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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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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61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9.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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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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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천계_새로운 마고

DUMMY

한요재 감수실에서 차미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하는 아직도 깨지 않았다. 그도 걱정이지만, 그 옆에서 밤을 새는 사빈도 걱정이었다.


“사빈님, 가서 쉬어야지. 대감은 곧 깨어날 거야.”

“그렇겠죠?”

사빈이 퀭한 눈으로 차미를 올려다보았다.


“다음 마고를 데려와야 하거든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녀는 백하의 이마를 쓰다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백하를 찾으면 곧바로 슬아를 데리러 갈 계획이었다.

갔다 와서 마음숲의 차사들과 도우미, 상산대원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암연층에서 벗어날 때, 사빈은 마고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보았다.

백하를 부축하느라 자세히 못 보았지만, 그 찰나에도 자신의 미래임을 알아보았다.


백슬곤아에게 반지를 건네자 꽃수 열쇠도 옮겨갔고, 마고의 힘도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나뭇잎처럼 풀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곁에 있던 초연과 해령, 차미가 놀라 소리치는 모습도 보였다.


‘내 수명은 벌써 끝났는지도 몰라. 그동안 반지의 힘으로 버텼는지도···.’

사빈은 소매를 걷어 새까만 어리화 무늬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어.

‘중천도 나를 기다리고, 마물도 처리해야 하는데? 그런 환영에 속으면 안 돼.’


사빈은 발에 힘을 주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걱정 마. 대감은 어디든 사빈님을 찾아갈 거야. 생명의 은인이니 더 잘 모셔야지.”

차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빈님이 이틀이나 지켜준 걸 알면 엄청 좋아할 거야.”

차미는 백하의 모습을 상상하며 싱글거렸다.


“그럼···.”

사빈은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셨다.

“다녀올게요.”


한요재 문을 나서는데 사빈의 머릿속으로 소리가 들어왔다. 중앙황제 현원의 전언이었다.

‘사빈아. 아날빛숨에서 기다리마.’


*


아날빛숨의 삼 층부터 구 층까지 혼들이 가득 들어찼다.

며칠 동안 혼알방에 갇혀있었으니 어디든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샛강이나 광장에도 모여들었다. 위즐증가 옥상정원도 그들이 차지했다. 그러니 황제가 아날빛숨으로 올 수밖에.


현원과 사빈은 일 층 구석에 앉았다. 소리의 결계를 쳤기에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활기가 넘치니 보기 좋구나.”

현원은 사빈이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황제님이 좋아하실 소식이 있어요. 전에 가져온 그 나무요.”

“라온나무 말이냐?”


“나무가 아니고 이루님의 팔이었요!”

사빈이 소리치자 현원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남아있던 물이 탁자 위로 번져나갔다.


“이루의···?”

“붉은 구름 덩어리는 마눙님의 심장이었고요.”

사빈의 말에 현원은 입술을 떨었다.


사빈은 반계에서 있었던 일과 태우와 금천을 위해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이야기했다.

왜 수집가들이 날뛰었는지, 앞으로 마음숲을 지켜주겠다는 약속까지.


이야기가 끝날 즈음 현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 고생을 했다니···.”


현원은 아날빛숨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삼키고 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만날 수 있겠어. 어쩌면 바람길 연회에서 볼 수 있을지도···.”


“그래서 나토두와 바나가 선물을 전하러 갔어요.”

“호호, 그럼 오려면 멀었다.”

“왜요?”


“그런 선물을 받았는데, 금천과 태우가 바로 보낼 것 같니? 사나흘은 잔치를 벌일 거다.”

“바나가 엄청 좋아하겠네요.”

사빈은 들떠서 뛰어다닐 바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사빈은 할 일을 떠올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다음 마고를 데리러 가려고요. 백슬곤아를 찾았거든요.”


현원이 눈을 빛냈다.

“그럼 어서 다녀와야지. 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싱긋 웃었다.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중천으로 간다고 했지? 거기서 뭘 하려고?”


“찻집을 만들 거예요. 온천도 만들고요. 중천에 또 다른 마음숲을 만드는 거죠. 이름도 생각했어요. 열린마을이라 부를 거예요.”


“거기선 차사들도 오래 머무르지 못해. 물도 나오지 않잖니?”

“옹달샘이 있어요. 뜨락고원 아래 새맘계곡 끝자락요. 찾아낼 수 있어요.”


사빈은 꿈꾸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맑음고원과 명부전이 보이는 곳에 찻집을 열 거예요. 찻집 아름누리요. 처음에는 삼 층짜리 오두막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조금씩 키우는 재미가 있겠죠?”


현원도 중천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일은 어떻게 하고? 도우미 혼도 들어갈 수 없는데?”


“도우미는 이미 네 마리나 있어요. 정원을 돌볼 정원사도 서른한 그루나 있고요. 걱정 마세요. 마음숲에서 배웠으니 잘할 수 있어요.”


그래, 그 일을 하게 하려고 먼저 마고가 되었던 거야. 사빈은 마고로서 했던 많은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허어, 다훤과 예사달이 왜 그리 급히 중천으로 갔나 했더니만···.”

“할머니랑 아저씨가 중천에요?”


“그래. 할 일이 있다면서 떠났단다. 네 집을 준비하나 보다. 여하튼 네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니···. 자기 제자 아니랄까 봐. 호호.”


현원은 사빈의 손을 끌어당겼다.

“중천을 부탁한다. 사빈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녀는 사빈의 손등을 다독였다.

“다음 그믐에 내려가려고?”


