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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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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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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9.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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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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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중천_첫 번째 손님

DUMMY

찻집 아름누리는 문을 열었으나 손님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중천의 혼들은 마른호수에서만 맴돌거나 어디든 숨어있었다. 과거를 후회하고 원망하느라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차미는 탁자를 닦다 말고 예사달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예사달 할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다.


차미가 사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것은 청소인가? 수행인가?”

“아무래도 걸음마인 듯 싶네요.”


사빈도 입맛을 다시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도우미를 찾을 때가 되었다. 차가 한 종류라 누구라도 충분히 해낼 것이다.


“빗질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가니 이게 곧 수련이 아니겠니?”

예사달은 주름진 입을 오물거리다가 허리를 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끄응 신음도 섞여 나왔다.


“나보다 백하, 그놈이 더 문제더구먼.”

“대감이 왜요?”

차미가 예사달을 향해 돌아앉았다.


“무슨 정혜부사가 반나절도 못 버티고 헥헥거려? 숨이 꼴까닥 넘어가서는···. 불안해서 맡길 수가 있어야지.”

“저도 그런데요. 공기가 탁해서 가슴이 뻐근하고 아파요. 그런데, 예사달님은 어떻게 버티시나요?”


“오호호, 그야 제자에 대한 사랑 아니겠니?”

예사달은 마음 한 편이 따끔거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빗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런 거라면 정혜부사님도 만만치 않을걸요?”

차미가 내부를 훑어보았다.


“아름누리 근처에만 있으면 저도 이삼일은 버티겠어요. 중천에서 이틀만이라도 버티면 정혜부를 위해 집을 지어주신대요.”


“오호, 훼가 그러더냐?”

“이름도 생각해두셨다죠. 오온재라고.”


사빈이 찻잔과 찻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왔다.

“드셔보세요. 사부랑차예요.”


“드디어 완성이야? 어떻게 배합할까 내내 고민하더니?”

“마라꽃에 개은안과 주리를 섞으니 향도, 맛도 다 좋아졌어요.”


차미는 냄새를 맡고, 한 모금 차를 머금고 맛과 향을 음미했다.

“좋은데? 지샌차와 잔별차를 섞은 것 같기도 하고.”


차미가 반쯤 차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값을 어떻게 매겨? 마음숲에서는 숨꼭지를 내놓잖아?”


“아직 모르겠어요. 마음숲처럼 풍요로운 곳이 아니라서요. 혼이 머무는 시간도 짧거든요. 가끔 붙박이혼도 있지만···.”


사빈도 아름누리를 둘러보았다.

“마음숲은 오래 머무니까 공방이나 학당에 다닐 수 있는데, 여기는···.”


아직 온천도 만들지 못했다. 새론결 온천이라고 이름부터 붙여놓았지만,

반김길 건너 서로바다 근처가 물의 기운이 강한데, 지금은 겨우 옹달샘 정도였다. 새론샘이라고 해야 할까.


작고 초라한 오두막이라, 차를 마시러 여기까지 올 혼은 없을 것이다. 값을 매긴다 한들, 중천의 혼이 뭘 내놓을까.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차미야, 청천과 홍천에서는 소식 없더냐?”

예사달도 차를 홀짝거렸다. 맛을 음미하며 으음,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태우님과 금천님이 즉위하신 대요. 벌써 노래하는 별도 씨앗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우와, 잘 되었네요. 동방청천과 남방홍천도 제 자리를 찾겠지요?”

사빈이 손뼉을 쳤다.


예사달은 싱긋 웃으며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다훤이 천사장이 되면 북방흑천도 예전보다 강해질 거다.”

“예? 아저씨가 천사장이 된다고요?”


“예사달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런 소식은 없었는데?”

차미가 묻자 예사달은 손사래를 쳤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원래 그래야 하는 거고. 나토두도 곧 돌아오겠구나.”


예사달은 아득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는 동녘뜰에 찾아올 손님도 없어지는 건가?’


