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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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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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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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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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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마지막 대결

DUMMY

쓰러진 영준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영준이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희미하게 숨 쉬고 있지만 너무 약했다.

‘이건 영혼수집가의 수법이 아닌데.’


도움을 청하려고 둘러보니 언제 왔는지 하륜이 옆에 앉았다. 그가 영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살펴보며 소리 없이 말했다.

‘영혼을 거의 다 가져갔어요. 아직 끈이 이어졌지만 곧 사라질 거예요. 빨리 찾아야 해요.’


하륜의 기운이 약하게 흔들렸다. 분신술로 왔구나.

신력이 나뉘면 그만큼 힘의 조절이 어려워진다. 차원의 문에 더 많은 신력을 안배했을 테니 여기서 술법을 쓰면 사람들에게 들킬 수 있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긴급구조번호를 눌렀다.

‘구급차가 오면 나는 병원으로 갈게요.’

하륜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렸다.


하륜과 영준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영준의 혼과 연결된 끈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인적 없는 골목으로 숨어들었을 때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파란빛이 도는 영준의 끈은 급격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영혼의 끈을 따라 훌쩍 날아올랐다.


영혼의 끈은 바닷가까지 이어졌다. 바다에 맞닿은 절벽 한가운데 동굴이 보였다.


동굴 앞에 멈춰 서서 나를 도와줄 물건을 소환했다. 신령수의 지팡이, 리엘과 바우의 구슬, 나빌라 요정이 준 조약돌.


지팡이를 손에 쥐자 손잡이 끝이 벌어지면서 움푹 팬 홈이 생겼다.

마치 눈꺼풀을 여는 것 같았다. 허공에 떠 있던 요정의 돌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지팡이는 돌을 완전히 품고 눈꺼풀을 닫았다.


‘이게 이렇게 이어지는 거였어?’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파란 끈을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살랑은 동굴 안에 있었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크고 짙어진 그림자가 쿨렁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천사는 정말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미끼를 잘 물어서야.”


“빨리 문을 열어!”

힘껏 소리쳤지만 살랑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뭉치며 아지랑이처럼 흐물거렸다.


“이번에 넌 나오지 못할 거다. 내가 천사의 영혼으로 사람들을 멸망시킬 테니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인간들. 파괴가 본능이라면 판을 벌여줘야지.”


“쓸모없는 말은 됐어. 영준의 혼은 어디 있지?”

“영준? 그자의 이름인가?”

살랑은 좀처럼 공간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영준의 끈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살랑이 노리는 것이 그것인가.

일렁이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저 그림자 속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나.


“일곱 번째 지구도 문을 닫게 돼. 그래야 새로운 지구가 열리니까. 멸망을 좀 앞당겨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사람들이 스스로 세계를 파괴하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종말로 향하는 본능이랄까.”


더 기다리지 않고 살랑의 그림자로 뛰어들었다. 그림자가 흩어졌다가 반대편에서 다시 모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겨우 너를 잡았는데.”


다시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몇 차례 뛰어들었더니 살랑이 내뿜는 기운에 지쳐갔다. 살랑은 하륜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와 함께 동굴 안에 있던 다른 그림자들도 독을 품어 냈다. 그들의 독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비틀거리던 나는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일어섰다.

살랑의 독이 강해지자 신령수 가지에서 향긋한 냄새와 신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살랑은 크크크 소리를 내며 허공을 맴돌았다.

그림자를 노려보며 빈틈을 찾는데 지팡이 손잡이가 움찔거렸다. 지팡이는 눈꺼풀을 열듯 요정의 돌을 품었던 껍질을 들어 올렸다.

조약돌이 희고 밝은 빛을 뿜어냈다.


요정의 빛을 마주하자 살랑의 그림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폭파하듯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그림자 사이로 공간이 열렸다.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


전에 보았던 공간은 적막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모든 곳이 울렁거렸다. 빠르게 수축과 팽창을 계속해서 심장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던 공간은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이 색깔은 빛결?


영준의 혼이 급했기 때문에 무조건 파란빛 끈을 따라 들어갔다.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영준의 혼 덩어리는 쉽게 찾았다.

바우의 구슬에 영준의 혼을 담았다.


이제 보라색 끈을 찾는 일만 남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빛결을 구해야지.

그의 끈을 찾아 아득한 깊이까지 계속 들어갔다.


빛결의 끈은 허공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있었다. 혈관이 심장벽에 붙어 꿈틀거리듯 그 끈이 모든 공간을 자기와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나는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공간 전체가 빛결의 혼이었다. 그것이 살랑과 하나가 되어 움직인 것이다.


허공이 꿈틀대며 점점 좁혀왔다. 내 혼까지 흡수하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빛결님! 내 말 듣고 있죠! 멈춰요!”


빛결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몸을 누를 정도로 공간이 좁혀오자 요정의 돌이 다시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공간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나를 심판하러 왔나.’

살랑의 쇳소리 사이로 낮고 힘없는 소리가 들렸다. 빛결의 목소리였다.


그날, 신비한 달밤에 보았던 빛결의 표정과 눈물을 돌이켜보았다.

친구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나겠다고 한 것이 이런 의미였나.


자신을 포기했어도 시공간을 넘어 달숲으로 찾아온 건 도움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분노로 자신을 태워도 마지막 남은 신선의 심장은 죽지 않았다.


빛결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심판은 신의 영역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에게 허락된 건 용서일 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나도 흡수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잡히면 영준도 살릴 수 없다. 빛결을 구하지 못하면 앞으로 더 많은 영혼이 사로잡힐 것이다.


내게 남은 천사의 힘을 모두 쓰기로 했다.

