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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29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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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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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DUMMY

볼일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한가. 연랑은 어쩌다가 저런 말투를 배웠을까.

아무와 꽃술로 나뉘면서 어중간했던 부분이 확연히 다른 두 사람에게 녹아들었나.


아무의 말을 기다리며 주먹밥을 집어 먹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자꾸 손이 갔다.

“벽은 왜요?”

“어디 갔다 올 일이 있어서.”


아무와 꽃술이 함께 간다면 뭔가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이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같이 가요.”


아무는 내게는 대답하지 않고 꽃술에게 물었다.

“준비 잘했지?”

꽃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준비랄 게 뭐 있나. 내가 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어디 가는데요?”

“우리가 놓친 게 있어서 찾으러 가요.”

“놓치다니?”

“후계자를 찾아야죠. 내 자리를 대신할.”


“무슨···. 기연랑은 앞으로 몇 천 년은 더 살 텐데.”

“살기야 몇 만 년은 못 살겠어요? 가끔 건너 차원에 가야 하니 다음 문지기을 구해야죠.”

“어디서 찾나요?”

“아직 몰라요. 가보면 알겠죠.”


기연랑은 현재의 다른 장소로도 갈 수 있단다. 앞치마를 그대로 두른 채 시간의 장벽을 넘었다.


*


산 아래 자리 잡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주유소, 식당, 슈퍼도 있었지만, 도시와는 거리가 먼 한적한 마을이었다.

벌써 깜깜한 밤이라 사방이 어두웠다. 가로등 빛도 희미했다.


“현재의 다른 공간도 다닐 수 있는데 왜 나는 항상 과거로 갔을까요?”

“시간의 장벽은 가온님에게 필요한 것을 보여줘요. 선택할 수 있는 몫이 아니에요.”

쳇, 내게도 현재가 열리면 다른 나라도 다니면서 물건을 많이 구해 올 텐데.


흙과 물과 공기가 알려줄 거라는 아무의 말을 믿고 둘레길을 걸었다.

골목이란 골목을 서너 번씩 돌았다. 한 시간 넘게 헤맸을까.


아무는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저만치 앞서가는 아무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물었다.

“대체 누구를 찾는데요?”


아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꽃술이 외쳤다.

“아, 저기.”


골목 입구에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비틀거렸다.


젊은 여인이 부른 배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아직 때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아기가 서두르나 보다. 여자는 진땀을 흘리며 손을 떨었다.

아무가 재빨리 여자를 부축하고 꽃술이 집 대문을 열었다.


대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여자는 방에 누워있고 나는 열린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이거 꿈이야?


어리둥절하여 둘러보니 아무가 대야에 끓인 물을 담아 왔다. 어디서 났는지 흰 천을 준비해 방으로 들어갔다.


곧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꿈 맞네. 꿈 맞아. 이렇게 시간을 건너뛰는 걸 보면.


엉거주춤 서서 계속 꿈속의 장면을 보려는데 아무가 내 팔을 꼬집었다.

“아얏!”


“꿈 아니거든요. 빨리 움직여요.”

“어떻게 된 거죠?”

“뭐긴. 아기가 태어난 거죠.”

“이렇게 해도 돼요?”

“그럼 저렇게 해야 하나요?”

“이건 운명을 바꾸는 거잖아요?”

“아닌데. 이게 정해진 일인데?”


아무와 투닥거리니 꽃술이 방 안에서 소리쳤다.

“빨리 와서 이거나 도와요!”


나와 아무는 꽃술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꽃술은 도깨비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아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겼다.


아무는 아기가 태어난 시각도 정확히 적어놓았다.

모든 것이 분주하게 돌아갔고 내 몸도 기계처럼 척척 움직였다. 꽃술이 내게도 주술을 걸었구나.


여자는 정신이 돌아오자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예정일이 아직 멀어서 안심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여자가 꽃술의 손을 붙잡고 인사할 때 마당에서는 아무가 다른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 정도의 신력이 필요한 아기였나?

이 아기가 후계자가 된단 말이지. 사람의 아기는 아닐 테고, 누구의 아이일까.


‘맞아! 미역국을 끓여야지.’

아무가 부엌으로 가기에 나도 따라갔다.

미역을 씻고 마늘을 깠다. 밥이 없기에 쌀도 씻었다. 하지만 내 솜씨는 거기까지였다.


냄비에 물을 붓고 쌀과 미역을 넣으려 하자 아무가 끌끌 혀를 찼다.

“아휴, 가온님! 저기 좀 가 있어요.”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차라리 빨래를 하세요.”


아무가 냄비의 물을 따라 내고 들기름으로 마늘을 볶았다.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부엌에서 나왔다. 뭐가 잘못된 거지? 그냥 대충 끓이면 안 되나?


