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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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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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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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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오래된 사연

DUMMY

사빈과 나토두는 연회실 옆 유유당으로 들어섰다.


연회실보다는 작아도 중앙황천 다움성의 온새미실보다 넓었다.

굵직굵직한 기둥과 가지가 사방을 감싸고 있어 장식이 없어도 아름답고 싱그러웠다.


바나는 연회실에서 도우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것이 더 많고,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루님, 많이 편찮으셨다고요?”

“음. 이제 괜찮단다. 거의 다 돌아왔어.”

이루가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알려주셨어요. 이루님과 마눙님이 피천귀의 폭주를 막고 있다고요. 그런데, 다른 차사님들은 피천귀에게 힘을 나눠준다고 했어요. 정말 힘을 나눠 주셨나요?”


이루는 자상한 눈으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대천사 반열이 그러더냐?”


사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루는 으흠 목을 가다듬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우리가 힘을 나눠준 것 같니?”


“그건 아니지만, 수집가와 피천귀들이 강해졌어요. 혼알방을 훔치고, 황금들에서 싸울 정도로요. 어떻게 그런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어요.”


“내 잘못도 있지.”

이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왼손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눙과 나는 미틈오름 시기에 크게 다쳤단다. 가끔 신력이 약해지지. 그래도 마눙과 같은 시기는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나도, 마눙도 한 번에 신력이 희미해졌어.”


이루는 왼쪽 팔을 쓰다듬었다. 거기 팔이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말하면서도 팔과 손을 들어올렸다.


“천계의 힘은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흐른단다. 인간세는 강한 자가 모두 끌어당기지만.”

이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두 신제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빈도 알고 있었다.


북방흑제 전욱은 심장을 잃었어도 새하가 그의 심장이 되었다.

중앙황제 현원은 눈을 잃었지만, 예사달이 되어 돌아왔다. 서방백제 영랑도 날개를 잃었으나, 반은 남아있었다.


동방청제 이루는 왼쪽 팔을 잃고, 남방홍제 마눙은 심장을 잃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들의 조각을 찾지 못했다.


사빈은 이루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처음부터 팔이 있던 것처럼 멀쩡했다.


이루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우주의 정기로 자랐더구나. 청천의 학당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들었어. 그 지혜를 내게 주겠다니 고마운 일이지.”


사빈은 이루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좋아 보이니···. 물어봐도 되겠지?’


신령수 동명이 들려준 이야기가 맞는다면, 불천수 전투에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루님.”

사빈은 조심스럽게 이루를 불렀다.


“허공의 섬을 옮긴 것이 잉걸둥지 때문인가요?”

“오, 잉걸둥지를 아느냐?”

“예. 한번 가봤어요.”


“그래. 너라면 이미 불렀으리라 생각했다. 맞다. 허공의 섬은 잉걸둥지에서 너무 멀어. 거기 있으면 신력이 줄어들어. 미틈오름의 후유증에 신력도 줄어드니 피천귀들이 날뛰기 시작했단다.”


이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의 근원을 찾아가야 했어. 마눙은 나보다 심해서 더 자주 신력을 잃었거든. 이유야 어쨌든, 많은 천인이 소멸되어 마음이 아프구나.”


“이루님의 뜻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두 분이 없었다면 인간세는 정귀의 소굴이 되었겠죠. 지금처럼 남아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정귀가 생기지 않은 건 신제님 덕분이에요.”

사빈의 말에 이루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마루에 대한 복수심에서 시작했지만···.”

이루의 말에 나토두가 눈썹을 실룩였다. 그러나 조용히 듣기만 했다.


“피천귀의 힘은 인간세에서 온단다. 사람이 사는 한 끝없이 강해지고, 끊임없이 태어나지. 그 힘으로 더 강한 세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날뛰기에 종잡을 수 없더구나.”


이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도 의심은 남아있어. 수리마루 정명이 정말 존재할까.”


“수리마루님은 정말 있어요. 차원 그 자체여서 볼 수 없대요.”

내 몸에 붙은 솜털 하나가 나를 볼 수 없듯이. 빛나는 알이 알려준 대로면 언제 어디에나 있는 존재였다.


사빈이 말하자 나토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끔 지켜보다 간대요. 빛나는 알이 그랬어요. 지금도 어디선가 지켜볼지 몰라요.”

“그럴지도.”


이루는 사빈의 접시에 요리를 덜어주었다.

위즐증가의 요리에 비하면 색도, 향도, 맛도 밍밍했지만, 배가 고팠기에 맛있게 먹었다.


사빈은 여전히 많은 질문을 갖고 있었다. 반계에 들어가면 또 뭘 알아보기로 했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조금 더 익숙해진 다음에 묻기로 하고, 우선은···.


“혹시 이루님이 절 부르셨나요? 불천수에서 만나자고.”

“그래. 힘이 딸려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왔단다. 그래도 전언은 잘 받았단다.”

이루가 자신의 물잔에 물을 따랐다.


사빈은 자신이 어떤 전언을 보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게요. 무엇을 부탁하실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그 마음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왜 저를 부르셨어요?”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거든.”

이루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믐의 밤, 숨어있던 그림자가 깨어나리라.

흙과 물이 불길 속에 타들어 갈 때

경계를 넘는 자가 그들을 물리치리라.”


이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빈은 입안의 음식을 뿜을 뻔했다.

‘이번에도 예언이야? 너무 진부해.’


