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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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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22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8.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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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DUMMY

“무슨 일로?”

“지독한 가뭄이 하늘의 벌이라지 않소. 해를 바꿔야 한다 이 말이지.”

“그거랑 상암의 요괴는 무슨 상관이지?”

“비현공을 모시는 무리에서 나온 말인데···.”

그들의 소리가 더 작아졌다.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내게는 잘 들렸다. 하륜도 눈을 감은 채 듣고 있었다.


“사실은 요괴가 아니라 하오.”

“뭐요? 허면 왜 그런 명이 떨어진 거요?”

“생각 좀 해봐요. 하늘의 해를 바꾸려는 마당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겠소?”

“하늘이 도와준다는?”


“그렇군. 그래서 요괴라는 소문을 만들었군.”

“이상하지 않소? 그 물맛이 그리 좋다던데.”

“쉿!”

차를 나르는 일꾼이 가까이 오자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헛기침하던 그들은 하녀가 지나가자 장사 이야기로 돌아갔다.


하륜이 일어섰다.

“이만 갑시다. 필요한 건 알아낸 것 같으니.”

단서를 더 찾고 싶었지만 할 수없이 따라 일어섰다.


*


설마 지후도 그 일에 연루된 건가. 무슨 변고를 당한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지후에게 가보자.


내가 바람을 부르며 허공을 딛는 순간 하륜이 내 손을 붙잡았다.

“비현공은 혼자가 아닙니다.”

“군대를 끌고 왔나요?”

“아니.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륜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원의 문을 지킨다 해도 스며드는 건 막을 수 없어요. 대문을 여며도 쥐 한 마리는 드나드는 것처럼. 비현공에게는 다른 차원의 것이 씌어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소문을 심었군요.”


기적을 함부로 만들고,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줄 알았다. 그것이 진짜 원인은 아니라 해도 너무나 이상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비현공은 이번 가뭄을 계기로 반역을 이끌려고 했겠지. 왕을 바꾸어야 하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는 논리인데.


천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구실에 하늘을 들먹이다니. 지금쯤 깨달을 때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어이없이 속아 넘어간다.


사건의 배경이야 어떻든 지후를 도와야 했다.

그의 인생에 끼어들었으니 그를 살릴 의무와 책임이 있다. 지후 덕분에 하륜과 만나지 않았는가.


객사에 돌아오니 한 사람이 편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후가 보낸 것이었다.


- 무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오두막이 있어요. 내일 정오까지 와 주세요. 편지를 가져간 사람이 길을 안내할 거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후 올림 -


하륜이 거칠게 편지를 낚아챘다.

“함정이에요.”

“그래도 가야 해요. 지후를 도와야죠.”

“이건 사람이 설계한 일이 아니에요.”

“알아요. 지금 제 능력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가겠다는 겁니까?”

하륜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사람을 도와주는 건 천사의 본능이에요.”

그가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이 뜨거웠다.

“그럼 지금까지 당신을 기다린 나는 어떤가요?”

뭐라고? 내 귀를 의심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니던 빛을 이제 겨우 만났는데···. 나 역시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륜의 말에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다독거렸다.


“지후가 안전한지만 확인하고 금방 돌아올게요.”

이곳으로 돌아와 하륜과 함께 지내리라. 이 다정한 손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


어둠이 깔리고 정원에 등불이 켜지자 언덕으로 올라갔다.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는데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세상이 뿌옇게 가려졌다. 눈을 깜빡이자 서서히 밝아졌다.


등불의 마지막 인사인가. 이런 종류의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는데.

어제는 그렇게 화려하게 빛나던 등불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륜이 언덕을 올라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천사의 능력이 소진되어 불안한 것뿐이야. 모든 일이 괜찮을 거야. 이번에는 예감이 틀릴 수도 있잖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설령 무슨 문제가 생긴다 해도 치유의 알에 들어가면 된다. 그리고 다시 하륜을 찾아오면 돼.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찾아 헤매지 않아도 돼.


“인간계에는 변수가 많아요. 천사도, 신선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죠.”

“천계와는 확실히 달라요. 공기도, 물도.”

연못에 일렁이는 달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물결을 타고 출렁이는 달의 주름이 마음에도 그늘을 만들었다.


“선물이에요.”

하륜이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목걸이 끝에 달린 것은 나무가락지였다.


가락지에는 날개 무늬가 새겨있었다. 손가락에 끼는 용도가 아니라 두껍고 투박하지만, 그의 기운과 정성이 느껴졌다.


“꼭 돌아오라는 뜻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바로 알아보겠죠?”

하륜은 내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똑같은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도 걸었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나. 그저 옆에만 있어도 황송한데 선물까지 받다니.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만나면 이라니?

“금방 돌아올 텐데요?”

하륜이 여기 있잖아. 무슨 일이 생겨도 난 그를 기억할 테고,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


“그래야죠.”

하륜은 고개를 돌리고 젖은 눈으로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일찍 떠나야 하니 가서 쉴게요. 하륜님도 쉬셔야죠.”

천사의 능력이 사라져가니 서둘러 일어섰다.


