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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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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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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8.0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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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DUMMY

그만, 그만!

비명을 내질렀다. 있는 힘껏 눈을 떴다. 내 방 천장이 보였다.

휴우-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잃었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하륜과 처음 만난 중산의 숲과 그가 빛의 사람인 줄 모르고 찾아다닌 기억. 목에 선명한 흉터가 남은 이유까지.


이렇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몰랐다니. 기억을 잃은 나를 보며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준이 누구의 기억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악몽을 꾸었구나.

칼끝의 서늘함이 생생했다. 그때 목걸이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가슴이 찌릿찌릿하며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잖아. 기억이 돌아왔으니 기뻐해야지. 하륜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잘된 일이잖아.

내게 하는 위로는 공허한 혼잣말이 되었다.


군중의 외침이 들렸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생생한 현재였다. 허공의 군중들이 어지러이 돌더니 검은 그림자가 되어 꿈틀거렸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사건은 그때 끝나지 않았던 거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금방이라도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뒷마당으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빨리 정신 차려야지. 주저앉아 숨을 골라도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세상의 틈, 회오리치는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동명의 결계 안이었다.

싱그러운 초록 잎이 하늘을 덮었다. 잎과 잎 사이 그물코 같은 하늘이 비쳐보였다.


누워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정신을 잃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구나.


“깨어났느냐? 허허허, 골칫덩이를 또 만나다니 너와 인연이 깊구나.”

동명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머리로 직접 전해지는 굵고 낮은 목소리. 여전히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제가 왜 여기 있죠?”

반듯이 누운 채 물었다. 손가락 끝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뭇가지 하나가 내려와 이마에 얹혔다. 시원하고 상큼한 향기가 났다.

“봉인된 기억이 풀려서 무리가 간 거야.”


그것이 봉인할 정도의 기억이었나. 되살아난 기억을 곰곰이 되새겼지만 천사장이 봉인할 정도로 충격이 심하지 않았다.


천사들은 사람을 믿다가 치명상을 입기도 한다. 사람의 손에 소멸한 천사도 있다. 인간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는 것을 어려워한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또 나약한지 알기에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봉인하는 천사는 없는데.


생각해보니 목에 남은 흉터도 이상했다. 치유의 알에서 사라졌어야지.


“하륜이 왜 차원의 문지기를 하겠다고 했는지 알겠구나.”

동명이 말하자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공기가 등을 떠받쳐 올려주었다. 누워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했다.


“너를 기다린 게지.”

“저를요?”

“너를 여기 데려다 놓은 걸 보니···.”

“하륜님은 어디 갔어요?”

“기연랑이 많이 약해져서 도와주러 갔단다. 곧 돌아올 거다.”


“저 왜 이렇게 힘이 없죠?”

“이런. 깨어났으니 물을 마실 수 있겠구나.”

둥실둥실 뜬 채로 우물까지 옮겨갔다. 이끼 낀 바위 옆에 사뿐히 내려섰다.


바위를 짚고 우물을 내려다보았지만 깊은 구멍 아래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졸졸 물소리가 났다.


두레박도 없고 그릇으로 쓸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어떻게 떠올리나 고민하는데 우물이 알려주었다.


눈앞에 물이 찰랑거린다고 믿고 두 손으로 건져 올렸다. 정말로 손에 물이 가득 담겼다. 요령을 터득한 것이 기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감사 인사를 하고 몇 차례나 연거푸 들이마셨다. 갈증이 사라지자 통증도 사라졌다. 역시 결계의 정수.


조금 기다리니 몸에 힘이 돌기 시작했다. 결계 안을 걸어 다닐 정도가 되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사뿐히 내딛는 발소리까지 선계의 숲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이 평화로웠다.


시냇물 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보았다.

유리처럼 맑은 물이었다. 흐름을 못 느낄 정도로 느려서 하늘과 나무가 깨끗하게 반사되었다.


