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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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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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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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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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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믐_도룡과의 혈투

DUMMY

얇은 종이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었다.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룬 탓에 눈두덩이 무거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지만, 어느 것도 해답이 아니었고, 딱히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을 여니 툇마루에 가온과 하륜 선위가 앉아있었다.

천사와 선사는 다정하게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벌써 이야기를 다 끝냈나 보네.


그나저나 하륜 선위가 정말 과거로 넘어오다니!

‘한빛돌의 위력이 대단하네. 짝을 찾으려고 시공간을 뛰어넘는구나.’


“일어났어?”

가온이 꿀물 한 대접을 내밀었다.


나는 대접을 받으면서 하륜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위님, 드디어 오셨군요.”


“그믐밤의 손님이라면 당연히 와야죠.”

하륜의 미소는 폭포처럼 상쾌했다.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툇마루 구석에서 바나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밤새 돌아다녔구나.


나토두의 신발은 디딤돌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토두는 자고 있어?”


가온은 맞은편 작은방을 가리켰다.

“음. 아직 어리잖아? 잠이 많을 때야.”

아무리 어려도 신물인데, 사람의 아이처럼 대하다니.


하륜은 가만히 안채를 바라보았다.

슬아는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바느질 일감이 밀렸다고 하더니 밤을 새웠나.


하륜이 기둥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댔다.

“가온님, 슬아에게는 얘기했나요?”

“아뇨. 아직···.”


“슬아를 데리고 가려면 빨리 알리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사빈님.”

하륜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마지막 남은 꿀물을 삼키다가 켁켁 사레에 걸렸다. 기침을 해대자 가온이 등을 쓸어주었다.

“하하, 뭘 그리 놀라? 선위님이라 긴장했구나?”


“어제 일은 들었어요. 도룡과 싸웠다고요.”

“예. 그 진흙 덩어리가 세 개로 나뉘는 바람에 우리도 흩어졌어요.”


“도룡이 요마전쟁을 일으켰으니. 사빈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하륜이 내게로 돌아앉았다.


“자신이 마고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믐 외출로 나왔으니,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마고의 일만 생각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내가 일으킨 분노로 마물 도룡이 힘을 얻었다.

“예. 어제는 정말···. 화를 참지 못하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오늘은 더 조심하세요.”

하륜이 손을 까딱였다. 모이라는 신호였다.


나는 가온과 하륜에게로 가까이 움직였다. 가온과는 머리가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분신술로 나왔기에 선력을 다 쓸 수 없어요. 도룡과 미지를 나눠서 맡아야 해요.”

하륜의 말에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도 악마일 때는 마물만큼 귀력이 강할 거야. 하륜님과 내가 미지를 맡을게. 그믐밤의 손님이니 소원을 들어줘야지.”


“미지를 요정으로 돌릴 수 있어?”

인간세의 주술은 주술사가 죽으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천선계와 반계의 주술은 그렇지 않다.

도룡이 소멸하면 악마인 채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풀어줘야 한다.


“아직은 모르지만,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천력이 부족해도, 하륜님과 함께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문제는 너야.”


가온이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토두와 바나를 데려가. 도룡과 만나기 전에 높쌘과 소슬을 쓰는 법도 알아내고.”


겨우 며칠 전에 얻은 높쌘과 소슬을 어떻게 마음대로 사용하지? 얼음칼 아움에도 휘둘리는 내가?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지.

‘나는 마고니까. 마고 사빈이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소멸시킬 거야. 가루도 남지 않도록!”

“좋아. 할 수 있어.”


높쌘과 소슬을 제대로 사용해야지. 심지아가 알려준 주문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심지아는 지팡이 높쌘을 쓰기 전에 이렇게 외웠다.

‘나의 빛은 너희를 붙잡는 그물이 되리라. 나의 숨은 너희를 소멸시키는 칼이 되리라.’


소슬은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먼저 움직였다. 그때는 내 마음이 절실했으니까.


