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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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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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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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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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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DUMMY

혼은 흙벽인 듯 꼼짝하지 않았다.

벽을 둘러싼 먼지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꽃무늬를 만들며 피어올랐다.


우리가 다가가니 아지랑이는 사라졌지만, 손목의 어리화는 찌릿거리고, 후끈거렸다.


“다음 마고가 분명해. 어떻게 깨우지?”

나는 복도를 돌아보았다.


복도 양 끝은 흙과 바위로 막혀있었다. 나무로 만든 엉성한 천장과 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공기는 서늘하고,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인간세의 공기에 묵은 기운이 더해지니 가슴이 답답했다.


혼과 마주 보고 천력을 모았다. 손목의 어리화에서 서늘한 기운이 빠져나왔다.

어리화의 기운이 닿자 혼이 부르르 흔들리며 깨어났다.


그녀의 혼빛은 맑고 투명했다. 사람으로 치면 피천귀를 만들지 못하는 부류였다.


‘마림?’

혼의 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렸다.


“마림은 누구야?”

가온도 나란히 서서 혼의 떨림을 지켜보았다.


‘마림이 아니군요.’

혼은 실망했는지 웅얼거렸다. 깨어나던 혼빛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또 잠들려는 건가.


“잠깐!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서둘러 손을 뻗었다.


마고 아란이 가림산으로 찾아온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손부터 잡았다. 예사달 할머니에게 손목을 보여주자, 어리화 무늬가 스르르 사라졌다.


‘이 혼이 다음 마고니까, 손을 잡으면 무늬가 사라질 거야. 그럼,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겠지.’


혼에 손을 댔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상하다? 혼빛이 있으니 마고의 반지가 모습을 알아낼 텐데?’


“당신은 다음 마고로 선택된 혼이에요!”

나는 소리쳤다. 어찌 됐든 혼을 깨우는 게 먼저였다.


‘그런 건 몰라요. 마림이 아니면 안 돼요.’

“그, 그러니까···. 당신, 이름이 뭐죠?”

나는 혼을 잡으려고 계속 손을 움직였다.


만질 수는 없어도, 어리화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덕분에 혼은 잠들지 않았다.


‘백슬곤아. 난 백슬곤아예요.’

“그래요. 백슬곤아. 내 말 좀 들어봐요. 당신은 마음숲의 마고로 선택되었어요. 지금 당장 마음숲으로 가야 해요.”


‘마림을 기다려야 해요. 전쟁이 끝나면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어요.’

백슬곤아는 덤덤하게,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대답했다.


이 꽉 막힌 혼을 어떻게 설득하지?

“이번에도 애정 문제야? 황민도 그랬는데···.”


입안이 써서 혀로 입천장을 훑었다.

“허! 사랑이 뭔지···. 세상이 뒤집혀도 끝나지 않는 문제야.”


애틋하고, 보고 싶고, 아끼고 싶은 마음이겠지.

예전에는 몰랐는데,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게도 그런 존재가 있으니까.


“차라리 몰랐던 때가 나았어. 이렇게 복잡한 거라면.”

한숨을 내쉬자 가온이 키득거렸다.


“오호? 그 말은···, 지금은 안다는 얘기? 호호.”

“아니,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대답하면서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뒤편에 서 있던 나토두가 헛기침을 했다.

“누님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자못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래,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지.


그래도 조금 물렁해진 분위기가 혼에게도 닿았나 보다. 백슬곤아도 웃는 듯 쿨렁거렸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마음숲의 마고 사빈이에요. 이쪽은 천사 가온.”

‘천사님?’

백슬곤아의 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절 데리러 오셨나요? 전 마림을 기다려야 해요.’

백슬곤아가 바짝 벽에 매달렸다.


가온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그녀를 향해 똑바로 섰다.

“마림은 어떤 사람이에요? 많이 사랑했나요?”


‘마림은···.’

백슬곤아의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좋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이곳 장미산에서 함께 자랐어요.’

꿈꾸는 듯한 목소리에 이어 혼에서 나오는 기운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장미산? 여기가 장미산이었어?”

나는 귓속말로 가온에게 물었다.


“옛날 지명인가 봐. 백령산으로 불린 것도 천 년은 될 텐데?”

“대체 언제 혼이야?”


나는 백슬곤아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복도와 천장을 둘러보았다.


원래 장미산성이었던 땅에 백령성을 다시 지었구나. 그래서 이 창고가 더 깊이 묻혔고, 지금까지 보존된 거야.

‘백령성은 벌써 도굴꾼이 다녀갔을 테고.’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같이 살았어요. 착하고 힘도 세고, 일도 잘했어요.’

마림에 대해 말하면서 웃음이 섞여 나왔다.


‘흠. 첫사랑인가···. 착하고 예쁘고, 눈도 크고 맑다고 하겠지?’

나는 손목의 어리화 무늬를 바라보았다.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도 크고 맑았어요. 마음이 참 예뻤어요.’

백슬곤아는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요리사가 되고, 난 의원이 되기로 했어요. 마림이 식당을 열면 그 옆에 의원을 짓기로요. 장미산에서는 굶는 사람이 없게 하자고, 약속했어요.’


백슬곤아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영원히 함께 있자고 약속했는데···.‘


슬픔의 기운이 복도에 가득 찼다. 내 마음도 숙연해졌다.

가온도, 나토두도, 심지어 장난꾸러기 바나도 가만히 서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온다고 했어요. 언제 어디에 있든 찾아올 거라고 했어요.‘

백슬곤아는 괴로운 듯 출렁거렸다.


