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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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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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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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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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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천계_암연층으로

DUMMY

밤이 지나고 라온성에도 빛이 비쳐들었다. 라온나무의 향이 어제보다 더욱 향기로웠다.


라온성 꼭대기에 서서 이루가 사빈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잃어버린 팔을 찾아줘서. 강녕액도, 아날빛숨의 차도.”


이루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작고 여려도, 눈빛은 힘이 넘쳤다.

‘네가 예언의 실마리라서 다행이구나.’


마눙은 어젯밤 천하원으로 돌아갔다.

마백북존의 신력이 돌아왔으니 북쪽의 기운을 다시 세워야 했다.


다른 혼들도 벌써 길을 떠났다. 이제는 신제를 따르는 귀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슬은 차 꾸러미를 들고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


“사빈님이··· 마고라고요? 그, 그 대명천 마음숲요?”

예슬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빈은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마고도 아니지. 새로운 마고를 찾았거든. 그냥 사빈이야.”

“제가 그렇게 엄청난 분과 있었다고요?”


예슬은 차 꾸러미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귀한 차를···.”

“날 도와줬잖아? 라온향낭 덕분에 귀물씨앗을 없앴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인연이 있으면. 이번에도 다시 만났잖아?”

사빈은 예슬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


이루는 예슬을 대하던 사빈의 말투, 목소리, 몸짓을 떠올렸다. 얼굴에 스민 미소처럼 마음도 따뜻했다.

‘나도 너와 다시 만나겠지. 언젠가는···.’


이루는 험험 목을 가다듬고 나토두와 바나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들은 먼저 마음숲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구나. 암연층은 위험하니까.”


“예. 나토두가 심부름할 거예요.”

사빈이 나토두에게 손짓했다.


나토두가 걸어 나와 이루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태우님과 금천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오호, 네가?”

“남방홍천의 천마이니 누구보다 빠릅니다. 그동안 다섯 성천을 다니며 수련했으니 동방청천도 문제없습니다.”


나토두는 마눙도 인정한 천마였다. 처음 보는데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사와 일하기에는 작고 여려도, 사빈을 주인으로 삼은 걸 보면 영특하네. 은혜를 갚겠다니 의리도 있고. 검은 장벽을 넘었으니 절대 천력이 모자라지 않아.’


이루가 대견해하며 나토두를 축복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


“왈왈, 저도 형님과 함께 갈 거라.”

“넌 그럴 줄 알았어.”

바나가 풀쩍거리자 사빈이 코웃음을 쳤다.


“헤에, 아셨어라?”

“거긴 한 번도 안 가봤잖아. 못 보던 구경거리가 많겠지.”


“왕왕, 선물을 가져가니까 먹을 것도 많이 주실 거여라.”

바나는 들떠서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하얀 털뭉치가 통통 튀었다.


나토두가 사빈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사빈님, 일이 끝나면 마음숲으로 가겠습니다.”


“응. 난 백하 대감을 구하고 곧바로 백슬곤아를 데려올 거야.”


*


사빈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암연층은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곳이다. 마고의 천력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훼 대차사가 알려준 방법이 또렷이 기억났다.

‘암연층에 갇힌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세 가지 시험을 치러야 해.’


사빈은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를 느꼈다.

‘첫 번째 시험은 건너뛰었어. 이루님이 아니었다면 암연층의 문도 못 열었을 거야.’


암연층은 어둠의 심연으로 어디든 나타나고 어디에도 없었다. 현재의 덫이 열쇠이지만, 그것은 어디로 연결될지 알 수 없는 미로였다.


그래서 암연층의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시험의 첫 단계였다.


‘이제 백하 대감을 찾으면 돼.’

사빈은 앞으로 나아갔다.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날 수도 없었다.


훼 대차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믿음의 깊이를 잰다더군. 상대를 믿는 마음으로 찾아야 하는데, 암연층은 방문자를 좋아하지 않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준다네. 공포에 먹히면 그 역시 갇히고 말지.’


“지금부터 보이는 것은 환상이야. 마음 쓰지 않으면 돼.”

사빈은 숨을 들이켜고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이 점점 밝아지면서 이내 마음숲이 되었다.


놀뫼마당에서는 혼들이 춤추며 노래하고, 얄리장터에서는 수련생과 너나들이들이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다.


“흠. 마음숲이 무너질까 두려워할까 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타는 별이 쏟아졌다.


혼알방은 찌그러지고, 아날빛숨과 위즐증가도 불길에 휩싸였다.

샛강과 개울을 따라 시뻘건 불길이 지나갔다. 불길이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재가 되었다.


“겨우 이런 환상으로? 혼알방의 혼들은 해담님이 깨우기로 하셨어. 새로운 마고도 찾았단 말이야.”

사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없어도 가온이 황제님께 연락할 거고, 황제님이 슬아를 데려올 거라고. 그럼 마음숲은 말짱해지지. 기울어진 것까지 모두.”

사빈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음숲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인간세가 나타났다.


인간세는 피천귀와 마물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싸움에 미쳐 닥치는 대로 서로를 죽였다. 피천귀의 힘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마물은 수집가들을 악마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싸움을 부추기고, 잔인하게 죽이며 즐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마물?”

사빈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가 다 없앨 거야. 이제는 두렵지 않아. 깨어나기 전에 없앨 테니까. 요정 미지가 도와준다고 했거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움과 높쌘, 소슬이 있어. 피천귀의 힘으로 수집가를 없애고, 그들의 힘으로 마물을 소멸시킬 거야.’

