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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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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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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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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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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DUMMY

한요재의 훈련장에서는 우렁찬 기합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황금들을 지켜냈고, 마음숲의 결계도 단단해졌다. 숲센장벽에 숨겨진 혼알방도 모두 찾았으니 대원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운와와 부루는 대원들을 지켜보다가도 백하가 누워있는 감수실을 돌아보았다.

상산대감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깨어나려나?”

“그라게. 툭 털고 일어나면 좀 좋아?”

부루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감수실을 바라보았다.


감수실에도 은은한 빛이 비쳐들었다. 차미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백하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서서 혀를 끌끌 찼다.

“여태 안 일어나시네. 얼마나 더 주무시려고?”


“으음···.”

백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대감! 정신이 들어요?”

차미가 그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뭐가 이렇게 억세···.”

백하는 누워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통증이 가라앉자,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빈···. 사빈님은?”


“사빈님요? 벌써 중천으로 갔죠.”

“중천? 나, 나를 살리려다가···.”

백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암연층에 갇혔을 때, 사빈의 손길로 깨어났다. 그녀의 입술, 그녀의 체온과 숨결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끝없는 어둠에서 나올 수 있던 것도 사빈이 있어서였다.


“왜···, 왜 낙원이 아니고 중천이오. 몸을 버릴 거면 낙원으로 갔어야지.”

그는 사빈이 죽어서 혼만 남았다고 알아들었다.

중간자의 몸으로는 중천도, 낙원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몸을 버려야 들어갈 수 있다.


“사빈님이라면 곧장 염라부로 가겠지. 영천옥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볼 수 없어.”


차미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장난기가 올라왔다.

“그러게요. 다음 마고를 데려다 놓고는 픽 쓰러졌지 뭡니까?”


그녀는 백하를 흘끔거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아, 새로운 마고는 온봄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어디서 과외라도 받았는지 적응이 빨라요. 벌써 그믐 외출도 나갔다 왔어요. 수명환은 성공 못 했지만.”

차미는 신이 나서 새 마고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백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니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녀는 모른 척 이야기를 계속했다.

“빨리 새 마고와 인사해야죠. 상산대를 계속 맡으신다면 말이죠.”


“흥, 자네는 상산대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예. 저는 중천으로 갈 겁니다. 황제님도 허락하셨고요.”


백하가 어리둥절하여 차미를 올려다보았다. 상산대를 그만둔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당연히! 사빈님을 도와야죠. 아하하.”

차미는 그제야 소리 높여 웃었다.


“임천사령 고마 사빈이 되었거든요. 황제님이 열린마을을 위해 정혜부를 만드셨어요. 전 정혜부 보위입니다.”


차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빈님을 지키기에 저만한 차사가 없지 않나요?”


“무슨!”

백하가 벌떡 일어났다. 뻐근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졌다.


“사빈님은 내가 지켜야지.”

백하가 벌컥 열고 문을 복도로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뒤에 남은 차미가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정혜부사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대감, 아니 부사님!”


*


중천의 아름누리는 삼 층 짜리 아담한 찻집이었다.

돌과 나무로 쌓은 오두막인데, 그 위에 흙을 덧발라 언뜻 보면 작은 언덕처럼 보였다.


일 층과 이 층이 찻집이고 삼 층은 옥상정원과 숙소인 고아당이었다.


찻집 바로 옆에는 라온나무가 자리 잡았다.

물이 부족해도 하얀 기둥은 윤기가 흘렀고, 가지마다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어떤 가지는 노랗고 붉은 봉우리까지 맺었다.


고아당에는 방이 세 개였다.

하나는 사빈과 바나, 하나는 나토두, 하나는 손님을 위한 방이었다. 콕 집어 말한다면 예사달과 다훤을 위한 방이었다.


처음 중천에서 찾아낸 샘이 그곳에 있었다. 사빈이 오기 전에 다훤과 예사달이 샘을 넓히고 아름누리까지 지어놓았다.


사빈은 일찌감치 일어나 텃밭에 씨앗과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긔니초는 중천에 들어온 첫날 심었기에 지금은 싱그럽게 자리 잡았다. 이십여 뿌리만 가져왔는데, 벌써 많이 늘어났다.


백하가 숲센장벽까지 가서 찾아온 것이라 더없이 소중한 약초였다.


산뫼와 용발 씨앗도 색이 검게 변해 심을 때가 되었다. 애기별꽃도 옮겨심었다.

미소화, 강인초, 향춘, 개은안도 구역에 맞춰 가지런히 심었다.


“곧 커다란 약초밭이 될 거야. 중천이 깨어나고 있으니.”

사빈이 콧노래를 부르며 씨앗을 심는데 좌보와 우필이 다가왔다.


“여어, 사빈님. 부지런하군.”

“뭔 일을 한댜? 쉬지도 않고.”


“우필님! 좌보님! 어서 오세요.”

사빈은 쪼그리고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명부전 당번이세요?

”이이, 정혜부 보위라도 중천에 오래 못 있응께. 후딱 댕겨야지.“


”반김길을 따라 숨 쉴 통로가 생길 거예요. 나중에는 중천 어디든 돌아다니게 될걸요?“

사빈은 자신 있게 말했다.


