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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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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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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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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DUMMY

천선계 다섯 성천 중 하나인 중앙황천.


중앙황제 현원의 다움성에서는 하늘열림 축하연이 한창이었다. 천인과 차사들은 기쁜 얼굴로 오늘을 축하했다.


하늘열림날은 지금 여기 있음을 축하하는 날이다.

언제 하늘이 열렸는지, 언제부터 축제가 되었는지 모르나, 두 차례의 대혼란이 지나며 이날의 의미는 더 깊어졌다.


중앙황천은 원래 평평하고 고요한 별밭이었으나, 두 번째 대혼란인 미틈오름 시기에 완전히 바뀌었다.


바닥이 뒤집히고 땅이 폭발하며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구부러졌다. 많은 천인과 선인이 소멸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삶의 터전을 잃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뒤틀린 바위조차 멋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꽃과 나무,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사르락대며 꽃향기를 날랐다.

은은한 향기, 아름다운 음악에 술과 음식이 더해져 다움성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


오늘 다섯 신제가 모이는 곳은 중앙황천이었다.

중앙황제 현원은 귀한 손님을 기다리며 온새미실 앞을 서성거렸다.


연한 황톳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리고 황금빛 예복을 입으니 중앙황제라는 이름이 더욱 돋보였다.


크고 굵은 몸집이지만 올망졸망한 눈코입 때문에 친근한 인상이었다. 웃을 때마다 깊이 파이는 보조개 역시 그녀의 매력이었다.


중앙황제는 우주의 중앙을 지키나, 인간세에서 보는 그녀의 지위는 크게 달랐다. 그녀는 중앙황제이면서 염라부 대왕이었다.


사람의 혼이 삼도천을 건너면 중천과 염라부를 지나 영천옥에서 대명천으로 옮겨간다.

여덟 대차사와 사천 명의 차사들이 중앙황천을 지키면서 혼을 관리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그렇기에 중앙황제가 염라부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저 이름일 뿐, 현원은 사람의 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현원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넓은 대문에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랜만에 신제들과 만난다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북방흑천 전욱을 제외하면 하늘열림날이나 바람길 연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전욱은 천사장의 역할도 맡고 있으니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북방흑제의 소명원은 북방흑천에서도 남쪽이고, 다움성은 중앙황천에서도 북쪽에 있으니 거리도 가까웠다.


‘소명원이 가까이 있으면 뭐 하나. 이리도 늦다니.’

현원은 초조한 눈으로 정원과 관문을 번갈아 보았다.


서방백제 영랑이 정원으로 들어서나 싶더니 훌쩍 날아올랐다.

그녀는 현원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현원을 바라보며 짙은 갈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산들바람이 일어나 그녀의 길고 흰 머리카락을 찰랑거렸다.

서방백제는 푸르스름한 살결에 날씬하고 탄탄한 체격이었다. 걸음걸이도 가벼워 걷는지 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서방백천은 우주의 서쪽을 지키지만, 선계라고도 불렸다.

그곳은 선인들의 세상이었다. 인간세의 실증계에 선사를 파견하고 사람을 돕는 역할도 함께 했다.


현원은 나비처럼 다가가 영랑의 손을 잡았다.

“어서 와. 하늘열림을 축하해.”


“너에게 수리마루 정명의 축복이 있기를.”

두 신제는 가볍게 끌어안으며 서로를 축복했다.


“천사장은 아직?”

“곧 올 거야. 금천과 태우는 늦겠지만.”

남방홍천의 금천과 동방청천의 태우를 말하면서 현원은 쓸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신제의 지위를 받지 않으니···.”

“곧 받아들일 거야. 홍제와 청제의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

영랑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현원이 들뜬 손길로 영랑의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아날빛숨의 차를 가져왔어. 종류별로 다!”

“호오, 그래? 아날빛숨에서 만드는 차는 확실히 달라. 선계에서도 못 따라간다니까.”


“이름 그대로야. 아름다운 날 빛나는 숨.”

영랑의 손을 잡자 현원의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선계의 청아한 기운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현원은 영랑을 아주 좋아했다.