그녀는 켁켁거리며 물을 마셨다.

“그거! 수리마루님의 예언이에요. 그분의 특기죠.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하게, 해답도 없는 질문을 무슨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는 거요.”


사빈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나토두가 입을 비쭉거렸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정말 할 일 없는 분이라니까! 걸을 때도 엉거주춤 걸을걸?”


사빈은 나토두에게 손을 휘젓다가 이루를 돌아보았다.

“그게 저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천계에서 그믐마다 외출하는 건 마고뿐이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러다 네가 반계에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확신했다.”


이루는 사빈의 이마에 남은 보호의 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이루는 현원이 그어놓은 인을 볼 수 있었다.


“공간의 결, 시간의 겹은 암연층과 시실루로 이어지는데 넌 그곳으로 가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 네가 누구든, 우리가 만든 덫을 넘어 다녔어. 그것이 널 부른 이유란다.”


‘암연층과 시실루? 그런 건 없었는데?’

시간의 덫과 현재의 덫에 걸렸지만, 그때마다 좋은 인연을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나고, 나토두도 찾아왔다. 그곳에서 이루와 마눙도 보았다.


‘내가 원하는 곳···. 이루님과 마눙님이 보여준 곳, 만나야 할 이들이 기다린 곳.’

정말 그 존재가 나일까.


사빈은 예언을 되뇌었다.

“그믐의 밤, 숨어있던 그림자가 깨어나리라. 흙과 물이 불길 속에 타들어 갈 때···. 경계를 넘는 자가 저라면 그 그림자는 뭘까요?”


숨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는 뜻인가. 그믐에 가장 큰 힘을 받는다거나.

흙과 물을 다 태운다면 엄청난 위력일 것이다.


이루가 사빈의 손을 잡았다.

“내 부탁은 이거야. 마물을 처리해다오.”

“마, 마물요?”


순간, 마물 도룡이 떠올랐다. 도룡은 사빈의 분노를 먹고 힘을 키웠다.

그때는 소멸시켰지만, 어디에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숨어있을지 모른다.


“정귀를 소멸할 때 조각이 떨어진 줄도 몰랐어. 그 조각이 인간세로 떨어져 마물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게다가 천인에게는 보이지도 않으니···.”


이루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인간세에 놔두면 또 다른 정귀가 될 거야.”


그녀는 사빈의 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중간자는 볼 수 있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팔을 찾아줬잖니?”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마고를 내려놓은 다음에는 마물을 청소해다오. 우리가 도와주마.”


신제가 마물과 직접 싸운다면 인간세 전체가 파괴될 것이다. 피천귀를 보내봐야 오히려 그들에게 조종당할 것이다. 수집가들에게 달라붙었던 것처럼.


사빈은 숨을 한가득 들이마셨다. 천계와는 다른 텁텁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마물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일인 것 같았다. 다만, 무기를 무기답게 쓸 줄 모르니 기다린 것뿐.


사빈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할 일이 그거였구나. 마고가 아니라···. 마물을 없애는 것. 그리고 중천을 살리는 것.’


요마전쟁에서 죽어갈 때 다훤이 물었다.

할 일이 남았다면 하고 가겠는가, 다른 사람처럼 그냥 떠나겠는가.


‘어리화가 왜 이리 빨리 피었나 했더니···.’

마고도 훈련이었던 거야. 그래서 다른 마고에 비해 시간도 짧고,


‘언제부터 준비된 걸까? 내가 반인반천으로 태어난 때부터? 아니면 중간자가 된 때부터?’

사빈은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마고가 처음부터 천력이 강한 존재는 아니었다. 반지에 수많은 마고의 영력이 실리면서 점차 강해졌다. 그것을 지금의 사빈이 쓰는 것이다.


나토두가 음식을 오물거리며 사빈을 바라보았다.

“어떤 선택이든 모든 일은 제자리로 찾아갑니다. 사빈님의 선택이 제대로 된 길입니다.”


사빈은 나토두를 마주 보았다.

어린 천마인데도 나토두가 말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그녀는 이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해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요. 마고를 그만두면 중천을 살리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러면서 마물을 상대할 천력도 키울 거예요.”


사빈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분노에 먹히지 않도록 마음도 단단히 하고요. 아, 남아있는 수집가들은 어쩌지요?”


“그거라면 걱정 마라. 그들의 시간은 끝났어. 내게 힘이 돌아왔으니.”

이루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 기운이 바람을 타고 라온성 밖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앞으로 신력을 잃을 일이 없거든. 모두 네 덕분이다.”

이루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지만, 사빈에게는 그저 부드러운 바람이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잔잔한 바람을 타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사빈을 잡아당겼다.


‘아, 구슬도 있었지.’

숨결의 공간에 담아온 구슬을 꺼냈다. 붉은 구슬 다섯 개가 식탁 위 허공을 천천히 맴돌았다.


“이루님,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이것도 찾았어요. 원래는 붉은 구름 덩어리였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사빈은 붉은 구슬을 올려다보았다.


이루가 애잔하게 구슬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으냐? 구슬의 주인을 직접 부르면 되지. 아직 자고 있겠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무어라 읊조렸다.

허공을 짚었다가 바닥을 가리키자 그 자리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났다.


하얀 형체가 점점 뚜렷해졌다.

그는 하늘거리는 흰색 잠옷을 입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백록색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얇은 옷이라 가슴에 뚫린 구멍은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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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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