“다훤 아저씨가 천사장이 되면···. 천사국에 자주 가도 되겠네요? 선아 대천사님도, 담아도 자주 볼 수 있고, 흑천에서만 나는 약초도 얻어올 수 있고요!”

사빈이 들떠서 소리치자 예사달도 덩달아 웃었다.


사빈이 예사달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럼, 할머니, 우리 같이 천사국에도 가요. 매일 여기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호호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예사달은 서글픈 생각은 접어두고 사빈을 따라 마음껏 웃었다.


아름누리의 문이 열리고 바나가 뛰어들었다.

“왕왕! 주인님! 손님이어라!”

“손님?”


바나를 따라 혼 하나가 스멀스멀 기어 왔다.

혼빛이 너무 어두워 알아보기 힘들었다. 오래도록 슬픔에 젖어 덩어리만 남아있었다.


“주인님도 아는 혼이어라. 왈왈! 그때 만났어라. 한얼님이 대장이었을 때여라.”


“화··· 황민?”

사빈이 홀린 듯 일어났다.


혼이 그 이름을 듣고 꿈틀거렸다. 사빈의 기운을 느끼고 움찔거리다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차미가 공격하려 하자 예사달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신···. 진짜 당신이군요. 내가 미치기 전에 만난 사람···.’

혼이 웅얼거렸다.

‘지난번에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찻집에 들어오며 그는 서서히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름누리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변화였다.


젊은 남자의 모습이기는 해도 과거의 황민과는 달랐다.


사빈은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황민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당신을 만났으니···.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음껏 슬퍼하고, 충분히 괴로워했나요?”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기다려요.”

‘누구를 기다립니까?’


“인도자요. 염라부로 데려다줄 거예요. 준비가 되었으니 갈 곳으로 가야죠.”

사빈은 완연히 모습을 찾은 황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첫 손님이니 공짜로 드릴게요.”

사빈은 발걸음도 가볍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황민은 아름누리를 둘러보았다. 혼빛에 남아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새로운 삶을 살아야죠.’

‘슬퍼하십시오. 그 슬픔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저를 다시 만날 때까지만 슬퍼하십시오.’


오래전, 어느 주술사가 한 말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녀가.


사부랑차를 마시며 황민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드디어 가는구나.’


*


사빈은 텃밭에 앉아 파던 흙을 또 파냈다.

계속 같은 자리에 호미를 갖다 댔다. 땅을 파면서도 눈은 멀리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차미가 그녀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첫 손님도 맞고, 혼도 잘 보냈는데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사빈은 희미하게 웃었다.

“한얼이 아직도 안 왔어요.”


황민의 혼을 데리러 대취와 산여가 왔다. 혼을 인도하면서 사빈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초연이 얼마나 궁금해하는지 몰러.’

‘다담은 어떻고? 잘 지내는지 보고 오라는데, 내가 정할 수 있어야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취와 산여는 몹시 반가워하며 아름누리를 돌아보고, 텃밭도 둘러보았다. 그 덕에 황민은 사부랑차를 한 주전자나 마시며 기다려야 했다.


두 인도자를 보고 있으니 한얼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지만, 떠도는 소문도, 흐르는 기척도 없었다.


“언제쯤 돌아올까요?”

“때가 되면 올 거야. 어딘가 꼭꼭 숨어있겠지. 혹시 모르지. 수리마루님이 돌보고 계실지도?”


차미의 농담에도 사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우필과 좌보가 지나가자 차미는 놓칠세라 두 차사에게 달려갔다.

“사빈님 좀 위로해 줘. 한얼 생각에 저러고 있어.”


차미에게 이끌려 두 차사는 어기적 텃밭으로 다가왔다.

“그럼 뭐···. 만만한 게 차 이야기지.”


차미와 좌보, 우필은 텃밭에 앉아 사빈의 설명을 들었다. 칙칙한 중천이지만, 흰 구름이 어둠을 가려주니 앉아있기 좋은 날씨였다.


“이건 산뫼, 용발, 애기별꽃이에요. 라온잎이랑 꽃잎을 잘 섞으면 라온향을 만들 수 있어요. 그것만 있으면 피천귀들이 가까이 못 와요.”


