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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65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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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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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0쪽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DUMMY

“얏호!”

사빈은 가슴이 뚫릴 듯 크게 소리쳤다.


“할머니! 예사달 할머니! 이것 좀 맛보세요!”

그녀는 소리지르며 주방에서 대청으로 뛰어나갔다.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었다.


“넘어질라. 무슨 일인데?”

“술요! 술! 계속 실패했는데, 완전히 잘 익었어요.”

사빈은 예사달의 손을 잡고 술잔을 건넸다. 빗자루도 빼앗아 들었다.


술은 옅은 옥빛으로, 맑고 향기로웠다. 예사달은 술 한 모금을 혀끝에 적셨다.


“오!”

감탄사를 내뱉고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좋구나.”


“중천에서는 될 줄 알았어요. 여기에는 후회와 번민의 기운이 넘쳐서 술을 익게 만들거든요. 인간세처럼요.”

“그렇게 따지면 어스름주나 용숫주는 어떻게 된 거냐?”


“그건 달라요. 이건 인간세랑 똑같은 방식으로 빚은 거예요.”

사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옴주라고 부를 거예요. 아침의 고요한 숲 향기를 따온 거예요. 미소를 머금게 하는 술이죠.”

사빈은 빈 술잔을 받아들고 노래하듯 읊조렸다.


“바닷빛 같고, 하늘빛 같고, 아침이슬처럼 맑고 풋풋하죠. 달고 쓴맛도 있지만, 개운하고 가볍죠?”

“그렇구나. 그런데 술은 뭐 하려고? 혼에게 내놓으려고?”


“예. 단비차도 만들었으니 차림이 세 가지가 되었어요. 이 정도면 화평축제에도 내놓을 수 있어요.”


“화평축제?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게야?”

예사달이 혀를 내둘렀다.


“따옴주가 준비되었으니, 화평제를 위해 디딜문을 만들 거예요. 다음에는 신제님들도 초대하고요.”


사빈은 신이 나서 어깨를 덩실덩실 움직였다.

“중천의 혼도 설레는 일이 있어야죠. 너무 처져있어요. 숨으려고만 하고요. 그래서는 좋은 기운을 얻기 힘들어요.”


예사달이 빈 술잔을 내밀었다.

“그렇지. 어떤 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건 아니니까.”


“할머니도 찬성하신 거예요. 여기서도 화평축제 여는 거요.”

“그래. 그러려무나.”


“백하님 것도 덜어놔야지.”

사빈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서는데 아름누리의 문이 벌컥 열렸다.


“스승님! 너무 하십니다!”

문을 연 혼은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단가람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지난 생은 지우고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단가람?”

사빈이 놀라 눈을 껌뻑였다.


중천에 오자마자 아름누리를 짓기 시작해서 단가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처럼 일이 잘 따라주지도 않았다.


“너무하십니다. 중천에 계셨으면서···. 전 스승님이 헤아림문으로 오실 줄 알고 내내 새맘계곡에서 기다렸다니까요.”

단가람이 씩씩거리며 사빈과 예사달 앞까지 다가왔다.


“그래도 용케 찾아왔네.”

사빈은 재빨리 예사달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쩌다 제자가 된 단가람이에요. 반인반천의 혼이죠.”

“그렇구나. 반천은 자기 있을 곳을 고를 수 있지.”


예사달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빈은 단가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단가람, 이분은 내 스승님인 예사달 할머니.”


단가람은 요란하게 팔을 흔들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스승님의 스승님이니 대사부님이십니다! 대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허허, 녀석도. 너만큼이나 엉뚱하구나. 그래, 어찌 알고 왔나?”


“고사목이 움직이더라고요. 신기하다 싶었는데, 씨앗을 뿌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이상해서 따라다녔죠.”


단가람은 무릎을 꿇은 채 사빈과 예사달을 올려다보았다.

“반김길에 들어서니 결계도 처져있고, 공기가 다른 겁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예사달이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단가람은 일어나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찻집 표시를 보고, 딱 스승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스승님이 계셔서···.”


가슴이 벅찬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로, 다시 뵙다니···. 너무, 너무···.”


울상이 되어 눈물을 흘리려 하자 사빈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한데.”

“일요? 무슨 일입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단가람이 소매부터 걷어 올렸다.

“그동안 갈고 닦은 장사 실력도 있지 않습니까?”


사빈은 물끄러미 단가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옥구슬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반인반천의 특혜를 제대로 누리는구나.’


북방흑천에서 나는 치유의 돌이니 보통은 주인이 죽으면 흑천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단가람은 반인반천이라 중천에서도 갖고 있을 수 있다.


만약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라며 영천옥으로 들어가면 그때 옥구슬도 흑천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행이야. 인간세에서는 괴로웠겠지만, 여기서는 하고 싶은 대로 지낼 수 있어.’