‘주문 자체에는 힘이 없어요. 집중하기 위한 방편이죠. 주문이 달라져도 상관없어요.’


‘어떻게 하고 싶은지 확실하고 선명하게 그려요.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믿는 거예요.’

나를 믿는다. 내 힘을 믿는다.


‘얼음칼 아움은···.’

지금은 아움에 휘둘리지만, 돌아가면 백하 대감에게 배워야지.


백하를 생각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제는 얼음대장이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에 돌아가면 대답할 거야. 앞으로도 곁에 있어달라고.’


*


슬아는 장미산으로 향하는 내내 파리한 낯빛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마림은 괜찮을까요?”


“죽지는 않았겠죠? 어떻게···, 악마가 오다니···.”

슬아는 중얼거리며 손을 꼭 쥐었다.


“왜 하필 마림에게···. 그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은 없는데···.”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걸었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혀 괜찮지 않은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백슬곤아의 혼이 백령성에 묶인 것이 현재이니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은데.


말하기 좋아하는 바나도 할 말이 없는지 끼깅 소리만 냈다.


슬아를 따라 걷던 나토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슬아 누님,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혼빛이 자랄 겁니다.”


하륜이 나토두를 돌아보았다. 그는 알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는 아는지 몰라도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뭘 하려고?’


하륜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연분홍빛 꽃가루가 피어났다.


바람을 타고 슬아를 향해 날아왔다. 꽃가루는 슬아의 코와 귀, 살갗에 스며들었다.

슬아가 눈물을 멈추었다.

“마림을 도와야 해요. 저도 돕겠어요.”


나는 하륜의 주술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지금은 마음을 다잡고 씩씩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잠들 것이다.


그녀가 깨어나면 이미 싸움은 끝나고, 마림은 죽어가겠지. 연인의 마지막을 지키게 하려고 여기까지 건너왔으니까.


그러려면 마물 도룡을 소멸시키고, 그가 삼킨 마림을 온전하게 꺼내야 했다. 숨이 붙어있는 상태로.


산길을 돌아서니 검은 그림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보다 거대해진 진흙 덩어리가 다가왔다.


*


순수한 혼, 마림을 품어서인지 도룡은 훨씬 강했다.

“흐흐, 겁대가리 없는 녀석들! 이번에는 남김없이 삼켜버리겠다!”


진흙 덩어리 한쪽은 나토두와 바나에게 달려들었다.

나토두도 남방홍천의 신물이니 바나와 함께라면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아움! 높쌘!”

나는 얼음칼 아움과 지팡이 높쌘을 동시에 불러냈다.


어제처럼 그 둘이 함께 방어막을 만들 거라 기대했는데, 아움은 오른손에 들어와 잡혔고, 높쌘은 왼손에 들어왔다.


‘어쩌라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도룡이 달려들었다.

나는 아움을 치켜들고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아움을 따라 팔과 다리를 움직였지만, 차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움은 상대가 강할수록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덕분에 내 몸은 이리저리 휘둘리다 아움을 놓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을 뒹굴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움은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 애송이! 천력도 부족하고, 술법도 부족하구나. 어쨌든 내 기운은 찾아가겠다!”

도룡이 몸을 쿨럭거렸다.


“내 것을 찾고 네가 숨긴 기운도 가져야지. 크큭.”

도룡의 진흙 몸이 장막처럼 넓게 퍼졌다.


나는 높쌘을 지지대 삼아 뒤로 물러났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비켜 들었다. 햇빛이 진흙 막에 닿자 황톳빛과 검은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사이로 더 짙은 덩어리가 보였다. 진흙 속에서 작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마물 조각!’


마물의 정수만 없앤다면 진흙 덩어리를 상대로 싸울 이유가 없다. 그것은 마물 조각이 기생한 사물에 불과하니까.


‘아움! 도룡의 정수를 정확히 찔러. 내가 주문을 끝내면 바로 공격해.’


아움이 나의 전언을 알아듣고 공기를 떨며 우웅 소리를 냈다.

