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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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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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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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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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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잃어버린 조각

DUMMY

마눙은 바닥에 누워 눈도 뜨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잔뜩 웅크렸다.


그는 등을 보인 채 웅얼거렸다.

“이루, 장난치지 마. 아파서 못 움직인다고.”


“마눙, 손님이 오셨어. 뭘 가져왔는지 봐. 너를 위한 거야.”

“손님?”

마눙은 웅크린 자세로 돌아누웠다.


“여기에 무슨 손님···.”

그는 슬며시 눈꺼풀을 움직였다.


천천히 눈을 뜨던 그가 사빈을 발견하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윽.”


마눙이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이루! 이런 모습으로 부르면 어떡해.”


사빈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고 허공의 붉은 구슬을 가리켰다.

“마눙님, 이 구슬이 뭔지 아세요?”


“구슬?”

마눙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구슬이 천천히 허공을 맴돌았다.


“저건···. 나의···.”

그는 말을 더듬으며 맺지 못했다.


주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붉은 구슬도 주인을 알아보았다.

구슬은 기쁜 듯 몸을 흔들더니 나란히 마눙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다섯 개의 구슬은 뚫린 가슴을 메워나갔다. 그의 가슴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이윽고 몸 전체가 빛에 둘러싸였다.


마눙을 감싼 빛은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커다란 빛덩어리가 유유당을 환하게 밝혔다.


이루가 사빈에게 손짓했다.

“시간이 걸릴 거다. 내 팔이 완전히 붙는 데도 좀 걸렸거든.”

“아, 제가 연회실에 있는 동안···요?”


이루는 빛의 물결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눙은 심장을 잃었기에 가끔 은둔해야 했어. 요즘은 주기도 짧아지고, 잠든 시간도 늘어났지. 신력을 회복하기까지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그래서 수집가들이 강해졌군요.”

사빈이 안타까워하자 이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눙이 앓아누울 일은 다시 없을 거다.”


마눙을 감싼 빛이 희미해졌다. 빛이 사라지자 위풍당당한 마백북존이 서 있었다.


하얗고 반짝이는 두루마기에 짙은 녹청색 허리띠를 둘러맸다. 그의 눈동자와 같은 빛깔이었다.

남방홍천의 대차사들처럼 그 역시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마눙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빈은 위엄에 끌려 일어났다. 마눙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눙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사빈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마음숲의 마고 사빈로구나.”


이루가 코웃음을 쳤다.

“무게는 그만 잡고 앉아. 식사는 끝났지만, 차는 함께 마시자.”


사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 차라면 제가 대접할게요. 아날빛숨의 차를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아롱재에서 기다리는 강녕액 항아리를 불러냈다.

“마눙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아날빛숨의 도우미가 만든 거랍니다.”


강녕액 항아리가 식탁 위로 옮겨지자 사빈은 찻잔에 가득 차를 따랐다.


“좋구나. 향도 좋고, 맛도 좋고. 반계에도 이런 차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루가 찻잔을 쓰다듬었다.


“그러실 것 같아서 제가···.”

사빈이 탁자 위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자 아롱재에 갖다 놓은 차 꾸러미가 모두 옮겨왔다.


“아날빛숨의 차를 덜어왔지요. 샛바람물, 지샌차, 잔별차, 꽃물차예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강건하게 한답니다.”


차 꾸러미 하나는 이루의 것, 하나는 마눙의 것이었다.


상자 안에는 네 개의 커다란 찻잎통이 가지런히 놓였다. 이루가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아날빛숨의 차를 마셔보는구나.”


마눙도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좋군, 그런데 이건 누구 것이냐?”


“예슬과 나윤에게 주려고요. 반계에서 만난 아이들이에요. 마눙님과 이루님을 다르게 보도록 일깨워주었어요.”