빨래도 나쁘지 않았다.

헹굴수록 하얗게 바뀌니 기분이 좋아졌다. 청소 알바랑 비슷했다.


물을 갈고 치대며 같은 동작을 반복하니 내공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무아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까지 앉아있으려고요?”

놀라서 돌아보았다. 아무와 꽃술이 나란히 서 있었다.

벌써 끝났나. 서둘러 빨래를 널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아기를 보려고 방으로 갔다. 엄마와 아기는 잠들어있었다.


천사직을 수행할 때도 아기는 여러 번 지켜봤지만 볼 때마다 신비로웠다. 이때만큼은 인간계의 고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을 줘야지. 앞치마 주머니를 훑으니 내가 만들던 점토 인형이 있었다.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이었다.

잘 만들지는 못했어도 아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인형을 머리맡에 올려놓고 방을 나왔다.


아무와 꽃술은 벌써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같이 가요!”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소리치며 뛰어나갔다.


기연랑과 같이 다니니 나왔던 벽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대문을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달숲 안이었다.


재빨리 아무의 팔을 잡았다.

“그 아이는 누구예요?”


아무가 대답할 듯하더니 이내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에구,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글쎄요. 가온님과 파트너가 될 아이겠죠?”

무슨 파트너?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지만 아무는 껄껄 웃으며 나갔다.


궁금하지만 참을 수밖에. 어쨌든 다시 만난다 이 말이지.

내게는 길고 긴 시간이 있고 인연은 돌고 돌아 언젠가 만나게 되니까.


*


너무 열심히 일해서인가. 노곤함이 밀려왔다.

몸이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고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륜의 카페에서 저녁을 먹다가 꾸벅꾸벅 졸 정도였다. 머리가 툭 떨어지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떴다. 포크에 사과를 찍어 든 채 졸고 있다니.

입맛을 다시며 입가에 묻은 침을 쓰윽 닦다가 하륜과 눈이 마주쳤다.


‘이크.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앞에 놓고 이러면 예의가 아니지.’

자세를 바로하고 한입에 들어가는 최대한의 양을 떠서 입에 욱여넣었다. 맛있게 먹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륜이 컵과 잔을 닦으며 나를 보았다.

“아까부터 문자가 계속 울리던데요.”


영준에게서 문자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열어보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원인을 찾으려면 부딪치고 파헤쳐야 하는데 만나는 것이 두려우니 어떻게 한다?


하륜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잖아요.”

“피하기는요. 누가요? 지금은 식사 중이라 그런 거예요. 식사. 네.”


다짐하듯 ‘식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릇을 들고 야채를 집어먹다가 아예 밥을 쏟아 비벼 먹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입에 음식이 가득 들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식을 빨리 삼키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근육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 후로 살랑과 만난 적 있어요?”

“아뇨. 못 봤어요. 고연당도 닫혀있고. 내일 또 가봐야겠어요.”

“사람과 너무 가까워지지 말아요. 동정은 위험해요.”


“고연당 최씨가 위험해지나요?”

“가온님이 위험하다고요.”

하륜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니 손을 잡아주던 느낌이 머릿속을 채웠다. 다정하고 따뜻한 느낌. 또 잡아주지 않으려나···.

응?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이런 욕망을 느끼다니! 인간계에 있다고 정말 사람과 같아진 거야?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니 볼이 더 뜨거워졌다.


손을 볼에 대보니 화끈거렸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양손을 번쩍 들어 손사래를 쳤다. 지금, 나 뭐라는 거니? 그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속으로 되뇌니 뺨이 파르르 떨렸다.


하륜의 손이 내 앞으로 가까이 왔다.

내 생각이 읽혔나? 그의 손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 피해야 하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의 손이 내 입가에 묻은 밥알을 집어냈다.


그는 냅킨을 꺼내 밥알을 싸고 한 장을 더 꺼내 내게 주었다. 저런 동작까지 쓸데없이 우아한 이유는 뭐람.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어디까지 상상한 거야?

사람의 몸으로 있다가는 언제 욕망의 화신으로 돌변할지 몰라. 조심해야지.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내 안의 갈등과는 관계없이 하륜은 뭐가 재미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으니 기쁜가 보다.

“하륜님 요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

칭찬을 늘어놓으며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신선 중의 신선에게 실수를 남발하다가는 천사장에게 호되게 잔소리를 들을 테니까.


*


방에 돌아와서도 가슴이 두근거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러면 안 돼! 진정하자고! 난 할 일이 있어!’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 방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고 소리쳤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외침은 하륜의 방에까지 들린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꽥꽥 소리치지 않았을 텐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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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5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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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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