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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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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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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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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DUMMY

별채에는 촛불 하나만 켜놓았다. 불꽃이 바람에 흔들려 그림자도 덩달아 흔들렸다.


작은 악마 미지가 가온과 나를 불렀다.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바나는 당연히 따라왔고, 나토두도 걱정된다며 함께 들어왔다.


미지는 얌전히 묶여있었다. 천력으로 만든 밧줄이라 혼자서는 풀지 못 한다.


“말해봐. 왜 우리를 보자고 했어?”

가온이 미지를 노려보았다.


미지가 입을 삐죽거렸다.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악마에게 그런 것도 있어?”


“난 요정이었어요. 아니, 지금도 요정이에요. 마물이 날 악마로 만들었어요.”

미지의 작은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반계의 대나무숲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물이 악마를 만든다고 했어. 하지만, 요정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 마물이 요정을 부리지?”


“사람들이 악마를 더 좋아하니까요. 남이 잘되는 것보다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들의 환상과 두려움을 내게 씌웠어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요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미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히잉, 할 수 없을 거예요. 마물과 악마를 한꺼번에 없애야 하거든요. 그만큼 강해야 해요. 도룡이 귀력을 찾으면 다시 저를 부릴 거예요.”


미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진저리쳤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소멸하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죽여요. 정신을 차려보면 내 손에 피가 묻어있어요.”


“도룡을 어떻게 없애지?”

나는 진흙 덩어리와 맞서던 아움과 높쌘을 떠올렸다. 그 방법이 통할까?


“그건 몰라요. 도룡이 계속 힘이 세진 건 알아요. 자기들끼리 싸워서 다른 마물을 삼키고 그 힘도 삼키거든요.”


미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물들이 요마전쟁을 일으켜요.”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요마전쟁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가슴이 뜨거워졌다.


가온이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쳤다.

“네 천력, 다 빼앗기겠어.”


“아···. 그래.”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자기들끼리의 구역 다툼이군요.”

나토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왈, 주인님, 마물이 뭐시여라? 피천귀와 다른 거시여라?”

“응. 마물은 사실 완전한 존재가 아니야. 허공의 섬에 살던 정귀를 마눙님과 이루님이 소멸시켰거든.”


“소멸했는데 살아있어라?”

“그때 남은 조각이 인간세로 떨어졌어. 스스로 모습을 가질 수 없으니 썩은 나무나 진흙에 깃들어 힘을 키워.”


가온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내 눈에도 도룡이 보여서 신기했어.”


“천선계에서는 보지도, 돕지도 않아요! 인간세는 건드릴 수 없다고 비겁한 변명이나 하면서!”


미지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니 제가 악마가 되어도 모르잖아요!”


“이상하네. 마물이 귀력을 키우면 되지, 왜 악마를 만들고 그래?”

가온이 손가락 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도룡은 다른 마물과 싸우느라 귀력을 잃었어요. 저한테 그림자를 덮어씌우고 자기 대신 싸우게 하는 거예요.”


미지는 밧줄에 묶인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마림과 슬아의 혼을 빨아들이면 귀력을 찾을 거예요.”


“왜 하필 마림과 슬아야?”

“그 둘의 혼이 가장 맑고 깨끗하니까요. 그런 혼은 드물거든요.”


“이상하네. 피천귀는 욕망을 먹고 사는데, 마물은 안 그런가?”


미지는 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마물은 순수한 열망도 좋아해요. 수도원 같은 곳에서 나오는 기운이 더 큰 힘을 줘요.”


그믐 외출에서 들었던 괴이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천수산 아래 병원에서 똑똑히 들었다.

‘너는···, 나를 지울 존재구나. 네가 깨닫기 전에 없애주마.’


그것도 마물이었구나. 내 기운을 가져가려고 했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내가···. 아니, 마고가 마물을 지울 수도 키울 수도 있어?’


미지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와주세요. 전 악마로 살고 싶지 않아요. 요정으로 죽고 싶어요.”


가온이 혀를 끌끌 찼다.

“도와주고는 싶지만, 내 천력으로는 도룡도 상대 못 해. 주술을 푸는 방법도 모르는데···.”


미지는 무릎을 꿇고 다가왔다.

“절 도와주시면 저도 천사님들을 도울게요. 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그것도 빨리. 그믐 외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나토두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그 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그믐밤의 손님!”


“손님?”

가온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를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가온이 미지에게 다가앉았다.

“요정으로, 원래의 네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야?”

“예. 꼭 돌아가야 해요. 난 요정이라고요.”


“좋아. 그믐밤의 손님으로 인정할게. 차원의 문지기를 소환하여 미지의 소원을 이뤄준다.”

가온이 중얼거렸다.


“지금 하륜 선위를 소환하려고?”

“바로는 못 올 거야. 새벽쯤? 차원의 문에서 떠나는 건 어렵거든.”

가온이 목걸이의 한빛돌을 쓰다듬었다.


“정말 저주를 풀어주는 거죠?”

“음. 나와 하륜님의 선력이면 가능할 거야. 말해봐. 우리를 어떻게 도울 거야?”


미지는 가온의 말은 듣지 못했다. 환하게 웃으며 꿈꾸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나빌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마지막 순간에는 요정 나빌라로 용감하고 아름답게···.”

미지는 말하다 말고 눈물을 글썽였다.


가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빌라?”


갸웃거리던 가온이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그 나빌라! 미지, 그럼 빛결 선인을 알아?”