좋아, 이제부터는 아움을 생각으로 조종하겠어.


나는 높쌘을 받쳐 들고 도룡을 노려보았다. 지팡이에 마고의 포박술을 더하는 거야.


“나의 빛은 너희를 붙잡는 그물이 되리라. 나의 숨은 너희를 소멸시키는 칼이 되리라.”

지팡이 높쌘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마고의 반지에서도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높쌘을 타고 뜨거운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그 순간 아움이 도룡의 정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움이 정수를 뚫었고, 빛의 그물도 마물 도룡을 덮쳤다.


“크아악!”

도룡이 몸부림쳤다.


나토두와 바나를 상대하던 다른 진흙 덩어리가 내 쪽으로 펄쩍 뛰어들었다.


“소슬!”

나는 유리공 소슬을 불렀다.


어제처럼 수많은 줄기가 나와 도룡을 삼킬 줄 알았는데, 유리공은 반찍 빛을 낼 뿐 그대로였다.


“삼켜라!”

내가 소리쳐도 소슬은 묵묵부답이었다.


‘뭐야? 왜 이래?’

마음이 급해졌다.

진흙 덩어리가 바짝 다가왔다. 손과 발이 파르르 떨렸다.


“어둠으로 빚어진 영이여, 너희가 원하는 힘을 주마, 저 힘은 너희 것이다!”


심지아가 알려준 대로 주문을 외웠지만, 소슬에서는 잠깐 빛이 지나갈 뿐 기운을 빨아들이지도, 수십 개의 촉수가 나오지도 않았다.


‘어, 어떻게 하지?’


나뉘었던 진흙 덩어리가 다시 합쳐지면서 빛의 그물이 풀리기 시작했다. 마고의 포박술도 희미해졌다.


“사빈님! 소슬이 품기에는 마물의 힘이 너무 커요.”

나토두가 소리쳤다.


나는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치며 나토두를 돌아보았다.

‘어제 소슬이 흡수한 것은 정수가 없는 쪽이었구나. 어쩌지?’


나토두와 눈이 마주치자 어젯밤 그가 한 말이 기억났다.

‘사빈님은 마물이 되지 않았잖아요? 그 기운만 흡수한 겁니다.’


‘중간자가 되느라 마물의 기운도 가졌지만, 내 안에서는 마물이 살지 못했어. 그럼 내가···?’

생각이 또렷해졌다. 머릿속이 개운했다.


‘마물의 힘을 다른 힘으로 바꾸는 거야.’

내가 저 힘을 삼키면 돼. 마물은 소멸시키고, 힘만 갖는 거야.

그 힘으로 다른 마물까지 소멸시킬 거야. 세상의 모든 마물을!


‘소슬! 정수의 기운은 내가 삼킬 테니, 나머지 기운은 네가 빨아들여.’

유리공 소슬이 손바닥 위에서 꿈틀댔다.


빛의 그물은 희미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믿어, 내 힘을 믿어.”


오른손에 소슬을 들고 왼손은 도룡을 향해 뻗었다. 손목의 온사랑 팔찌가 사락거렸다.


천력을 끌어내자 팔찌의 구슬에서도 빛이 났다. 검은돌과 흰돌에서 나온 빛이 나의 천력에 더해졌다.


“너는 내게로 와 나의 힘이 되어라!”


마고의 천력을 쏟아내자 그물을 따라 빛이 날카롭게 번져나갔다.

빛 그물에 닿자 진흙 덩어리가 갈라지고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마물의 정수가 얼음칼이 박힌 채 진흙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움은 허공에서 칼끝을 돌려 박힌 조각을 내게 던졌다.


날아오는 조각을 향해 손을 펼쳤다. 마물의 정수가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다른 기운은 소슬에게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운이 넘쳤다. 눈과 귀, 온몸의 감각이 더 밝아졌다. 그러나 숨을 한 번 고르자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진흙 덩어리가 깨지며 그 속에서 피투성이 마림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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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5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5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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