사빈은 창가에 서서 반김길 건너 새론샘을 가리켰다. 터만 있고 아직은 옹달샘이었다.


“저기에 새론결 온천을 만들 거야. 물의 기운이 강하거든. 땅 아래 깊이 잠든 물을 깨우는 중이야. 단가람이 온천을 맡아줘.”


“온천이라···. 모로매와 같은 겁니까?”

“응. 기초 공사도 맡고, 물이 콸콸 나오게 땅과 물의 기운을 보살펴줘.”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살펴보겠습니다.”

단가람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는 예사달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허허, 정신이 없구나. 이랑에 이어 단가람까지.”

예사달은 혀를 끌끌 찼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구석에서 쟁반을 나르던 비뢰수 이랑이 자기 이름을 듣고 쟁반을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시도는 좋았는데, 너무 세게 내리는 바람에 대접에 담긴 물이 쏟아졌다.


“끄웨액, 끄웩.”

이랑이 풀이 죽어 소리쳤다.

다른 천인에게는 그렇게 들리겠지만, 사빈과 예사달은 이랑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죄송해요. 사빈님.”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아직 손님도 없는걸. 처음이니 서툰 게 당연해.”

사빈이 달려가 엎질러진 대접과 쟁반을 치웠다.


예사달은 다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비뢰수의 말은 들리는데, 고사목은 안 들린단 말이야. 그것부터 수련해야겠어.’


*


도우미를 구한다고 소문을 내지도 않았는데, 또 한 명의 도우미가 나타났다.


빨간 머리카락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아름다운 기린을 보자 예사달의 가슴이 부풀었다. 마치 수리마루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또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구나.’

예사달은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기린 에밀레를 살펴보았다.


그의 계획은 중천에 찻집과 숙소를 지어주고, 사빈의 기운이 안정되면 떠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중천에 상주해야 할 정혜부 보위들이 반나절도 못 버티니 제자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조금 더 도와주기로 한 것이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기린 에밀레를 보자 떠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더 지켜봐야 했다.


에밀레는 사뿐사뿐 다가왔다.

“사빈님은 안 계신가요?”

“으응, 새론샘에 갔지.”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죠?”

“그럼, 그럼. 사부랑차라도 한 잔 줄까? 단비차도 있는데.”


에밀레는 예사달의 기운을 읽더니 그의 팔을 잡았다.

“예사달님이시죠? 저 여기서 일하려고 왔어요.”


예사달은 놀라 에밀레를 올려다보았다. 키 작고 구부정한 할머니라 에밀레보다 눈높이가 낮았다.

‘남방홍천의 기린이 중천에서 일한다고?’


“일···이라니?”

“찻집이요. 영천옥에서 도우미를 못 보내잖아요? 애써 씻김한 혼들이 중천의 혼에게 물들면 안 되니까요.”


에밀레는 의자를 빼고 앉으라고 손짓했다. 예사달이 앉자 그녀도 옆자리에 앉았다.


“도우미가 필요하긴 하지. 차도 만들고, 술도 빚고. 아, 차 나르는 일은 이랑이 할 거야. 아주 잘한단다.”

예사달은 텃밭을 왔다 갔다 하는 이랑을 가리켰다.


에밀레도 창밖을 내다보고 싱긋 웃었다.

“나토두는 어디 갔나요?”


“북방흑천에. 지금쯤 오고 있을 게야. 다훤이 천사장이 되었거든. 나토두도 제 주인을 찾아와야지. 응. 오는 소리가 들리네.”


예사달의 말대로 나토두가 아름누리로 들어섰다.

활짝 웃으며 들어서던 소년의 얼굴이 에밀레를 보자 딱딱하게 굳었다.


*


나토두는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결국 너도 왔잖아? 참견하지 말라더니.”


에밀레가 흥흥 콧소리로 웃었다.

“별거 아냐. 내가 바라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야.”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아는 건 중천이 황폐해졌다가 살아나는 거지. 어떻게 살아나는지는 모르잖아. 누가 어떻게 하는지. 그래서 지켜보려고.”


나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심부름꾼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엉뚱하게 헤매는 것 같은데, 그 일을 해낸단 말이야.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혼자는 할 수 없을 텐데···. 서로 이끌어가니 보기는 좋네.”

에밀레가 삼 층 창가에서 텃밭을 내려다보았다. 풀이 자라고는 있지만, 힘이 없고 시들시들했다.


나토두는 더 멀리 반김길을 감싼 결계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즐기고 싶어. 나토두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고. 마물 조각을 다 없앨 때까지 따라다니려고.”


“그래? 난 사빈이 중천을 떠날 때까지 있을 거야.”

“뭐?”

나토두의 소리가 커졌다. 에밀레가 쉿! 소리를 냈다.


반김길에서 바나가 흰털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그 뒤를 따라 비뢰수 지예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었다.


지예의 등에는 혼이 하나 타고 있었다.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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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3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5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8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5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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