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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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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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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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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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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DUMMY

이번에는 ‘그믐밤의 손님’이 없어 다행이었다.

문지기들이 빌라 옥상에 모여 결계를 쳤다. 오늘은 차와 과자만 준비되었다.


옥상을 덮은 결계는 마음숲이었다.

나를 위한 배려지만, 지금의 마음숲이 아니라 가온과 내가 함께 기억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를 마실 생각도, 풍경을 감상할 마음도 없었다.

은서가 가져온 이야기만 기다렸다. 가온도, 하륜과 바우도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토두는 끝자리에 앉아 조용히 코코아를 홀짝였다. 처음 내려온 곳이니 무슨 일인지 잘 모를 것이다.

바나는 여기 오자마자 삽살이와 참새 둥지로 가버렸다.


은서가 수첩을 들고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펼쳤다.

“사빈님이 찾는 혼인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달라진 혼이 있대요.”

“혼이 달라져요?”


“아···, 혼이 달라진 게 아니고, 혼을 둘러싼 기운? 안개 같다던데···?”

은서가 수첩 한 장을 넘겼다.


“맞아요. 안개.”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혼이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도 정령과도, 이귀와도 말하지 않았대요. 매달린 채 머무는 혼이었어요.”


“붙박이 혼인가?”

붙박이 혼이나 지박령이면 묶인 땅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런 종류는 아닐 거예요.”

은서가 수첩 사이 빈 종이를 꺼냈다.


“정령들이 깨워도 꼼짝도 안 했대요. 꼬치처럼 먼지와 안개를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은서가 모여앉은 문지기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부터 안개에 모양이 생겼대요.”

“어떤 모양인데요?”


그녀가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늘고 긴 꽃잎이 여섯 개, 꽃잎 사이로 가느다란 술이 네 개 솟아있대요. 이파리는 없고 줄기만 길어요.”


그녀의 그림을 꽃으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설명은 확실했다. 그것은 어리화였다.


은서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갸웃거렸다.

“이게 아닌가?”


나는 소매를 걷어 손목의 어리화 무늬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생겼어요?”


은서가 놀라 소리쳤다.

“맞아요! 이거, 이거예요!”

“어리화 맞아요. 그 혼이 다음 마고예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디예요? 지금 당장 가야해요.”


“예, 예. 거기가 어디냐면···.”

은서가 수첩의 내용을 종이에 옮겨적었다.

“백령성 지하보관실.”


은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아가면 한 시간 안에 닿아요. 이귀들에게 안내하라고 할게요. 이귀는 멀리 못 가니 릴레이 하듯 이어주면 돼요. 이귀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제가 할게요.”

나토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그럼 이귀들에게 알려줘요. 난 나토두를 타고 갈게요.”

“나도 갈 거야. 혼자 보낼 순 없어.”

가온이 내 팔을 잡았다.


“별거 아냐. 혼만 데려오면 돼. 해뜨기 전에 올 수 있어.”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생길 일이 뭐 있어?”


탁자 위 은서의 그림을 바라보던 하륜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 느낌이 안 좋아요.”


하륜에게서 선계의 기운이 불끈 솟았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은서와 바우도 덩달아 숨을 들이마셨다.


“어리화가 나타난 지 한참 지났죠. 그 사이, 마고의 반지가 몇 번이나 내려왔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반응하지 않은 건, 기운이 못 미치거나, 찾기 어렵다는 거예요.”


그의 말은 힘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뭐든 아는 것 같고,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 혼을 둘러싼 안개가 바뀌었다고 했죠? 그 혼이 만들지는 않았을 거고.”

“그래···. 정령과도 말하지 않는 혼이 왜 갑자기 무늬를 만들어?”

가온이 내 팔을 잡고 힘을 주었다.


하륜이 손가락으로 찻잔을 두드렸다.

“갑자기 무늬가 나타난 것도 이상해요. 천계가 불안해진 시점과 너무 잘 맞아요. 천계의 기운을 읽는다는 뜻이죠.”


그는 은서를 불렀다.

“혼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무늬만 생긴 거죠?”

“예. 혼이 깨어났다는 얘기는 없어요.”


“설마···. 이것도 반계의 함정?”

가온이 중얼거렸다.


“반계인지 다른 무언가가 만든 것인지 모르죠.”

하륜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었다. 마고를 찾았다고 좋아했는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그러고 보니 백령성도 이상해요.”

은서가 펜 꼭지를 입술에 대고 깨물었다.


“관광지로 만든다고 해놓고 십 년이 넘도록 개발이 미뤄졌어요. 공사만 시작하면 사고가 생겼대요.”

이번에는 수첩을 보지 않고도 설명을 이어나갔다.


“토사가 무너지고, 폭우에 진입로가 엉망이 되고.”

“지금은 방치되었겠네요?”

가온과 은서가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속에 무언가 있구나.


하륜이 가온의 손을 잡았다.

“가온님도 함께 가요.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불러요.”