사빈은 연회실가 맞닿은 벽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바나가 카랑카랑 애교부리는 소리, 혼들이 까르르 깔깔 웃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즐거운지 손뼉을 치며 웃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루님께 부탁하려고 했는데, 여기 와 있더라고요. 나윤은 천하원에 있고요.”


이루는 찻잎통을 상자에 넣고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해야지. 사빈아, 소원이 있느냐?”


사빈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의 주인을 찾는 일 외에 꼭 해야 할 일.


“상산대감이 검은 장벽에 삼켜져 돌이 되었어요.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장벽에 삼켜졌다고?”

이루가 콧잔등을 구겼다.


“보자. 어떻게 된 건지.”

그녀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쓸었다. 거뭇한 구름이 탁자 위에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작은 구름 속에 번개가 치고, 꾸물거리다가 색도 희끄무레해졌다.

이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름이 엷어지더니 한순간에 사라졌다.


“암연층으로 갔구나. 장벽의 혼들이 침입자로 여긴 게야.”

“암연층이면···. 이루님이 만든 곳이죠? 그럼 데려올 수 있겠네요?”


이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못 한단다. 내가 만들고 내 마음대로 빼내면 감옥이랄 수 있겠니. 나도 길을 잃을 거야.”


마눙은 여전히 찻잎통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 앞까지 보내줄 수는 있잖아? 첫 번째 시험은 건너뛸 수 있지?”


“그건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루는 사빈과 나토두를 번갈아 보았다.

“누군가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사빈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멸하지 않은 것만도 어디야. 암연층이라면···.’


언젠가 암연층의 세 가지 시험에 대해 들었다. 다움성에 갔을 때 훼 대차사가 알려주지 않았던가.


사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꼭 데리고 나올 거야. 이번에는 내가 대감을 지킬 차례야.’


“거기서 나와도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다. 언제 깨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여하튼, 왜 그런 걸 만들어서···.”


마눙의 핀잔에 이루가 가만히 눈을 흘겼다.

“허! 시실루를 만든 이가 누구였더라?”


“그건···.”

마눙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갈게요. 반드시 대감을 데리고 나올게요.”

사빈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앞까지는 보내주마. 대신, 하루만 더 머물다 가렴. 언제 너를 또 만나겠니?”

“그래.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마눙이 힘껏 주먹을 쥐었다. 힘줄과 핏줄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도 할 일을 해야지. 괘씸한 수집가 놈들!”


“준비되었어?”

“그럼. 이제 완전히 내 것이 되었네.”


“가자.”

이루와 마눙이 일어섰다.


사빈과 나토두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디로요?”

“라온성 꼭대기로.”


*


숭고한 예식을 치르듯 이루와 마눙은 진지하고 위엄있었다.


그들의 신력이 아지랑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라온성의 결계를 넘어 반계 곳곳으로 빈틈없이 스며들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지나쳤지만, 소리도, 냄새도 없었다.


사빈은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초록 들판 위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나타났다. 여러 곳의 수집가들이 겹쳐 보였다.


들판 위의 환영은 반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었다.


마눙과 이루의 기운이 그들에게 닿자 사악한 기운이 빠져나왔다. 분노와 욕망에서 끌어모은 힘과 이루와 마눙이 잃어버렸던 기운까지 모두 흘러나왔다.


그 힘이 바람처럼 물결처럼 흐름을 만들며 마눙과 이루에게 돌아왔다.


수집가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다. 간신히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수집가들이 힘을 잃었어. 저들은 어떻게 될까?”

사빈은 옆에 선 나토두를 돌아보았다.


“스스로 혼을 팔았기에 천계로 못 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죠. 반계에 머물다가 검은 장벽에 흡수될 겁니다.”


“인간세의 수집가도 힘을 잃었을까?”

“아닐 겁니다. 거기는 인간세니까요.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반계에서 불러들이겠죠. 지금까지 그랬듯이.”


사빈의 얼굴로 한 줄기 밝은 기운이 지나갔다. 나토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거 괜찮다. 나토두, 많이 아는구나.”

