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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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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6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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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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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DUMMY

아날빛숨의 아롱재에 다다랐을 때, 사빈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눈도 반쯤 감겨있었다.

문도 못 열고 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바나는 사빈의 발치에서 계속 맴돌았다.

“주인님, 진짜여라? 한얼님이 다시 오셔라?”


“그럴 거야.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잉걸둥지는 잉걸둥지가 아니야.”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졸려. 쓰러지겠어.”

사빈은 비틀거리다 자기 발에 걸려 휘청거렸다.


나토두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롱재 문을 바라보던 나토두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사빈님, 아롱재 기운이 전과 다릅니다.”


“뭐?”

사빈도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기운을 읽었다. 확실히 그믐 전과 달라졌다. 향기도 나는 것 같고.


“이거 라온향인데?”

벌컥 문을 열었다.


창가에 싱싱한 나무가 하얗게 빛났다. 윤기가 흐르는 껍질에 가지에는 푸른 싹이 돋아났다.


붉은 구름 덩어리도 구슬이 되어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다섯 개의 붉은 구슬은 숨꼭지가 사르락대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아래위로, 옆으로 몸을 흔들었다.


사빈은 하얀 나무를 보는 순간, 그것이 갈 곳을 알아보았다.

“이제 돌아갈 때야. 주인에게 갖다줘야지.”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응. 확실해졌어.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러게요. 분명히 비쩍 마른 나무였는데.”


“이 구슬은 뭔지 모르지만, 나무의 주인은 알고 있을 거야. 내일 당장 출발하자.”

“내일요? 설마 저도 가는 건가요?”

나토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빈이 입을 삐죽거렸다.

“음···. 신물도 검은 장벽에 닿으면 안 되겠지?”

“그럼요. 전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사빈은 나토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나한테 딱 붙어있으면 돼. 우리에겐 라온나무도 있다고.”


나토두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고개를 돌리고는 눈썹을 실룩였다.


사빈은 바나에게 손을 뻗었다.

“너도 갈 거지?”

“왈, 당연하여라. 가보고 싶었어라.”


“너도 나한테 딱 붙어있어.”

“걱정 마시어라. 사람이 가는 곳은 다 갈 수 있어라.”

바나는 혼찌꺼기로 만들었으니 반계의 장벽이 문제 될 리 없었다.


그래도 사빈은 자신이 나토두와 바나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나무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대감도 찾아야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몇 가지 준비해서 바로 떠나자.”

“준비요?”


“응. 드리고 싶은 게 있거든. 강녕액도 담고. 아날빛숨의 차도 종류별로 가져가야지.”

“지금 소풍 가십니까?”


“싸우러 가는 건 아니잖아?”

사빈은 씨익 웃었다.


“이루님은 백하 대감이 어디 있는지 아실 거야. 불천수로 나오라고 한 이유도 알고 싶어. 무슨 부탁을 하실 것 같은데···.”


사빈은 무슨 차를 준비할지 허공에 글자를 써나갔다.

그런 사빈을 보며 나토두는 싱긋 미소 지었다.


*


사빈과 나토두, 바나는 배웅문 밖 벼랑 끝에 올라섰다. 불천수 너머 지평선 위로 검은 구름이 꿈틀대고 있었다.


“왈왈, 그믐이 아닌데 나갈 수 있어라?”

“마음숲의 혼이 모두 잠들었잖아. 도우미 혼까지. 아무 때나 나갈 수 있어.”

“그런 거여라?”


나토두가 천마로 모습을 바꾸었다. 연회색 갈기와 날개가 햇살에 빛을 뿜었다.


“마음숲 혼은 언제 깨어납니까?”

“사흘 안에 연락 없으면 해담님이 깨우기로 했어. 너무 오래 재울 수 없으니까.”

사흘···. 살아서 돌아가지 못해도 적어도 빛글이나 깃털구름은 보낼 수 있겠지.


“준비된 거죠?”

“응.”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녕액 항아리와 차 꾸러미 세 개를 아롱재로 옮겨 놓았다. 그곳에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었다.


라온나무와 붉은 구슬은 그녀의 숨결에 넣었다.

얼음칼 아움이나 지팡이 높쌘, 유리공 소슬처럼 부르면 곧바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왕왕, 주인님. 한얼님도 반계로 가셨어라?”

“아니. 다른 곳이야. 분명 그들이 데려갔을 거야.”


“거기가 어디여라?”

“응. 몰라도 돼.”

사빈은 바나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사빈과 바나가 등에 올라앉자 나토두가 날개를 펄럭였다.

“어디로 가야죠? 반계의 지리를 아십니까?”


“아니. 몰라. 하지만, 라온나무가 있잖아. 길을 찾을 필요 없어.”

사빈는 숨을 쉬고 뱉으며 나무의 신호를 읽었다. 주인을 찾아가려는 나무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검은 장벽을 넘으면 곧바로 라온성으로 찾아갈 거래.”

“알겠습니다.”


나토두가 검은 장벽을 향해 날아올랐다.


*


검은 구름을 뚫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눈앞에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중앙황천의 다움성 만큼이나 넓고 높은 하얀 나무였다.


“라온성이야!”


동명의 결계에 있는 신령수와 비슷했다. 커다란 나무에 층층이 창문이 뚫려있고, 은은하게 라온향이 배어 나왔다.


라온성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녀가 사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몸집이 커서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안남존 이루였다.