사빈은 씩씩하게 나아갔다.


“장하구나. 역시 내 제자 사빈이야.”

어디로 들어왔는지 예사달이 지팡이를 짚고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구부정한 허리에 주름진 얼굴, 하얀 머리카락이 영락없는 예사달 할머니였다.


“할머니!”

사빈은 반가워 소리쳤다.


‘할머니는 암연층에도 들어오시는구나. 세상 어디든 못 가는 곳이 없으시지.’


사빈이 예사달의 팔에 손을 끼웠다.

“할머니도 백하 대감을 찾으러 오셨어요?”

“너라면 꼭 찾아낼 거다. 여태까지도 잘 해왔잖니?”


“에이, 다 할머니 덕분이죠.”

“사빈아.”

에사달이 사빈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예?”


“나도 무결의 고리에 들 때가 되었구나. 인사는 하고 가려고 찾아다녔어.”

예사달은 사빈의 손을 놓고 지팡이로 허공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나의 어여쁜 제자.”

예사달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슬픔이 북받치는 소리였다.


“안 돼요!”

사빈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예사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안 돼요, 할머니. 가지 마세요.”


예사달의 몸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를 잡고 있던 손도 공기에 녹듯 사라졌다.


“할머니! 할머니!”

사빈은 서러움에 북받쳐 고함을 쳤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에서 발목, 종아리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

사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환영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덫인 줄 알면서도 먹먹한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누나, 이건 꿈이야.”

갑자기 사내아이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홉 살 소년은 흰 머리카락에 하얀 얼굴이었다.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사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너··· 혹시 어린 시절의 백하?”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어.”


“그래? 누나도 천인이야?”

“난 천인도 사람도 아니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살아있는 것에 가까워.”


“으응. 그런 것도 있어?”

소년은 사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누나도 쪼꼬미구나.”

소년이 싱긋 웃었다.


사빈은 어리둥절해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환상인가? 왜 이렇게 생생하지?’


“너도 꿈이지? 진짜 아니지?”

“맞아. 나 지금 꿈꾸고 있어. 꿈이라는 건 알겠는데, 꼭 진짜 같다.”

소년은 신기해하며 어둠을 두리번거렸다.


생글거리는 소년을 보고 있으니 할머니를 잃을 뻔한 슬픔도 서서히 사라졌다. 사빈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넌 어디 살아?”


“첫끝마을. 황금들판이 보이는 곳이야. 마을 옆에 커다란 호수도 있어.”

“연곡호수? 거기 참 아름답지.”


사빈은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백하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백하야, 여기 어딘가 어른이 된 네가 있는데 말이야.”

“내가 어른? 굉장하다. 어떤지 보고 싶다.”


“그러니까···,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몰라. 그건 누나가 찾아야지. 어, 나 깨어나려고 한다.”

소년이 멈칫거렸다.


“누나, 다른 꿈에서 또 만나. 알았지?”

소년은 손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희미해지는 소년을 바라보며 사빈도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백하의 꿈에 내가 나왔었구나. 아주 오래전에···.’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고 싶어.”

사빈은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와 보냈던 시간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녀가 몰랐을 때도,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도 상산대감 백하는 그녀 곁에 있었다.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하얀 바위였다.


바위 표면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대감! 백하 대감!”


백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빈은 물끄러미 돌조각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날 지켜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사빈은 백하의 손에 손을 얹었다. 하얀 조각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 대답하려고 왔어요. 너무 늦었나요?”

사빈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바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훼 대차사가 알려준 대로라면 그는 자신을 잊었을 것이다.

‘죄인의 현재를 찾아줘야 해. 어둠에 먹혀버리니 존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네.’


사빈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어디로 가든 찾아온다고 했죠? 내 곁에 있겠다고 하셨잖아요? 나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좋겠어요.”


돌조각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백하의 가슴에 닿았다.

“상산대감이 아니라도 좋아요. 마음숲이 아니라도 좋아요.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요.”


사빈은 백하의 눈높이에 맞춰 살포시 날아올랐다.


돌조각의 뺨을 두 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댔다. 바위의 차가운 기운이 입술을 타고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 돌아오세요.”

그녀는 백하의 가슴에 뺨과 귀를 갖다 댔다. 체온으로 얼음을 녹이려는 듯 가만히 끌어안았다.


깊은 동굴 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것도 환청인가?’


환청이라도 좋았다. 그의 심장 소리라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요동치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귀와 뺨이 점점 따뜻해졌지만, 소리에 빠져 느끼지 못했다.


“사빈님.”

백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빈에게는 환청처럼 아득했다.


“환청이라도 듣기 좋네요.”

사빈은 중얼거리다가 반짝 눈을 떴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어버렸다.

‘헉, 도, 돌이 아니었어?’


“사빈님.”

백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빈은 움찔거렸다.

그제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에 올려놓은 손바닥도 따뜻했다.


“우왓!”

사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저기, 저. 그게 말이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백하가 사빈을 끌어당겼다. 품에 안으니 따뜻한 온기가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로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사빈이 대답하려는데 백하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대감! 대감!”


쓰러진 백하를 흔들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이루가 경고한 그대로였다. 암연층에 갇힌 후유증이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다. 언제 깨어날지는 아무도 몰라.’


사빈은 백하를 끌어안았다.

갇힌 자를 찾아내 깨웠으니 암연층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배웅문 앞에 와 있었다. 백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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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5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4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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