“지금 바로 갈 거예요. 다음 마고에게 가려는 반지의 힘이 커졌어요. 그믐의 한계도 넘을 만큼.”


현원은 일어나 사빈을 끌어안았다.

“고맙구나. 얼음 같던 백하를 바꿔주어서. 그동안 마음숲을 잘 지켜주어서.”


중간자로, 반인반천으로, 마음숲의 마고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사빈이 기특하고 애틋했다. 쉽게 놔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중천에서 보자꾸나.”


*


파라다이스 빌라의 소품샵도 달라졌다.

조용하고 한적하던 ‘달숲의 작은 천사’는 훨씬 밝고 활기에 넘쳤다. 요정 미지 덕분이었다.


“사빈님!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요정 미지가 날개를 팔락이며 사빈의 소매에 매달렸다.


“그래서? 음···.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뭐예요! 사빈님, 너무해요.”

미지가 팽 토라져서 단풍나무 화분에 걸터앉았다.


가온이 물을 한 컵 내밀었다. 투명한 푸른빛에서 신령수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사빈은 한숨에 물컵을 비웠다. 맑고 선선한 선계의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 얼음대감은?”

“아직···. 언젠가 깨어나겠지.”


“애틋하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가온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서 사빈에게 내밀었다.


“교육비.”

“무슨?”

“저 봐, 저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가온은 새침한 척 입술을 오므렸다. 눈짓으로 옆에 떠 있는 백슬곤아의 혼을 가리켰다.


백슬곤아는 혼빛도 살아나고 윤기가 흘렀다. 슬픔도 잊고, 마음도 평온해졌다. 삼도천을 건너면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게 될 거다.


“숙박비를 달라는 거야? 설마?”

“천계와 선계에 대해, 마고의 일에 대해 기초를 다 가르쳤다 이거야. 때깔도 좋아지고, 활기도 넘치고.”


“그래. 정말 고마워.”

“하하, 뭘. 천사와 선인이 있는데 그쯤이야. 호호호.”


“그럼, 수고비는 안 받는 걸로.”

사빈이 깔깔거리자 가온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지 말고, 나도 좀 도와줘.”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전에 말했잖아? 차원의 문지기 하나가 묘수의 차원으로 요양하러 갔다고. 도깨비 기연랑이 맡긴 아이를 아직 못 찾았어. 문지기가 될 아이거든.”


“인간세 어디에 있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까 중천에 들어오는 혼에게 물어봐 줘. 넌 이제 그믐이 아니어도 아무 때나 나올 수 있잖아? 우리는 차원의 문에서 못 벗어난다고.”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천에서 지내면서 천력을 쌓고, 아움과 높쌘, 소슬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마물을 사냥하러 내려올 것이다.


그때는 인간세 어디나 다니고, 언제라도 내려올 수 있다.

그 아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가온이 걱정할 테니까.


“그래.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도와야지.”

“좋아. 그럼 이제부터 사업 얘기를 좀 해볼까?”

“또 무슨?”


“바림창고의 물건 좀 풀라니까. 여태까지 몇 개 안 나왔어. 슬아, 너도 이건 알아야 해.”

가온은 백슬곤아에게 손을 까딱였다.


“분명히 약속했거든. 마고가 되면 잊지 말고 보내줘. 여기서 주인을 찾아주면 좋잖아? 유물도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이거야말로 상부상조지.”


가온이 자신 있게 말하자 백슬곤아도 끄덕였다.


“응. 이건 삼도천을 건너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새겨놔야지.”

가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손끝에서 반짝 빛이 났다.


그녀가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자, 사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도 천사 가온을 만날 수 있어. 담아와 가온, 셋이 함께 모일 날도 곧 올 거야.’


*


백슬곤아를 데리고 아날빛숨으로 들어서자 초연과 해령, 차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삼도천을 건너 배웅문을 들어서는 동안 백슬곤아는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고로서의 준비도 마쳤다. 주인을 향한 반지의 힘이었다.


사빈보다는 키가 컸지만. 상산대원인 차미에 비하면 여전히 작았다. 눈과 입이 커서 웃을 때는 얼굴 전체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초연과 차미는 기대에 차 눈을 빛냈다. 해령은 시무룩해서 사빈을 흘끔거렸다.


“어머, 네가 다음 마고니?”

초연이 백슬곤아의 손을 잡았다.


“이름은 현원님께 받을 테고. 정말 반갑다. 여기가 네가 지낼 아날빛숨이야.”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백슬곤아는 신기한 눈으로 아날빛숨을 돌아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사빈은 해령의 낯빛을 살폈다.

“해령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너무 서운해요.”

“아주 가는 것도 아닌걸. 장터열림날에는 찾아올게. 차사님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래. 네가 온다면 위즐증가와 고샅공방에서 가만히 안 있을 거다. 호호.”

초연도 껄껄 웃었다.


사빈은 더 있고 싶었지만, 마고의 반지가 부르르 떨었다. 새 주인에게 갈 때였다.


백슬곤아가 불안한 눈으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님···. 저는···.”


“잘할 거야. 이 반지가 마고를 마고답게 해주거든.”

사빈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반지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그 빛을 따라 사빈의 허리에 매달린 노리개도 움직였다.

헝겊으로 만든 꽃수 열쇠와 옥합이 달그락거리더니 어느새 백슬곤아의 허리띠로 옮겨갔다.


“사빈님, 축하하러 가자!”

차미가 소리쳤다.


사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비틀거리다가 나뭇잎처럼 쓰러졌다.


아득한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너라. 목이 너무 마르구나.’


중천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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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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