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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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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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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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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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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DUMMY

마른 우물 사건.

담아와 가온, 두 천사와 함께 나온 그믐 외출이었다.


얼마 전, 얄리장터에서 담아가 기억을 꺼내줬기에 빨리 생각났다.


가온이 서낭당을 둘러보다가 그 옆의 장승을 가리켰다.

“저 장승에 영감이 머물지 않았나?”


“왈, 과거로 오면 영감이 없어라.”

바나가 장승 주위를 킁킁거렸다.


“그렇지. 영감도 지나갔으니. 그럼 그냥 가자.”

가온이 손을 들어 성주각을 가리켰다.

“그때 우리, 저 성주각을 지나 북문으로 나갔지?”


“무슨. 성주각 앞으로 지나면 동문이었어.”

“그랬나? 하하, 내가 워낙 길치라서.”

가온이 방긋 웃었다.


천사 가온은 천사국에서도 유명한 길치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가 길을 잃었기에 선위 하륜을 만났으니까.

게다가 저 작은 성읍에서 길을 잃어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래···.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대 우리, 어떤 아이들 집에서 머물렀잖아?”

그때 만났던 아이들이 가물가물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여섯 살이었다. 유난히 혼이 맑고 순수했는데? 이름이···.


“슬아와 마림···.”

말하면서도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랐다.

“마림? 설마! 이 마림이 그 마림?”


가온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아이가 슬아였어. 슬아···.”


“백슬곤아!”

가온과 나는 동시에 외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마고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다음 마고를 만났단 말이야? 가슴이 쿵쾅거렸다.


숨을 훅훅 내뱉으며 다시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때는 큰 태풍이 지나가 성 안팎이 폐허나 다름없었다. 성주각 지붕도 뜯겨 나가 이엉과 짚이 풀썩거렸으니까.


지금은 전혀 달랐다. 깨끗이 손질하고 다시 지어 번듯한 성읍이 되었다.

‘그 후로 꽤 시간이 지났구나. 백슬곤아의 기억이면 어른이 된 다음일 테니.’


어릴 때의 슬아와 마림은 혼이 깨끗했다.

영천옥에서 씻김한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 혼을 지키기 쉽지 않은데.


아직 그 혼이 그대로 있을까.

지금 백령성에 자신을 가둔 백슬곤아는 슬픔에 절어 혼빛을 알아볼 수 없었다.


“빨리 찾아보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나는 서둘러 오솔길로 들어섰다.


“슬아와 마림이 살던 곳은 외딴 초가집이었어. 울타리 안에 작은 초가가 두 채 있는.”

호기롭게 나섰으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바람에 뒤로 물러섰다.


나토두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조심하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는 서낭당 옆 나무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덟 명의 청장년 사내들이 앞장서고 가족으로 보이는 아녀자와 노인들이 뒤따랐다. 사내들은 봇짐을 짊어지고 멀리 떠날 차림이었다.


가족들이 흐느끼면서 따라오는 걸 보면 군역이나 노역을 위해 가는 것 같았다.


한 여인이 눈물을 그치지 않자 남편으로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그만혀. 그리 울면 애들 마음이 어떻겠나?”

“아, 울지도 못해요? 고제국 놈들 때문에 귀한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죽긴 누가 죽어? 살아서 올 거라고! 모두다!”

남자가 소리치자 옆에 있던 다른 남자도 거들었다.


“그럼, 그럼. 마림도 나가잖여? 고제국 놈들이 한 번에 덤벼도 마림을 못 이길걸?”


여자가 코를 훌쩍거렸다.

“그런데 마림은 어디 갔대?”

“먼저 간다고 했잖여? 슬아가 장미산 입구까지 같이 간다 하더만.”


“에효, 슬아도···. 을매나 가슴이 아플까.”

“어허! 잠깐 다녀오는 거라니께!”

남자가 호통치자 여자는 삐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다른 그믐이었다면 수명환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살폈겠지만, 지금 내 목적은 하나였다.


“가자. 장미산 입구.”

나는 서낭당을 돌아 마을의 동쪽 길로 들어섰다.


백슬곤아를 만난 백령산이 지금의 장미산이니 산세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동쪽으로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장미산이었다.


*


나토두는 날갯짓 몇 번 만에 슬아와 마림을 찾아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럿이어서 고민했는데, 눈치 빠르게 남쪽 오솔길을 찾아냈다.


우리는 수풀이 우거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기다렸다.


열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올라오고 있었다. 백슬곤아와 마림이었다.


백슬곤아는 어여쁘고 단아했다. 마림은 마을 사람들이 말한 대로 탄탄하고 건장했다.

둘 다 눈빛이 밝고 맑았다. 여전히 깨끗하고 순수한 혼을 간직하고 있었다.


“십 년은 지난 것 같아. 정말 잘 컸다. 예쁘고, 잘 생기고, 여전히 혼이 맑네.”

가온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꼭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슬아와 마림을 보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이 시간으로 왔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백슬곤아가 가장 괴로워한 시간으로 가야 한다. 마림이 죽기 직전, 유언이라도 듣게 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괴로움의 시작이라는 건가? 아니면···.’


나는 가온을 돌아보았다. 열쇠는 차원의 문지기였다.

차원의 문지기가 상대의 기억과 공유하는 시간과 장소가 먼저였구나.


‘이런···, 문제의 순간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해?’

설마 전쟁터까지 가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럴 시간이 없다고.