가온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한빛돌이 반짝 빛났다.

하륜의 목에도 똑같은 한빛돌이 걸려있었다. 두 개의 한빛돌이 강렬한 후광을 만들어 냈다.


아리인형을 줄 때 가온이 알려줬다. 두 개의 한빛돌이 공명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서로를 찾아간다고.


“한빛돌이 필요한 정도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에요. 사빈님.”

은서가 내 귀에 속삭였다.


“차원의 문을 지켜야 해서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어요. 바우가 낮에 지키고, 제가 밤에 지키면 되지만, 저희는 힘이 약해서 혼자는 못 있거든요. 하륜님이 꼭 있어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가온을 찾아가요?”

“분신술을 쓰실 거예요. 선력이 약해지지만, 가온님이 있으니 가능해요.”


백령성에 가서 혼을 데려오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인가.


나토두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빈님, 높쌘과 소슬도 챙겼습니까?”


소년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이런, 어린 천마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네.’


성천을 돌아다니며 수련하는 것과 인간세에서의 싸움은 전혀 다르다.

어젯밤에도 심지아가 뛰어난 주술사였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지, 인간세의 싸움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얼마나 처절하고 참혹한지, 순진한 나토두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응. 부르면 바로 나올 거야. 뜰안샘 물의 기운은 아직. 그건 천계에서만 부를 수 있나 봐.”

나는 나토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피천귀나 수집가라면 높쌘과 소슬로 싸우면 되고, 다른 것이라면 아움을 쓰면 돼.”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나토두를 안심시켰다.


“왈, 주인님, 어디 가셔라?”

바나가 흰 털을 날리며 바람같이 뛰어왔다. 모험에 빠질 바자가 아니지.


“화났다며? 너도 가려고?”

“주인님을 지킬 거라. 왈. 주인님은 째째해도, 나는 마음이 넓어라. 변신술이 필요할 거여라.”


떠날 준비가 되었다.

은서가 이귀를 불러냈다. 할 일을 알려주는 동안 나토두는 천마로 모양을 바꾸었다.


*


백령성은 성터만 남은 유적이었다. 출입금지 표시가 여러 군데 걸려있었다.

산사태로 무너진 입구와 방치된 돌 더미를 지나 산 위까지 올라갔다.


무너진 성벽이 조금씩 남아있어 과거에는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서 보니 산세도 좋고, 어둠 속에서도 사방이 내려다보였다.


“다행히 수집가는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라 걱정했는데.”

“음. 이쪽도 이상 없음.”

가온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지하보관실이라고 했지?”

지하실이든 창고든 그런 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이 없으니, 공간을 열어야지. 정령과 이귀가 다닌 구멍이 있을 거야.”

가온은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 틈이란 틈은 모두 기웃거렸다.


이천 년은 살았을 법한 나무둥치에 서자 가온이 소리쳤다.

“사빈! 여기야. 아래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어.”


나무뿌리 사이로 깊이 뚫린 구멍이 보였다. 흙이 덮여 보이지 않지만, 생쥐 정도라면 다닐 수 있는 통로였다.


정령이 드나든 자리에는 정령의 기운이 남는다. 그 기운에 천사와 마고의 천력을 더하면 공간을 열 수 있다.


“바로 들어가자.”

가온이 손으로 허공으로 휘저었다. 나도 손을 잡고 함께 허공의 문을 열었다.


*


지하보관실은 오래전, 성이 지어졌을 무렵에 쓰던 창고였다.

엉성하게 세워진 나무 벽은 거의 썩어있었다. 창고 안의 물건도 거의 썩어버렸고, 보석이나 장신구만 부서진 상자에 남아있었다.


“이야, 우리 보물 사냥꾼 같아.”

가온이 휘파람을 불었다.

“길 잃은 물건이 있나? 주인을 찾는 물건이···.”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없군.”


“왈, 주인님, 이거 우리 거여라? 산적 사 먹을 거여라?”

“그건 건드리지 마.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낼 거야. 우리는 다음 마고를 찾으러 왔어.”

“히잉.”

바나는 풀이 죽어 귀를 축 늘어뜨렸다.


“사빈님, 여기 문이 있어요.”

나토두가 벽처럼 보이는 판자를 두드렸다. 나무판은 끼긱거리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먼지가 가라앉자 좁은 복도가 보였다. 복도의 양쪽 끝도 흙과 바위에 짓눌려 무너졌다.


“우리가 들어온 곳이 숨은 방이었네. 밀실에서 거꾸로 나왔구나.”

가온이 켁켁 기침을 했다.


복도 중간쯤 벽에 혼 하나가 붙어있었다.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고, 언제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 주위로 먼지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내 손목의 어리화와 똑같은 모양을 그리며 흐물거렸다.


그 앞에 서니 손목의 어리화가 세차게 찌릿거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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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7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1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5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3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7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7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2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5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0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4 3 11쪽
»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2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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