내 모습이 물에 비쳤다. 며칠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천사로 돌아가고 있구나.

‘어? 목에 있던 흉터가 사라졌어!’

흉터가 있던 자리를 더듬었지만, 울퉁불퉁했던 자국은 사라지고 매끈했다.


“부작용인 게지.”

동명의 목소리였다. 부작용이라니.


“너를 구하려는 천계의 힘과 선계의 힘이 한 번에 부딪친 흔적이야.”

그때 하륜과 담아가 함께 왔었지. 기억 속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아무리 부작용이라 해도 치유의 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았다니.


“그건 너의 의지란다.”

“저의 뜻이라고요?”

“기억을 잃으면서도 어떻게든 단서를 남기려는 너의 의지 말이다.”

하륜을 향한 마음이 그렇게 강렬했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명의 가지 끝이 흔들렸다.

“손님이 오셨구나.”

“손님요?”

“결계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아직 위험하니까.”


세 장의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을 따라 숲길을 걸었다.


결계가 끝나는 곳에 천사장과 담아가 보였다. 담아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들었다. 투명한 경계가 쿨렁거렸다. 비눗방울 속에 갇혀있는 것 같네.


팔을 뻗어 담아의 손을 잡으니 결계가 담아와 천사장을 사뿐히 끌어당겼다.


담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괜찮아? 몸은 어때?”

“좋아졌어. 결계의 우물 덕이야.”


바윗돌 세 개가 스르르 날아와 내려앉았다. 반듯한 바위가 손님용 의자가 되다니. 결계에 어울리는걸.


천사장은 반가운 표정보다는 근엄한 표정이 더 강했다.

“내 너의 엉뚱함을 과소평가했구나. 사람의 몸이 되면 하루도 못 버티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죄송해요. 많이 걱정하셨죠?”


“한 번 골칫덩이는 끝까지 골칫덩이라니까. 이제 다른 일을 맡아야 하니 천사의 몸을 돌려주마.”

“다른 일이라니요?”

“난들 아니. 그러라고 하시니 그렇게 해야지.”


지금이 천사장에게 물어볼 기회였다. 계속 궁금했던 것, 구태여 기억을 지운 이유 말이다.

“천사장님, 기억은 왜 지운 거예요?”

“어허, 그것까지 생각났니?”

“갑자기 생각났어요. 무슨 이유가 있어요?”


담아도 천사장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천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때 발작을 일으켜서 어쩔 수 없었단다.”

“발작도 했다고요?”


담아가 그 당시를 생각하는지 진저리를 쳤다.

“네가 칼에 맞는 순간, 시간을 정지시켰는데, 동시에 하륜님도 시간을 정지시킨 거야. 발작이 일어날 만도 했지.”


담아와 하륜의 힘이라면 엄청난 힘이 부딪쳤구나. 그 정도면 부작용이 안 일어날 수 없지.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기억이 지워졌고 다른 천사들이 흩어놓았어. 너는 찾던 것을 찾았으니 인간계에 머물겠다고 했지. 천사직을 내버리고.”


천사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직서 쓰는 것도 버릇이라니까. 할 수 없이 기억을 지운 거다. 따지고 보면 이천 년 전에 한 번 만난 사람을 찾겠다고 그 난리가 난 거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천사장은 내가 찾던 사람이 하륜인 줄 몰랐을 테니.


담아가 내 목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소리쳤다.

”흉터가 없어졌어!“

”응.“

”동명의 결계에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니.“


”단서를 찾았기 때문에 필요 없어진 거지.“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담아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천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할 일이 많아서 이만 돌아가야겠다. 천사의 몸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천사장이 먼저 결계 밖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담아가 내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인간계에 돌아가면 살랑을 조심해. 너한테 계속 접근할 테니.“

”알았어. 고마워.“

인사말을 덧붙일 사이도 없이 그들은 결계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천사로 돌아간다···. 진짜 싸움을 시작할 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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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5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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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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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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