“별거 아닙니다.”


“맞아. 나 또 부탁할 것이 있었어. 마눙님과 이루님에게.”

사빈은 의식을 마친 두 신제를 돌아보았다.


*


유유당에 소담한 술상이 차려졌다.

마눙과 이루는 사빈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믐 외출에서 겪은 일 서너 가지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사빈이 캑캑거리며 기침하자 마눙이 재빨리 술을 따랐다.

“허허, 네 이야기 솜씨면 차사들이 줄을 서겠구나.”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사빈은 술로 목을 적시고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런데, 천계로 안 돌아가세요? 남방홍천과 동방청천이 많이 어려워요. 새로운 별도 태어나지 않고, 별의 궤도도 일그러졌어요. 신물도 많이 줄었고요.”


사빈은 마눙과 이루를 돌아보았다.

“태우님과 금천님도 두 분이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마눙이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우리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해. 우리가 떠나면 반계는 무너질 테고, 인간세는 피천귀로 뒤덮이겠지. 그리되면 천계도 오래 가지 못해.”


“이것도 우주의 균형을 위한 일이란다. 빛을 향해 서면 그 뒤로 그림자가 생기지. 우리 역할은 그런 것이야. 누군가는 그림자가 되어야 하지.”

이루도 가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천계는요? 홍천과 청천은요?”

사빈이 애원하듯 두 신제를 돌아보았다.


마눙이 자기 가슴에 손을 댔다. 핏방울처럼 작고 붉은 구슬이 그의 가슴에서 나와 손바닥에 앉았다.

“이걸 금천에게 갖다 주거라. 신제의 힘을 갖게 될 게다.”


작은 구슬이 허공을 날자 어디선가 작은 주머니가 생겨났다.

구슬은 주머니에 담겨 사빈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도 하나씩 주마. 예언을 이룰 실마리이니 네게도 줘야지.”

이루가 손으로 허공을 쓰다듬었다. 그들 옆에 작은 라온나무 묘목이 두 그루가 나타났다.


“태우에게 갖다주려무나. 동방청천 버금성에 심으면 곧 아름드리나무로 자랄 거야. 태우도 신력을 갖게 될 거다.”


이루는 다른 나무를 사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네 숙소 근처에 심어라. 널 위한 방패가 될 거다. 라온향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지?”

“예. 나윤에게 배웠어요.”


“잠깐! 사빈이 예언을 이룰 실마리라고?”

마눙이 이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럼, 또 누가 있어? 사빈이 마물을 없애겠다고 했어. 지금은 아니지만 준비가 되면.”

“그래? 그럼 나도 빠질 수 없지.”

마눙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백록색 날개 끝에 녹청색 점이 박힌 나비였다. 마눙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깔이 그대로 담겼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찾아오는 법.”

나비는 하늘거리며 날아와 사빈의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몇 번 날개를 팔랑거리더니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어깨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리화는 곧 사라질 텐데···.’

다음 마고를 찾았으니 꽃은 사라지고 나비만 남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빈은 말하지 않았다.


“널 지켜줄 거다. 현원에게 보호의 인을 받았으니 천하무적이 되는 거지. 하하하.”

마눙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음숲도 안전할 게다. 이제부턴 수집가도, 피천귀도 걱정하지 말아라.”

이루가 술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때는 중천의 차와 술을 대접할게요.”

“중천? 갑자기 왜 중천이냐?”

마눙은 눈을 크게 떴다.


“다음 마고를 찾았거든요. 저는 중천을 살리려고요. 그들이 꿈꾸는 땅으로.”

사빈도 술잔을 들었다.


“좋지! 우리 다시 만나자꾸나.”

이루와 마눙, 사빈은 술잔을 부딪쳤다.


옆에 앉은 나토두도 흐뭇한 얼굴로 싱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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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5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8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5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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