“백슬곤아! 생각을 멈춰요. 너무 괴로워하면 혼빛을 잃을 거예요.”

나는 다급하게 벽을 두드렸다.


혼의 기운이 요동치자 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손을 대고 있으니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거··· 어디서 본 기운인데?‘

모르는 혼의 기운을 만날 만한 곳은 한 군데였다. 아롱재의 바림창고.


바림창고에 그녀의 기운과 똑같은 유물이 있었다. 그것이 뭐냐면···.


유물을 생각하는 사이 백슬곤아의 기운이 가라앉더니 이윽고 닫혀버렸다.


“백슬곤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혼이 자신을 잠가버렸어.”

나는 벽에서 떨어져 복도 중앙에 섰다.


이제는 아지랑이도 없고, 낡은 나무 벽뿐이었다.

손목의 어리화 무늬도 조용해졌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버렸네.”

“너무 괴로워서 그래. 슬픔에 먹혔어.”

가온이 애처로운 눈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백슬곤아의 혼은 여전히 거기 어디 있을 것이다.


“바림창고에 백슬곤아의 유물이 있었어.”

드디어 생각났다.


“비녀야. 은과 산호로 깎아 만든. 왜 주인을 찾아가지 않았지?”

유물은 주인이 위급하면 꿈에라도 찾아간다. 백슬곤아가 혼이 될 때까지도 유물이 바림창고에 있다니?


“그보다 이상한 건···. 처음 어리화가 피었을 때 바림창고에 들어갔었어. 다음 마고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고. 그때는 어리화가 반응하지 않았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어리화가 지금은 찌릿거리다니?


“이상하긴 하다.”

가온이 중얼거렸다.


“인연이 무르익지 않아서 그런가? 길 잃은 물건이 그렇거든. 내내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어느 순간이 되어야 눈에 들어오니까.”


바림창고의 비녀가 점점 또렷이 보였다. 비녀는 주인을 찾아달라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공명이 끊어졌나?‘


나토두가 벽을 쓰다듬었다.

“사빈님, 유물은 주인이 필요한 때 찾아가나요?”


“응. 주인이 힘들어할 때 찾아가. 어쨌든 죽기 전에. 혼이 삼도천을 건너면 유물도 사라지니까.”


나토두가 벽에서 돌아섰다.

“백슬곤아의 삶이 아직 안 끝났나요? 삼도천을 건넌 것도 아니고···. 필요한 때가 아직 안 왔다는 거예요?”


“맞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나는 가온의 손을 잡았다.

“끝난 게 아니라고!”


“뭐? 뭐가?”

“백슬곤아 말이야. 우리가 매듭을 풀어주면 돼!”


과거에 사로잡혀서 아직 기다리는 거라면, 그곳에 가서 사슬을 풀어주면 된다. 황민의 과거로 갔던 것처럼 백슬곤아의 과거로도 갈 수 있잖아.


“잠깐!”

가온이 손을 들었다.


“그래도 현재를 바꿀 수 없어. 어쨌든 마림과 이어질 수 없다고. 다음 마고가 되려면 백슬곤아의 혼이 여기서 우리를 기다려야 한다고.”


“알아.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야지. 중천에서 만난 혼도 그랬어.”


황민은 이전에 자신의 손으로 연인을 죽였다.

전생의 연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 괴로워하며 혼빛도 잃었다.


지금은 고통이 조금 줄었을 것이다.

알아보지 못했으니 자책하고, 죽음을 막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다. 그 정도라면 언젠가 스스로를 묶은 굴레를 풀 것이다.


“백슬곤아는 여기 있어야 해. 마음의 매듭만 풀면 돼. 우리가 부르면 바로 깨어나도록.”

“어떻게 하려고?”


“마림의 청혼을 받으면 돼. 죽기 전에 청혼하고 함께 있는 거야.”

나는 흥분해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복도를 왔다 갔다 서성였다.


“슬픔을 없앨 수 없지만, 줄일 수 있어. 사랑에는 사랑으로!”

“얼씨구. 그게 마음대로 돼? 그건 천사장님도 못하겠다.”

가온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어떻게 과거로 넘어가려고?”

“시간의 덫을 찾으면?”


“반계에서 만든? 그건 너무 위험해.”

가온이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였다.


위험하기는 하다. 시간의 덫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고, 갈 곳을 고를 수도 없으니.


나토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거···, 어디서 들었는데···?”


나와 가온이 동시에 나토두를 돌아보았다.


“염라부에서 들었는데요. 혼의 기억으로 들어갈 수 있대요. 백슬곤아의 기억이 시간의 층과 연결되는 거죠.”


나토두가 주먹을 흔들었다.

“차원의 문지기만이 열 수 있다고요!”


가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 그래. 뭔지 알겠어. 한 번 열어볼게.”


그녀는 몸 안의 천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가온의 천력을 따라 백슬곤아의 혼에서 뭉클거리는 기운이 빠져나왔다.


혼의 기운과 가온의 천력이 맞물리며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토두도 눈썹을 씰룩이며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


빠지직 번개가 지나가고 콰르릉 천둥이 울렸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커다란 마을이 환하게 빛났다.


초가집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이었다. 서낭당 앞에 장승도 있고, 마을 중앙에 삼 층 높이의 성주각도 보였다.


’이 기시감은 뭐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인간세에서 내가 살던 마을인가?


“어딘지 낯이 익는데···.”

가온이 중얼거렸다.


“너도? 나도 그런데?”

저 건물이 성주각인 것을 내가 어찌 알지? 이 근처를 지나다닌 것도 같은데···.


“알았다!”

가온이 소리쳤다.


“그, 그. 마른 우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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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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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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