“빛결님요? 당연히 알죠. 그분을 모르는 나빌라가 있나요?”

미지는 오히려 의아해하며 가온을 쳐다보았다.


가온이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너도 알지? 전에 달숲에서 봤잖아? 요정 인형.”

“아, 알아. 빛결님의 혼이 유리공에 봉인되었다고. 요정들을 무척 좋아해서···.”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손으로 미지를 가리켰다.

“그 나빌라가 저 나빌라?”


나빌라 요정은 영영 사라졌다고 들었다. 호기심도 많고, 사람도 좋아하고, 착한 요정이었다는데.


가온이 주먹을 꼭 쥐었다.

“살려야 해. 세상에 하나 남은 나빌라야. 반드시 살려야 해!”


나는 가온에게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럼, 과거가 바뀌잖아? 다음 마고는?”

“백슬곤아가 진짜 다음 마고라면, 어떻게든 마고가 될 거야.”


가온의 결심은 확고했다. 나빌라의 이름을 듣자마자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백슬곤아의 현재가 바뀐다면, 다음 마고가 아닌 거지.”


뭐야,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여기 온 것 자체가 이미 과거를 건드린 거니까.


가온에게는 다음 마고보다 나빌라 요정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나는 어떻게든 백슬곤아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마음숲으로 데려갈 생각밖에 없는데.


미지가 드디어 혼자만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눈이 초롱초롱 맑아졌다.

“도룡이 귀력을 회복하려면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요. 천사님 정도···.”


미지가 나를 천사라고 부르자 가온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빈은 마고야. 마음숲의 마고.”


“예. 마고님. 마고님은 빼앗기 쉬운 천력을 가졌어요. 도룡 말고도 다른 마물이 공격할 거예요.”

“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경고를 들었으니까.


“못 깨어난 마물도 많거든요. 깨어나려면 천선계의 힘이 필요한데, 딱 마고님 정도가 마물이 좋아하는 먹잇감이죠.”


“그건 알겠고, 일단 도룡부터 잡자. 어떻게 불러내?”

생각은 벌써 도룡을 해치우고도 남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나가고 싶었다.


“슬아가 있잖아요? 슬아의 혼도 필요하니까 찾아올 거예요.”

“마림은? 마림의 혼은 벌써 먹혔어?”


그렇게 되면 유언도 못 듣고, 백슬곤아의 혼은 백령성 지하에 붙어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혼도, 몸도 남아있어요. 내일이 지나기 전에 도룡을 소멸시키면 꺼낼 수 있어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슬아를 데리고 나가자.”

나와 가온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악!”

미지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난 악마가 되고 싶지 않아!”


미지의 몸이 비틀거렸다. 벽과 바닥에 비치던 요정의 그림자가 벽에서 나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단번에 미지를 삼켰다.


요정 미지는 형체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되어 흐물거렸다.


밧줄이 조여지는 것보다 그림자가 흐르는 것이 더 빨랐다. 검은 그림자는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라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소리도 없이 미지는 사라졌고, 천력으로 만든 밧줄도 허공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내가 쫓을 거라.”

바나가 방문을 향해 뛰어오르자 나토두가 바나를 잡았다.


“아니. 도룡을 상대할 때 거기 있을 거야. 그때 처리하면 돼.”

“왈! 형님! 역시 형님이어라.”

바나는 나토두 옆에 엎드렸다.


“좋아. 하륜님도 올 테니, 슬아와 함께 마림을 찾으러 가자. 도룡은 박살을 내고, 미지의 저주를 풀어주고!”

가온이 소리를 높였다. 이미 승리한 듯 의기양양했다.


가온의 기운찬 소리를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었다.

이번 그믐에도 해낼 것이다. 비록 조금 다치기는 했어도.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토두가 바나의 등을 쓰다듬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사빈님, 바나한테 들었습니다. 도룡과 싸우면서 애기를 하셨다고요?”


“나도 봤어. 싸우다 말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물어본다는 걸 깜빡 잊었네.”

가온도 눈을 빛내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바나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좀···.”

도룡이 내게 무슨 말을 했더라. 그래, 중간자가 된 그날.


“난 요마전쟁 때 중간자가 되었어. 다훤 아저씨가 날 중간자로 만들었는데, 도룡의 말로는 그때 자기 기운도 들어갔대. 그리고 모르는 다른 기운도.”


“다훤님의 천력이 아니었어?”

가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의 천력도 맞아. 아저씨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른다고 하셨어. 그 이전에도, 그 후로도 중간자를 만들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천력만이 아니라 마물의 힘과 또 다른 기운도 필요하다?”


말하고 나니 내 몸에 마물이 사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가렵고 메스꺼웠다.


“중간자는 꽤 까다롭군요. 그래도 사빈님은 마물이 되지 않았잖아요? 기운만 흡수한 겁니다.”

나토두는 심각했다. 소년의 표정치고는 너무나 진지했다.


“잠깐! 그럼, 네 안의 기운이 마물을 끌어들일 수 있어?”

가온이 내 얼굴에서 팔과 다리까지 훑어보았다.


“아까 미지가 말했잖아? 딱 너 정도가 마물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아니, 그거 말고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도룡을 소멸시킬 방법, 인간세에 숨은 모든 마물을 찾아내 소멸시킬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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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3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3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77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56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58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58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58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68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3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55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54 3 12쪽
»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56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1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3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54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59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2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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