그들은 이쪽 차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 있었다.


우주가 시작될 때 하나의 생명알에서 세 명의 신제가 같이 나왔다. 지금은 현원과 영랑, 둘만이 천선계에 남았다.


현원은 소매를 걷고 신중하게 차를 따랐다.


뽀얀 찻주전자에서 연노랑 물줄기가 또르르 찻잔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일렁이는 물비늘에 멈추었다.


현원의 오른쪽 눈은 왼쪽 눈과 달랐다.

왼쪽은 청록색 눈동자이지만, 오른쪽은 살아있는 눈이 아니라 비슷한 색깔의 보석이었다. 똑같은 모양으로 깎았으나 빛이 들면 색이 달라져 돌덩이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뭐야? 벌써 시작한 거야?”

우렁찬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들어섰다. 북방흑천 전욱이었다.

여느 천사들에 비해 몸집이 두 배로 크니 그가 들어서자 온새미실이 가득 찼다.


부리부리하고 큰 눈이 덥수룩한 검은 수염과 잘 어울렸다. 검은 머리카락 덕분에 불그스레한 살결마저 뽀얗게 보였다.


“천사장! 지금 막 차를 우렸어. 어서 앉아.”

생글거리는 현원의 빰에 보조개가 깊이 팼다.


“마침 흑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때를 잘 맞추네.”

영랑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뭐야? 천사에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어?”

전욱의 목소리가 온새미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옷자락을 젖히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부탁은 무슨. 천사장의 아들에 대해서지.”

영랑이 싱긋 웃자 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훤도 예사달을 찾아온 것 같던데?”


“허! 소명원보다 여기가 더 좋은가.”

전욱은 껄껄 웃으며 차 한 잔을 벌컥 마셨다.


영랑이 들고 있을 때는 한 잔으로 보이던 차가 그가 들자 한 모금이 되었다.


차 맛이 느껴지자 전욱은 눈을 크게 뜨고 혀끝에 남은 맛과 향을 음미했다.

“좋은데? 아날빛숨에서 가져왔군!”


“대단한 감별력이야.”

현원은 다시 차를 우렸다.

“차는 역시 아날빛숨이지. 사빈이 마고가 되고 나서 차 맛이 더 좋아졌어.”


영랑은 손가락 끝으로 하얀 찻잔을 쓰다듬었다.

“아란이 사빈을 마고로 골랐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중간자가 마음숲을 지키는 건 처음이잖아?”


영랑과 현원, 전욱은 차를 음미하며 조용히 마음숲을 그려보았다.


대명천 남쪽 끝에 마련된 마음숲은 인간세에 태어날 혼이 머무르며 때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곳도 중앙황천이지만 중천이나 염라부, 영천옥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새놀산과 달해산이 좌우를 지키고 바래강과 반다강이 마음숲을 감싸고 흐른다. 아름답고 아늑했다.


바닥에는 수백만 개의 혼알방이 조약돌처럼 깔려있는데, 그곳이 바로 혼이 사용하는 방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찻집 아날빛숨이었다.


오래전, 첫 번째 마고가 작은 찻집을 세워 쉼터로 삼았고, 그 뒤를 이어 여러 마고와 돌봄차사들이 차례로 모로매 온천과 식당 위즐증가, 상생농장을 세웠다.


마음숲은 중앙황천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감 어린 장소였다. 모두 마고들이 애쓴 덕이었다.


혼을 위한 공방과 학당도 있고, 장터와 광장도 있었다. 천인과 선인들은 상생농장의 약초만큼이나 얄리장터에 나오는 물건도 좋아했다.


지금 마음숲을 지키는 사빈은 열일곱 번째 마고였다. 선대 마고인 아란은 후계자를 세운 뒤 중앙황천의 낙원으로 들어갔다.


“괜한 걱정이었어. 아주 마음에 든다니까.”

현원이 세 개의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르 맑은 물소리가 쟁반 위로 피어올랐다.


“당연하지! 중간자라도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대천사 반열의 딸일세. 반은 천사의 피라고.”