하륜도 따라 일어섰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 잠겨, 그와 눈동자 속의 내 모습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그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아늑한 품이었다. 얼음처럼 딱딱해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를 처음 만났던 중산의 아름다운 숲이 느껴졌다.


“기연랑이 오는 대로 갈 테니 기다려요.”

“걱정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륜이 나를 지켜보는 것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떠나지 못할 테니까.


*


심부름 온 사람은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는 아니었는데 병 때문인지, 사고였는지, 어쩌면 형벌이었는지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몇 걸음 걷고 나면 내가 따라오는지 살펴보았다.

흘끔흘끔 쳐다보기도 했는데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날 요괴라고 믿는다면 그럴 수도.

나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새벽에 나와 쉬지 않고 걸었어도 한낮이 지나서야 오두막에 도착했다.


멀리 오두막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손짓으로 자기 몸을 가리켰다가 산속을 가리키며 웅웅 소리를 냈다. 이만 가겠다는 뜻인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낡은 오두막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지후가 남긴 흔적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명이 뛰어오는 발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들이닥쳤고 거칠게 내 팔을 잡아끌었다.

신의 심부름으로 내려왔다면 오천 명의 사람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의 힘은 보통 사람보다 억세고 거칠었다. 의식도, 생각도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무언가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눈앞에 몽둥이가 보였는가 싶었는데 뒤통수가 깨지는 듯 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마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느껴졌고 서서히 눈이 감겼다.


*


습하고 조용한 곳에서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온통 어둠뿐이었다.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써서 갑갑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찍찍대며 지나가는 쥐 소리도 들리고 풀벌레 소리도 들렸다.

뒤통수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그대로 누워있었다. 빨리 치유의 알로 들어가야 하는데.

손과 발이 뒤로 묶여서 어떻게 움직여도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기온이 지금이 밤이라고 알려주었다. 끼기긱 문이 열렸다.


나는 그들의 손에 끌려 비틀거리며 걸었다.

몇 십 걸음을 걸었을까.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딱딱한 막대가 오금을 세게 밀어 풀썩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덮은 자루가 벗겨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 횃불이 밝게 타올랐다.


사람들이 막대기나 곡괭이 같은 것을 들고 넓은 마당을 둘러쌌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마루 위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찻집에서 들은 소문 속 비현공이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 뒤 병풍에 그의 그림자가 비쳤다.

횃불이 바람에 흔들리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림자 위에 다른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더 짙고 더 깊은 그림자가 비현공의 몸까지 움켜쥐었다.


‘비현공은 혼자가 아니에요.’

하륜의 말이 생각났다. 저 그림자는 뭐지?

하지만 지금 내게는 차분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사람들의 고함과 욕설이 끓어올랐다.


지후가 줄에 묶여 끌려왔다. 고문을 당했는지 얼굴 여기저기 피가 흘렀고 옷도 피범벅이었다. 나를 보더니 지후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네년이 사특한 요괴렷다!“

비현공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대답할 이유가 있을까. 어떻게 빠져나갈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 혼자라면 담을 넘을 정도의 힘이 되지만, 지후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 많은 사람의 기억을 한꺼번에 지울 힘도 없고. 무엇보다 저 그림자. 저것이 하려는 일이 뭘까?


“하늘이 명하신다. 요괴의 목이 필요하다고.”

왜 나를 죽이려는 걸까. 그를 도와주는 하늘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소리 질렀다.

”산 채로 태워버려!“

”죽이시오! 죽이시오!“


사람들의 고함 속에서 떨리는 지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잖아요!”


지후를 붙잡은 무사가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지후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저게 진짜 선녀면 여기 끌려왔겠냐! 저건 가짜야.”


비현공이 손짓하자 칼잡이가 내 앞으로 나왔다.


“선녀님, 도망가세요!”

지후의 비명이 귓가에 울렸다. 무사가 소리쳤다.

“이놈이 진짜! 죽고 싶어!”


눈앞이 흐릿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후를 풀어주는 일 정도였다.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지후를 묶은 밧줄을 풀었다. 지후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서 도망가!’


밧줄이 흘러내리자 지후는 어리둥절해서 나를 보았다.

‘어서 도망가.’

‘안 돼요. 선녀님을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지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선녀라고 생각하면 날 믿어야지.’

‘선녀님···.’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해. 여기 지후까지 있으면 내 힘이 모자라.’

지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칼잡이에게 쏠렸다. 무사 역시 밧줄만 잡은 채 칼잡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지후는 뒤로 돌아 절뚝거리며 문밖으로 나갔다.


비현공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 속의 다른 그림자를 보려는데 사람들의 소리가 더 거세졌다. 죽여라, 죽여라! 날 선 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횃불, 사람들의 외침, 발을 구르는 소리.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현공이 손을 들었다 내리자 칼잡이의 칼이 높이 올라갔다.


그 순간 마당에 내려앉는 하륜과 담아의 모습이 보였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칼이 내려왔고 목에 서늘한 쇠의 느낌이 닿았다. 목걸이 끈이 잘리며 나무 가락지가 저 멀리 굴러갔다.


세상이 아득하게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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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6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6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38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5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1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1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1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29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2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1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5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29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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