그때까지 나는 여기 있어야 하고, 못 돌아간다는 얘기잖아? 지금 마음숲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마음이 다급해졌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흘렀다.

‘시간을 건너뛸 수 없을까?’


가온에게 손을 뻗는데 나토두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빈님, 마림에게만 먼저 출발하라는 연락이 왔다는데요?”


“뭐? 언제? 왜?”

“방금 그 얘기 했는데요?”


아차, 생각에 빠져서 대화를 놓쳐버렸다. 그저 그런 작별 인사만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슬아와 마림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뭐가 이상해? 상황이 안 좋은가 보지.”

마림이 슬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웃었다.


“괜찮아. 잘 다녀올게.”

“그래도 뭔가 이상해. 할머니 말씀 들었지? 고제국도 내란 때문에 어렵다고.”


“음. 들었어. 그래도 지금은 우리 땅을 지키는 게 먼저야.”

“어떤 나그네가 그랬대. 고제국이 아니라 요귀 마왕이라고.”

슬아가 불안해하며 마림을 올려다보았다.


‘요귀 마왕?’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여기도 요마전쟁인가?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대. 하루 만에 수천 명이 죽었다고. 요귀 마왕의 짓이랬어.”

“그런 건 없어. 걱정하지 마.”

마림은 부드럽게 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림이 슬아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돌아와서 정식으로 청혼할게. 기다려줄 거지?”

“당연하지.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만 기다릴 거야.”


“언제 어디에 있든 너를 찾아갈게.”

마림이 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가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 저걸 어째. 마음이 아파서 눈물 없인 못 보겠다.”


마림이 손을 흔들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온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혀를 쯧쯧 찼다.


그녀와 달리 나는 절박했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해? 마림 쪽이야, 슬아 쪽이야?”


나는 가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시 시간의 결을 열어줘. 마림이 죽기 직전으로 가자.”


“그게 언제인데? 여기는 백슬곤아의 혼이 없어서 문을 열 수도 없어.”

가온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우, 천사님, 지금 우는 거야? 저 둘이 헤어져서?


갑자기 바나가 으르렁거렸다.

“왈, 주인님. 이상한 기운이 있어라.”


“이상한 기운?”

산길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양쪽에서 오고 있어라. 아래위에서. 크르릉.”

“저도 뭔가 느껴져요.”

나토두가 일어섰다. 슬아가 멀어지는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슬아는 산을 내려가고 있었고, 마림은 벌써 숲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산길이 끝나는 내리막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모여 있고, 잡초가 무성했다. 그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작고 검은 그림자는 스멀스멀 슬아에게 다가갔다. 바닥을 훑듯 서서히 움직였다.


가온이 소리쳤다.

“저거··· 악마 아냐?”


“악마?”

“응. 정귀의 귀력과 사람의 상상이 만든 존재. 보는 건 처음인데···. 정귀 만큼의 귀력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가온이 손짓했다.

“슬아를 구해야지. 악마에게 잡히면 육체건 영혼이건 남지 않아.”

“뭐가? 슬아는 안전하겠지. 먹히지 않았으니 백령성에 남은 거 아냐?”


“사빈님! 우리가 구했기 때문에 백슬곤아가 남은 겁니다.”

나토두가 내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뛰었지만, 가온은 휘익 날아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슬아에게 닿기 직전, 가온이 그림자 위로 내려앉았다.


“끼악!”

슬아가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쉿!”

가온이 손가락을 들어 딱 부딪쳤다.

슬아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나토두가 양팔로 슬아를 붙잡고 가볍게 물러섰다.


그림자가 꿈틀거리자 나는 손바닥에 마고의 힘을 끌어모았다.

“봉인!”


마고의 반지가 보이지 않는 그물로 그림자를 묶었다. 그림자가 버둥거렸다.

가온이 천력을 불어넣자 그림자는 서서히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


악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갓난아기 같은 몸에 참새 같은 날개가 달려있었다.

눈은 크고 초롱초롱한데, 코는 작고 오뚝했다. 입은 분홍빛 꽃잎 두 장을 붙여놓은 것 같았다.


“놔! 이거 놓으라고! 당신들 실수하는 거야.”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악마가 원래 이렇게 귀여운가? 음, 그래야 사람들이 속겠구나.’

나는 신기해서 악마를 쳐다보았다.


“뭐가 실수라는 거야?”

가온이 그물코를 잡아당겼다. 그물이 조여지자 악마가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는 마림에게 갔다고.”

“진짜?”

가온이 되물었다.


“쳇!”

작은 악마가 발을 굴렀다.


“왕왕!”

멀리서 바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림이 올라간 산길을 노려보았다.


“저 개한테는 보일걸? 마물 도룡이 원하는 건 마림의 혼이거든.”

“마물···?”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괜찮아. 마림 혼자 가지 않아. 이 계집의 혼도 가질 거랬어.”

작은 악마는 재미있다는 듯 키킥거렸다. 가만히 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악마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다.


“얜 왜 이래? 갑자기?”

가온도 어리둥절하여 지켜보았다.


멀리서 바나가 소리쳤다.

“왕, 주인님! 마림이 잡혔어라!”


나는 오솔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뛰면서 나토두에게 소리쳤다.

“나토두! 슬아를 돌봐줘. 악마도 놓치지 말고! 내가 갔다 올게.”


가온은 가볍게 날아올랐다.

“네가 아니라 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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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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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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