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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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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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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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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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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믐_마물의 단서

DUMMY

유연한의 작업실은 은서가 일하는 짱짱 만화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이귀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은서의 설명대로 초고리 편의점도 쉽게 찾았고,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 철문도 금방 알아보았다.


나토두는 내 뒤에 딱 붙어 따라왔다.


이귀를 만난 적은 있어도 인간세를 자세히 보지 못했나 보다. 놀이터를 지날 때도, 표지판을 읽을 때도 신기해하며 두리번거렸다.


바나는 따라오지 않았다. 파라다이스 빌라에 왔으니 삽살이와 참새와 같이 다닌다.


어젯밤, 빌라에 도착하자마자 바나는 통통거리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주인님은 나토두 형님이 지킬 거여라. 왈, 조사할 것이 많아라.’


나는 전단지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철문을 두드렸다.

“유연한씨 계세요? 심지아님의 부탁으로 왔는데요.”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예상대로 벌겋게 부은 눈을 끔뻑거렸다.


“심지아님이요···?”

유연한은 말하면서도 울먹거렸다.

마른 몸집에 키만 커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다.


그래도 수명환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위로가 필요한 정도.


“용감한 시민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면서요? 눈물도 많으시네요.”

나는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으며 농담을 건넸다. 반지에서 따뜻한 기운이 나와 그에게 흘러갔다.


“제가 아니고 심지아님이 한 일이죠.”

그는 입술을 내밀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작업실이라고 해서 무슨 작업인가 궁금했는데,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원룸 구석에 침대도 있고 살림살이도 있었다. 살면서 그림도 그리는 집인가 보다.


“심지아님이 인사 전해 달랐어요. 어디로 갈지 알고 있을 거라면서.”

나는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림이 따뜻하고 평안해서 유연한의 성정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유연한씨에게 특별히 전해달라는 말은요.”

나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신의 힘을 믿으라고요.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만도 훌륭하다고.”


유연한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렇게 가는 게 어디 있답니까? 어떻게 그렇게···.”


그를 위로하는 일은 마고의 반지에게 맡기고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심지아의 수첩을 찾는 일.


저녁에는 가온과 함께 장례식장에 가기로 했으니 그 전에 찾아야 했다.


“마물에 대한 기록이 있나요? 지새늬가 적어놓은 거요.”

책상 위는 그림과 종이가 지저분하게 쌓여있었다. 저기서 뭘 찾으려면 꼬박 이틀은 걸릴 것이다.


“마물요?”

유연한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나토두는 벽에 걸린 괴물 그림을 가리켰다.

“이게 마물인가요?”


나토두는 신기해하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오! 와! 감탄사를 내뱉으며 스케치북도 뒤적이고 벽에 붙은 쪽지도 들추었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저렇게 좋아하다니···.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유연한은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심지아님도 직접 보지는 못했대요. 수집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죠. 소멸시킬 방법은 못 찾겠다고··· 안타까워했어요.”


그는 작은 수첩을 하나 내밀었다. 표지에 작은 글씨로 ‘요마전쟁의 진실’이라고 적혀있었다.


순간 찌리릿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요마전쟁···?’


“작품 설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런 줄 알거든요. 보세요.”

유연한이 수첩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겼다. 순서대로 적혀있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위대한 신제가 세 마리의 요귀 마왕을 소멸시키고 감여지를 세웠다. 미처 소멸하지 못한 조각 몇 개가 세상으로 떨어졌다.’


‘요귀 조각이 힘을 얻으면 마물이 된다. 마물은 자기들끼리 다투어 약한 쪽의 힘을 모두 가져간다. 싸움에 지면 이긴 쪽으로 흡수되어 존재가 사라진다.’


‘마물의 힘을 얻으면 이곳이 우리 세상이 될 거다. 신제가 만든 감여지보다 더 많은 반인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이 있는 한 우리도 영원하다.’


‘마물들끼리 싸울 때 사람의 세상은 전쟁터가 된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다. 실체를 알 수 없어 요마전쟁이라 부른다.’


숨이 턱 막혔다.

전쟁터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죽어가던 사람들, 피비린내와 신음. 마지막까지 내 손을 놓지 않던 어머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물이 일으킨 거였어? 마물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괜찮으세요?”

유연한이 다가와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예. 괜찮아요.”

“심지아님이 그랬어요. 어디 숨었는지 모르지만, 곧 깨어날 것 같다고요. 그래서 열심히 찾았는데··· 결국···.”


나는 수첩을 덮었다.

천사나 선사도 여기 살지만, 그들은 마물을 보지 못한다. 인간세의 일에 개입할 수 없으니 마물이 사람과 거래한다면 맞서 싸울 수도 없다.


유연한은 자신이 그린 괴물 그림을 보여주었다.

“아직 모습을 갖지 못했대요. 이건, 심지아님과 상의하면서 그린 건데요.”


나는 기괴하게 생긴 괴물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상상하는 모양이 될 거예요. 공포와 두려움을 입으니까요.”


중천의 비뢰수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과 공명하며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심지아님이 이런 말도 했어요. 피천귀의 힘으로 수집가를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피천귀와 수집가의 힘을 한번에 이용하면 마물도 소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유연한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


나는 나토두와 함께 말없이 가로수길을 따라 걸었다.