전욱은 뿌듯해하다가 반열을 떠올리고는 눈꺼풀을 내렸다.


“그 친구가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사빈도 중간자가 되지 않았겠지···.”

전욱은 혼잣말을 한숨에 섞어 웅얼거렸다. 덥수룩한 검은 수염이 그의 숨을 따라 움찔거렸다.


한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서방백제 영랑에게 시선이 머물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날개는? 날개를 아예 떼어버렸나?”

“맞아. 부러진 날개를 달고 있자니 거추장스러워서. 깔끔하지?”


영랑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날개가 있던 자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매끈했다.


“대혼란도 까마득한 예전이야. 언제까지 매여 있을 수는 없어. 날개가 없어도 충분히 날 수 있고.”


영랑은 푸르스름한 얼굴을 빛내며 태연하게 웃었지만, 현원은 웃지 못했다.

“그 날개, 참 아름다웠는데···.”


선인이 모두 날개를 갖는 것은 아니나, 서방백제 영랑의 날개는 태어날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크고 하얀 깃털로 이루어진 풍성한 날개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더 높여 주었다. 날개가 없어도 영랑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지만.


두 번째 대혼란, 미틈오름 시기에 현원도 오른쪽 눈을 잃었다. 영랑의 매끈한 등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른쪽 눈두덩에 손끝을 갖다 대었다.


“그래도 그 눈은 예사달이 되어 왔잖나. 날개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걸세.”

전욱의 말에 영랑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건 선계의 대기에 녹아들었어. 모두의 숨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살아남은 거지.”

영랑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다가 전욱의 삐죽삐죽 솟은 검은 머리로 고개를 돌렸다.


“다훤이 나올 때 들렸다는 소리···, 그 후로는 안 들렸어?”

“못 들었는데···. 왜 그러나?”


“날개 조각을 떼어내다가 갑자기 생각났어. 넋과 몸 사이를 서성이는 이가 중간자가 아닐까 하고.”


“뭐?”

현원이 놀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중간자라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중간자는 지금의 천선계에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마음숲의 마고 사빈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 염라부 인도자가 된 한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앙황천 소속이기에 현원은 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현원은 특히 사빈에게 애틋했다. 자신에 비하면 반도 안 될 정도로 가냘픈 여인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리여리한 몸집에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인도자 한얼은 다훤의 제자로, 오랫동안 북방흑천에서 지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인도자가 되겠다며 중앙황천으로 옮겨왔다.


모든 것은 다훤의 뜻이었다.


다훤은 북방흑제이자 천사장인 전욱의 가슴에서 솟아 나왔다. 천계에서 누구보다 예지력이 뛰어난 그의 말을 누가 거부하겠는가.


아들의 말이라면 전욱은 무조건 받아들였고, 중앙황천에서도 한얼 만한 능력자가 드물기에 당연히 환영이었다.


“그럴 수도···.”

전욱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래전 들었던 소리를 중얼거렸다.


‘검은 꽃이 태어나면

넋과 몸 사이를 홀로 서성이는 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리라.’


자신의 가슴에서 아이가 솟아 나올 때 그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새벽의 대기를 뚫고 울리는 소리에 얼마나 황홀하고 두려웠던가.


전욱은 그때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은 꽃은 뭐고, 잃어버린 조각은 뭘까? 검은 꽃은 천선계 어디에도 없는데?”

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가 되면 알겠지. 그보다 사빈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았어?”

영랑의 물음에 현원이 환호를 질렀다.

“당연히 재미있지!”


현원은 노래하듯 빠르게 대답했다.

“천사나 선사가 모르는 인간세 모습을 보고 온다고. 수명환 때문이니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래? 그 얘기부터 들려줘.”

영랑이 몸을 돌려 앉았다.


현원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는데 온새미실 밖에서 누군가 또도독 문을 두드렸다.


“동방청천 태우입니다.”

조심스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나긋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방홍천의 금천입니다.”


현원이 영랑에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나중에 해줄게. 우선 하늘열림을 축하해야지.”


현원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온새미실 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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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5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4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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