”듣기만 해도 좋군.“

우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새로운 차도 마련했어요. 아직 시험 중이지만, 드시러 오세요.“

”아날빛숨 차를 갖다 쓰는 게 아니었나?“


”그건 아날빛숨에서 드시고요. 중천에는 중천의 차가 있어야죠.“

”그런 거여? 그럴싸하구먼. 근디, 천마는 안 보이네. 아주 똑똑해 보이더만.“

좌보가 아름누리를 기웃거렸다.


”북방흑천에요. 다훤님을 도와드리러 갔어요. 중요한 일인가 봐요.“

”이잉? 근디 왜 나토두가? 한얼이···.“

말하다 말고 좌보는 자기 입을 두드렸다.


”에고, 이런 실수를···. 허허.“

좌보는 어색해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라믄, 그 털뭉치는 워디 간겨?“

”팬을 만들러 갔어요.“

”팬?“

”자기를 좋아해 줄 혼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허, 고거 참···. 그것도 혼을 위로하는 방법이군 그래.“

우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털 뭉치가 애교 떠는데 슬퍼할 혼이 어딨겠나.“


”근디, 아까부터 뭔 소리가 들리는디, 안에 누가 있남?“

좌보가 찻집 안을 가리켰다.


”예사달 할머니요. 청소하고 계세요.“

”잉? 예사달님이? 처, 청소?“


”예. 쓸고 닦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수련이라고요.“

”허···. 그렇게 깊은 뜻이. 예사달님 다운 말씀이시군.“

좌보와 우필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빈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 얼마나 더디겠어요?’

아날빛숨에서 찻잎을 다듬던 초연이 생각났다. 작은 통 하나 채우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래도 좋아요. 할머니랑 같이 있으니까. 동녘뜰에 와 있는 기분이에요.’

사빈은 창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흰 머리카락을 보며 생글거렸다.


동녘뜰보다 텁텁하고 삭막해도 할머니와 같이 있으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명부전에 들렀다 나갈 거네. 사빈님, 또 봄세.“

우필이 손을 흔들고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 뒤를 좌보가 부리나케 따라나섰다.


사빈도 손을 흔들다가 왼손 검지에 끼워진 고마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청록색 반지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중앙황제 현원의 눈동자와 같은 빛깔이었다.


*


마고의 반지를 건네자마자 사빈은 나뭇잎처럼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예사당에 누워있었다. 옆에서 예사달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냐?“

”할머니. 여기는···. 예사당이에요?“

”금방 깨어날 줄 알았더니만, 그래, 실컷 잤니?“


”제가 오래 잤나요?“

”그리 오래도 아니야. 온봄이가 그믐 외출을 다녀왔을 정도?“

”온봄?“


”새 마고의 이름이지.“

예사달은 사빈의 손을 어루만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중천에 조그맣게 찻집을 지어놓았단다. 네가 알려준 대로.“

”할머니···.“

사빈은 엎드린 채로 예사달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주 오실 거죠?”

“그럼. 얼마나 잘하는지 보러 가야지.”

“저만 믿으세요. 누구 제자인데요?”


사빈은 예사달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잔별차를 못 드리게 되었어요.”


“괜찮다. 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단다.”

예사달은 사빈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자리 잡을 때까지 나도 가 있을 건데···, 귀찮아하려나?”

“예? 정말요?”

사빈이 벌떡 일어나 예사달의 작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에구구, 쓰러지겠네.”

예사달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웠다.


*


사빈은 텃밭에 앉아 고마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이제부터 너는 임천사령 고마 사빈이다. 이 반지가 고마의 힘을 줄 거다.’

현원이 직접 반지를 끼워주었는데, 아직 별다른 힘을 못 느꼈다.


‘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시간이 지나면 나오려나?’

사빈은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을 털었다.


찻집 아름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작은 오두막이지만, 점점 넓어질 것이다. 중천에도 샘이 솟고, 강이 흐르면서 맑은 호수와 울창한 숲이 들어설 것이다.


‘할머니는 이것까지 알고 계셨나? 그래서 내게 집 짓는 일부터 시키신 거 아냐?’

동녘뜰 사빈재도 그렇게 자리 잡아갔다.

오두막에서 판자집으로, 돌집으로, 조금씩 키우는 일도 행복했다.


예사달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지팡이 대신 긴 빗자루에 의지해 걸었다.


구부정한 어깨와 허리,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살까지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씨앗이 뭐라 그래? 물을 달라고?”

“물은 아니고···. 다른 흙을 좀 가져와야겠어요. 신성한 땅의 흙이나···.”

“인간세에 다녀오려고?”


사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하나···.”


“사빈님!”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하가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왔다. 사빈 앞에 내려서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사빈님! 고맙소, 살아있어서.”


“켁켁, 이, 이것 좀···.”

사빈은 목이 콱 막혀 켁켁거렸다. 사빈이 팔을 두드리자 백하가 한 걸음 물러섰다.


사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엄지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가 나를 살렸소. 생명의 은인이오.”


백하와 사빈이 서로를 아련하게 바라보자 예사달의 눈도 예리하게 빛났다.


예사달은 빗자루 끝으로 땅을 콩콩 내리쳤다.

“이보게들. 여기서 이러면 어쩌나. 나는 안 보이는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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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5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4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7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6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4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5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3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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