아주 오래 걸릴 텐데···.”

“봉인되는 거면 시간은 상관없어요. 건너뛰는 거니까요.”


하륜이 일어섰다. 그는 나토두와 바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토두, 슬아를 집에 데려다 놓으렴. 바나는 나와 함께 마림의 시신을 묻어주자.”


나토두가 천마로 모습을 바꾸자 슬아는 어느새 나토두의 등에 실려있었다. 나토두는 날갯짓을 두 번 하고는 높이 날아올랐다.


하륜이 바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와 미지를 번갈아 보았다.

“사빈님은 미지와 함께 가서 슬아를 살펴주세요. 미지에게도 봉인의 주술을 걸어주세요.”


하륜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분신술로 나온 선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난 이 이상 머물 수 없어요.”


“알았어요. 가온과 내가 백슬곤아의 혼을 데리고 갈게요.”

내가 돌아서자 요정 미지도 따라왔다.


미지가 불안해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꼭 오시는 거죠?”

“물론. 데리러 가기 위해 여기 온 거니까.”


*


백령성 지하보관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낡은 나무 벽, 흙먼지, 퀘퀘한 냄새까지 그대로였다.


백슬곤아의 혼도 벽 속에 잠든 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녀의 옆에 요정 미지가 무늬처럼 스며있었다.


바나는 복도며 방을 킁킁거렸다. 나토두는 말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벽 속 깊이 들어간 백슬곤아의 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아가 깨어나야 미지도 깨어나는데···. 어떻게 깨우나···.’


가온도 벽을 바라보고 팔짱을 꼈다.

“마고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마고가 되면 슬아도 아픈 기억을 잊겠지?”

“응. 어쨌든 삼도천을 건너니까. 기억도 지워지고, 이름도 새로 받고.”


“넌 인간세에서 쓰던 이름 그대로였잖아?”

“나야···. 예사달 할머니랑 천계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문득 생각나지 않을까?”

“그믐마다 인간세에 내려가니까 그때 보았던 기억의 일부라고 여길 거야. 인간세는 일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 못 해.”


너무 많은 일, 너무 많은 물건, 너무 많은··· 바림창고의 유물.

“그래! 바림창고에 비녀를 만들어놨잖아!”


“그런데?”

“그걸로 깨우는 거야. 바로 이때를 위해 유물이 기다린 거라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믿으면 그런 것이지.


눈을 감고 서서 생각을 바림창고로 옮겼다. 아롱재에 들어서서 바림창고의 문이 열렸다.

창고를 헤매며 백슬곤아의 혼과 닮은 기운을 찾아냈다.


다음 마고를 찾으러 처음 들어갔을 때는 조용하던 비녀가 이번에는 먼저 달그락거렸다.

손바닥 길이 만 한 은비녀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백슬곤아, 깨어날 때야.”

벽에 비녀를 갖다 대자 혼이 꾸물거렸다.


“이건···.”

“기억나? 네가 만든 거야.”

“응, 알아요. 마음숲에서 만든 거예요.”


백슬곤아의 혼이 벽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마림은요?”

“그는 여기 없어.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거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을 거야.”


“기다렸는데···.”

“마림은 중천으로 잘 갔어. 인간세의 삶은 끝이 아니거든. 영천옥과 대명천을 거쳐 새로운 시작이 되는 거야.”


나는 혼의 여정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마고로서 알아야 할 일이었다.


“너를 기다리는 곳이 있어. 네가 꼭 해야 할 일도 있고.”

“거기가 어디죠?”

“대명천 마음숲. 혼을 보살피는 마고가 되는 거야. 마음숲이 널 기다리고 있어.”


백슬곤아의 혼이 꾸물거리며 끄덕였다.

“마림을 다시 만날 수 있나요?”

“그때는 마림이 아니지만, 그 혼은 만날 수 있어.”


백슬곤아의 혼이 벽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마음숲에 가면 혼빛에 어울리는 몸을 갖겠지만, 여기서는 기운 덩어리였다.


백슬곤아의 혼은 비녀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완전히 빠져나오자 벽의 무늬 같던 요정 미지가 꿈틀거렸다.


미지는 봉인의 결계를 뚫고 복도로 튀어나왔다.

“사빈님! 가온님!”


미지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정말 오셨군요! 얼마나 지났나요?”


“이천 년이 넘었을 걸?”

“와, 그렇게나 오래요? 어쨌든···!”


미지는 날개를 파닥이며 복도 끝에서 끝으로 날아다녔다.

“야호! 드디어 나왔다!”


*


백슬곤아의 혼은 파라다이스 빌라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소품샵 ‘달숲의 작은 천사’에서 키우는 단풍나무 화분이었다.


은서가 정령의 숲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무도, 흙도 모두 정령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백슬곤아의 혼은 나뭇가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요정 미지는 나무 그늘에 자리 잡았다.


“우와! 우와!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요정 미지는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힘이 넘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또 한 마리의 바나를 보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나는 푸른 단풍잎을 보며 턱을 긁었다. 잠든 백슬곤아를 보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이게 뭐야. 다음 마고를 찾으면 바로 마음숲으로 가려고 했는데.”


가온은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다듬었다.

“그믐 외출이 안 끝났나 보지.”

“요즘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꽃수 열쇠도 이상하고···.”


나토두도 신기한 듯 단풍나무 화분을 바라보았다.

“도룡이 사라졌으니, 사람의 역사가 바뀐 겁니까?”

“그럴 리가. 도룡만 소멸한 거지, 모든 마물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그대로야.”


나토두가 벽 선반에 놓인 요정 인형과 미지를 번갈아 보았다.

“정말 똑같네요. 그래서 가온님이 요정을 도와주신 거군요?”


나토두의 말에 미지가 나무 그늘에서 기어 나왔다.

“나랑 똑같다니요?”


가온이 벽에 걸린 조각품을 가리켰다.

벽 선반에는 춤추는 요정이 놓여있었다. 나무로 깎은 인형이었다.


요정에게 둘러싸인 커다란 유리공에는 선인의 혼이 잠들어있다. 유리공은 해밀의 차원 문지기가 만들었다나.


처음 봤을 때처럼, 유리공에서는 여전히 독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련하면서도 구슬펐다.


미지가 펄쩍 날아 요정 조각 앞에 멈추었다.

“나빌라들!”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가게 안을 날아다녔다.

“나빌라예요! 가온님! 나빌라들이라고요!”


“알아. 그러니까 거기 모셔놨지.”

가온이 장난스레 손으로 귓가를 털었다.


“미지, 저 안에 잠든 혼이 누구인지 알아?”


미지가 날개를 파닥여 유리공에 다가갔다.

손과 귀를 대고 한참 살펴보더니 성큼 물러났다.

“비, 빛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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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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