가온과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거기까지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바나가 가온을 따라온다고 했으니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은 지금뿐이다. 그동안 여러 번 내려왔어도 장례식장은 처음이니 보고 싶겠지.


‘가온님, 장례식장에는 먹을 것이 있어라?’

그것이 바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저녁을 먹을 수 있어.’

가온의 대답에 바나는 곧바로 가온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조용히 걸을 수 있는 시간은 바나가 없는 지금뿐이다.


머릿속은 요마전쟁으로 가득 찼다.

나와 어머니에게 닥쳤던 시련들, 마음숲에서 벌어질 일들, 생각은 하염없이 요동쳤다.


“사빈님, 인간세에서는 날지 못하세요?”

나토두의 목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의 생각이 와르르 주저앉았다.


아, 이 아이는 그믐 외출이 처음이지?

알려줄 것이 많구나. 앞으로도 함께 다녀야 한다면 가르칠 것도 많았다.


“응. 나는 중간자라서. 여기서는 날지 못해.”

“영감과 바람잡이는 뭐예요?”


“이 땅에서 살던 지박령들. 사람이 생겨나기 전부터 여기 살았어.”

나는 거리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영감들만이 아는 소식도 있거든. 지금은··· 안 되고, 다음에는 불러야지. 엄청 시끄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마도 나무 위나 전깃줄, 건물 사이에서 내 휘파람을 기다릴지 모른다.


심심하다며 늘 재미있는 일을 기다리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나토두는 한동안 조용히 걷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집가 말이에요.”


“응. 수집가가 왜?”

“수집가도 사람이니 그 혼도 삼도천을 건너나요?”


“아니. 그들은 스스로 계약을 하고 자신의 혼을 넘겼어. 그래서 씻김이 불가능해. 소멸하거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것이 가슴 속에서 뭉클거렸다.


“소멸···하거나요?”

나토두가 한 글자씩 천천히 물었다.


“반계에서 불러들여서 검은 장벽의 일부로 만들기도 하고.”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꾸물꾸물 올라왔다.


반계에서는 수명이 끝난 혼들을 장벽으로 삼아 더 강한 결계를 만들잖아.


‘그렇다면, 마음숲의 결계도 될 수 있어. 반계의 장벽이 강해진다면, 천계의 결계도 강해질 수 있잖아?’

마음숲이나 중천의 결계도 될 수 있다. 혼이 아니라 혼의 기운을 쓰는 거니까.


피천귀와 수집가를 물리치고, 결계도 단단히 세울 방법.

‘내가 가진 것을 제대로 쓰기만 하면 돼!’


높쌘과 소슬, 얼음칼 아움, 온사랑 팔찌와 마고의 반지···.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


장례식장에서 나올 때까지도 은서는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도 무거웠다.


우리가 아는 이는 심지아였고, 정작 지새늬와는 모르는 사이였기에 유가족에게는 소소한 모임의 회원이라고 둘러댔다.

하륜은 차원의 문을 지켜야 하기에 못 나왔다.


“그동안 심지아에게 몸을 빌려줬으니 고마운 사람이야.”

가온이 중얼거리자 은서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원래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나마 심지아 덕분에 이만큼 온 거죠.”

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진으로 보니까 그냥 지새늬였어요. 내가 모르는 지새늬요. 심지아는 가버렸어요.”

은서가 콧물을 크렁크렁거렸다.


“그렇게 가다니···. 인사도 없이···.”

“그만 울어. 머리 아프겠다.”

바우가 은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와 가온, 나토두는 몇 걸음 떨어져 은서와 바우를 기다렸다.


바나는 토라져서 먼저 가버렸다. 소시지 때문이었다.


빈소에서는 투명한 강아지로 내 옆에 앉았다. 반찬으로 나온 소시지를 한 접시 밀어주었다.

‘약속 지켰다. 소시지 많이 먹어.’


바나는 팽 콧소리를 냈다.

‘주인님, 쩨쩨하셔라. 그 소시지는 이 소시지가 아니어라. 왈.’


그러면서도 접시에 있는 반찬을 다 집어 먹었다. 떡이며 전까지 먹어 치우고는 화가 났다며 왈왈 짖고 가버렸다.


이래저래 이번 외출은 심난한 일뿐이구나.


슬퍼하는 은서를 보니 안타까웠다.

“은서님, 심지아는 그리워하던 집으로 갔어요. 잘 갔으니 안심하세요. 푸르니와 야문도 같이 갔어요.”


은서가 눈을 깜빡였다.

“푸르니와 야문도 갔어요?”


“무사와 학자가 따라갔으니 거기서도 즐겁게 지낼 거예요.”

“그렇죠. 그래야죠.”


은서는 손을 번쩍 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자, 아자 소리를 내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데 사빈님, 언제 오셨어요?”

“에? 어제 제가 소식 전했잖아요? 아까 유연한씨에 대해서도 묻고.”


“아, 그랬나요. 정신이 없어서···.”

은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몇 걸음 걷던 그녀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어라···? 사빈님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은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맞아요! 혼!”

그녀는 부리나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상한 혼을 찾았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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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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