만약 내가 소멸하면···. 하륜의 모습이 언뜻 보였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은 다음에 생각하자.


내 의지를 읽었는지 지팡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댔다. 신령수의 신묘한 기운이 나의 힘과 하나가 되었다.


내 안의 힘이 거세졌다. 내게서 뻗어나가는 기운은 나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공간이 폭발하듯 뒤로 밀려났다가 잠시 후 다시 조여왔다.

지팡이가 다시 꿈틀거렸다.


“당신을 벌하려고 나를 보낸 게 아니에요.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빛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


지금까지 나를 붙잡은 묵직한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기억을 찾은 후에도, 하륜을 알아보아도 한쪽 구석에서 떠나지 않는 꺼림칙한 느낌.


나를 부른 건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영혼이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차원의 문을 지키며 나를 기다리던 하륜의 간절함도, 지후의 억겁에서 벗어나려는 영준의 혼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화의 기회를 위해 빛결이 나를 부른 것이다.


신은 강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존재이다.

물방울이 얼마나 멀리 갈지, 어떤 무늬로 퍼져나갈지 결정하는 건 강물과 물방울과 바람의 일이다.


그들에게 나는 신이 떨어뜨린 물방울이다. 그렇다면 더 멀리 가야지. 빛결의 상처에 닿도록,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만큼.


빛결에게 소리쳤다.

“사랑하는 이들이 소멸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하지만, 파괴가 온전한 복수가 될 순 없어요. 그건 사람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당신의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거라고요!”


지팡이의 힘이 더 세졌다.

보랏빛 끈을 잡으니 빛결의 슬픔이 전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를 짓누르는 공간을 지팡이가 막아주는 사이 리엘의 구슬을 열었다.

“후회하고, 번민한 순간들이 새로운 기회를 줄 거예요. 당신 안에 남아있는 자신을 찾아요.”


리엘의 구슬로 공간이 빨려 들기 시작했다.

공간이 미친 듯 꿈틀거렸다. 똑바로 설 수조차 없었다. 눈을 뜨기도, 구슬을 잡기도 어려웠다.


리엘의 구슬이 얼마나 위력이 센지 미처 몰랐다. 내 몸까지 빨려 들어가려 했다.


빛결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 돼. 너도 같이 끌려갈 거야.’


나를 걱정하는 건가. 신령수의 지팡이도 내가 빨려드는 것까지 막지 못했다. 다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빛결님, 나와 같이 차원의 문을 지켜요.”

마지막을 각오하고 빛결에게 당부했다.


보랏빛 공기는 구슬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힘겹게 나를 퉁겨냈다. 그 순간 다정한 빛결의 미소가 떠올랐다.


지팡이에 의지해 버텼지만, 힘이 부족했다. 눈을 감았다. 할 일을 다 했으니 후회하지 않아.

리엘의 구슬을 꼭 쥐었다.


등 뒤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공간 밖으로 쑥 뽑혀 나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옆으로 구슬이 떼구르르 굴러왔다.


살아난 건가. 리엘의 구슬을 잡았다. 빛결도, 살랑도 리엘의 구슬에 봉인되었어!


“생각 좀 하고 덤벼야지. 무턱대고 그냥 들어가면 어떡해요!”

아무가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영력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아이고.”

아무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하륜이 내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빛결의 혼이 들어간 구슬을 보여주었다.

“이제 어떡하죠?”


그는 구슬 속에서 꿈틀대는 덩어리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구슬을 쓰다듬자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리엘의 힘이 있으니 잠들 거예요. 소멸하는 건 막았으니 언젠가 살아나겠죠.”

빛결이 요정들과 보내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다.


문득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생각났다.

“아, 병원! 빨리 가야겠어요.”


하륜은 아무를 일으켰다.

“나는 기연랑을 데려다줄게요. 혼자 못 움직여요.”


아무는 많이 수척해 보였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였다. 하륜에게 맡기고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병원 옥상에서 영준의 혼을 열었다.

영혼 조각은 쏜살같이 주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영혼 대부분이 빠져나왔으니 깨어나려면 하루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고연당 최씨처럼 나를 잊겠지.


달숲에 돌아와 빛결의 혼이 들어간 구슬을 요정 마을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요정의 돌과 은서에게 얻은 작은 화초도 나란히 놓아주었다.


언젠가 빛결도 행복한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리라.


*


은서가 가게로 찾아온 건 다음 날 저녁이었다.

이벤트 준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다면서 벽을 장식할 재료까지 들고 왔다. 그녀는 바다 속 풍경을 만든다고 물고기와 산호를 그리고 오렸다.


“점심시간에 이현씨랑 병원에 갔다 왔어요.”

“영준씨는 깨어났어요?”

“마침 면회실 앞에 있더라고요. 완전히 말짱하던 데요.”


“어떻게 딱 맞춰 갔네요?”

“호호, 제가 소설 한두 편 쓰나요? 이때쯤 가야 드라마틱하잖아요. 이벤트에서 또 마주치면 운명이라고 느낄 거 아녜요?”


“아하, 그런 장치까지! 응? 이현씨랑은 원래 약속 있었나요?”

“아뇨. 점심 먹으러 나온 거였어요. 그러고는 우연히 생각난 것처럼 했죠.”

은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정령의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구나.


이제 둘이 잘 만나는 일만 남았다.

인연의 끈을 찾은 건 우리지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사와 정령의 능력으로 살펴보건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영준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까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생생한 지후의 모습이 영준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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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5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8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7 0 9쪽
» 마지막 대결 22.08.03 35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7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1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8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40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1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4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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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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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4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2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8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9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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