“그려? 그 잘이 을매나 잘이여?”

“비율이 좀 까다롭기는 한 대요.”


“통과. 그건 사빈님이 만들고. 다음.”

차미가 손을 저었다.


“이건 미소화와 강인초. 이걸로도 차를 만들 거예요. 여긴 긔니초예요. 마고에게 특효약인데, 백하님이···.”

사빈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추었다.


차미와 좌보, 우필이 키득거렸다. 백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산대감을 넘겨주는 것이 보통 일이야? 아무리 부루가 돕는다고 해도 운와 혼자 맡기에는 벅차지.”

차미는 사빈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감이 어땠는지 알아? 중천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어. 인간세에서 때를 잔뜩 묻히고 온다고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그런데도 정혜부사를 맡았으니. 참···.”


“백하 혼자 북치고 장구 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아주 좋구먼.”

우필이 개은안과 향춘 이파리를 흔들며 냄새를 맡았다.


“응? 이거 중천에서 흔하디 흔한 그 풀 아냐?”

우필이 이파리를 뜯어 좌보의 코에 들이댔다.


좌보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진짜!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는디?”


두 차사는 주리 이파리도 하나 뜯어 냄새를 맡았다. 차미에게도 이파리를 건네주었다.


사빈은 풀잎 한 장에 기뻐하는 차사들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중천이 감춘 다른 씨앗도 많아요. 샘이랑 물길도 키우고 있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저절로 자랄 거예요.”


“히야, 사빈님 있다고 그게 다 나오는 겨?”

“나오기만 하면 이름이며 효능을 죄다 알려주지. 우리만 믿어!”

우필이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쪽에는 텃밭을 더 키울 거고요. 저쪽에 약초밭도 만들 거예요.”

“확실히 처음보다 반김길이 편해졌거든. 드디어 황폐한 사막이 푸르게 바뀌는 거야?”

차미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사막은 사막인디, 푸른 사막인 겨?”

좌보도 일어서며 반김길 너머 지평선까지 뻗은 황무지를 가리켰다.


“푸른 사막. 그거 좋군.”

우필도 일어섰다. 그는 사빈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사빈님도 있고, 정혜부도 있으니 혼들도 바뀔 거야. 언젠가는 마음숲과 비슷해질걸?”

차미가 소리 높여 웃었다.


*


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사빈은 사부랑차를 호리병에 담고 아날빛숨에서 가져온 과자도 바구니에 담았다.


“어디 가니?”

예사달이 흔들거리던 의자를 멈추었다.


“도우미를 구하려고요.”

“이 밤중에?”

“낮에는 비뢰수들이 안 움직이거든요. 지금도 차사들을 피해 다닐 거예요.”


“도우미? 내가 있지 않니?”

“아이, 할머니도 참. 할머니가 좋기는 한데요···.”

사빈이 눈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는 너무 느려요. 손님 받는 것도 서툴고.”

“내가 어때서? 나도 한다면 잘해.”

예사달이 입을 삐죽거렸다.


“할머니는 저랑 같이 새집을 지어요. 내일 아침에는 도우미가 네 마리나 들어설 거니까요. 숙소를 지어야죠.”


사빈은 자신이 할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도우미들이 올 것이고, 차도 한 가지 더 만들 것이다.


벌써 다음 차에 대한 구상이 끝났다. 애기별꽃과 홍옥이 조금만 더 자라면 된다. 이름은 단비차라고 할 것이다.


‘그래! 마음숲에서 실패한 술도 담아야지. 중천에서라면 성공할 거야. 다음 화평축제에 내놓게 미리 준비해야지.’


사빈이 들떠있자 예사달도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

“같이 가자꾸나. 밤의 중천을 거닐다니. 이게 얼마 만이냐?”


예사달과 사빈은 나란히 문을 나섰다.

중천에서 보는 별은 맑고 깨끗하여 다섯 성천 어디보다 눈부시게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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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58 3 12쪽
173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47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2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2 3 12쪽
»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56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4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4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4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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