검은 장벽의 침입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마중 나온 것이다.


“드디어, 너를 보는구나.”

이루는 반갑게 손님을 맞았지만, 사빈은 그녀가 자신이 아는 이루가 맞는지 의아했다.


시간의 덫에서 본 이루와 어딘가 달랐다. 그때는 동방청제답게 체격이 크고 힘이 넘쳤다.


지금은 속 빈 풍선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윤기 없는 머리카락과 까칠한 피부, 오래 앓은 듯 움푹 팬 눈두덩에 목소리도 생기가 없었다.


그래도 왼쪽 소매가 펄럭이니 이루가 확실했다. 라온나무가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았는가.


“이안남존 이루님을 뵙습니다.”

사빈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루가 까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그런 형식적인 인사를 들으니 소름이 돋는구나. 호호.”


나토두는 날개를 접고 소년의 모습이 되었다. 바나는 그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나는 바짝 긴장하여 털을 곤두세웠지만, 나토두는 놀러 나온 아이처럼 라온성을 두리번거렸다.


사빈이 이루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무언가 사빈의 팔과 다리를 잡아당겼다.

돌아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돌리자 다시 잡아당겼다. 그녀를 따라온 라온나무가 주인을 찾으려고 움직인 것이다.

‘알았어. 빨리 주인에게 돌아가고 싶구나.’


“이루님, 드릴 것이 있어요.”

“내게 말이냐?”

이루도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섰다.


사빈이 숨을 들이마시며 몸 안의 천력을 끌어냈다. 내뱉는 숨을 타고 하얀 나무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나무는 숨결의 공간에서 그들의 눈앞으로 옮겨왔다.


하얀 나무는 가지를 흔들며 허공에 똑바로 섰다. 아롱재에 있을 때는 커 보였는데, 이루 앞에 서니 어린나무처럼 작아 보였다.


이루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눈도 커졌다.

“이, 이건···. 나의···.”

“주인을 찾고 싶다고 했어요. 이루님의 나무 맞지요?”


“아니, 이건··· 나무가 아니라···.”

이루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주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하얀 나무는 가지를 흔들었다. 기뻐서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빛을 뿜어냈다.


빛이 점점 강해졌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밝은 빛이 느껴졌다.

환한 빛이 주위를 덮었다. 사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손을 뗐다. 실눈을 뜨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따가운 빛이 사라졌다. 빛과 함께 하얀 나무도 사라졌다.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껍데기뿐이던 이루가 완전히 달라졌다. 신제의 위엄과 강인함이 깃든 모습이었다. 왼쪽 소매도 펄럭이지 않았다.


“이루님?”

사빈은 갑자기 달라진 이루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루가 왼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돌아왔구나. 살아있었어.”


*


라온성의 연회실은 혜존각의 고운방과 비슷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깥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성을 중심으로 하얀 나무들이 싱싱한 숲을 이루었다. 숲을 지나면 초록과 연두의 들판이 펼쳐졌다.


상생농장보다 몇 배 넓은 들판에 열매가 가득 매달려있었다. 들판 너머의 지평선은 황톳빛 황무지였다.


연회실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도우미들로 북적거렸다. 이루가 인간세에서 구해온 길 잃은 혼들이었다.


“왈왈, 주인님. 먹을 것이 많을 거여라. 남존님이 기다리라고 했어라.”

바나는 들어오지도 않은 요리에 침부터 흘렸다.


“바나, 넌 정말 어디 가도 굶지는 않을 거야.”

사빈은 바나를 쓰다듬고는 도우미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모두 자기 집이 있고, 마당이랑 텃밭도 있다고 했는데?’


도우미들은 일이 낯선지 실수가 잦았다.

그릇이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서로 부딪치고, 대접에 담을 것을 접시에 담았다가 쏟아내고 다시 담았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쉬지 않고 웃음을 쏟아냈다.

실수했다고 까르르, 접시 테두리에 이가 빠졌다고 까르르. 심지어 국물을 치마에 떨어뜨리고도 재미있다고 손뼉을 쳤다.


‘그래도 즐거워하니 보기 좋네.’

사빈도 분위기에 물들어 마음이 들떴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우미들을 지켜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사빈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예슬!”


예슬은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사빈을 보고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고 달려왔다.

“사빈님? 어쩐 일이세요?”


그녀는 사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 맞는데···?”


“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왜 여기서 일해? 그 오두막은?”

“그게···.”

예슬이 목소리를 낮췄다.


“귀사님들이 이상해졌어요. 난폭하고 무서워졌어요. 이상한 사람들 말만 듣고.”

“영혼수집가들?”


“예! 맞아요. 수집가가 나타나면 귀사님들이 집도 부수고, 마당도 파헤쳤어요. 끌려간 혼도 있어요.”

예슬은 진저리쳤다.


“이루님이 서남쪽의 혼들은 모두 라온성으로 오라고 했어요. 여기서 지내라고요.”

“나윤은? 나윤도 왔어?”

“헤에, 나윤은 마눙님에게로 갔죠. 천하원이요.”


사빈은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랐다.

“이루님과 마눙님이 계신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이루님이 많이 아프세요. 엄청나게 많이요.”

예슬은 안타까워하며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사빈은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그래서 수집가들의 힘이 세졌구나. 피천귀들을 조종하고. 혼알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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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5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8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9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5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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