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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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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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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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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3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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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DUMMY

천사장이 정원을 걷자고 할 때는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딱히 잘못한 일이 없으니, 야단치는 건 아닐 테고. 새로운 임무가 나왔나 보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맡을지 천사장을 따라 나갔다.


천사장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도 심각했다. 화가 난 건지 걱정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틀림없었다.


그를 따라가면서도 알록달록 화려한 꽃에 홀려 눈을 뗄 수 없었다. 천사장이 멈춰선 것도 모르고 걷다가 부딪쳤다.

아코, 이마를 문지르며 얼른 옆으로 물러섰다.


“가온아, 요즘 뭘 찾고 다니느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뭘 찾냐고.”

“그게··· 운명의 상대라고나 할까요. 인간계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봤는데요. 글쎄, 사람 몸에서 빛이 나오더라고요.”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건 운명이구나! 한 번에 알아봤죠.”


우연히 한 번 마주친 사람이지만 그에게서 나오던 빛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전 결심했죠.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천사장은 걸음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매번 헤매고 다니느냐? 요즘은 일도 제대로 안 하더구나. 천사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텐데.”

“죄송해요.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요. 인간계에는 없나 봐요.”

“어디서 봤는데?”


대답하기 난감했다. 분명히 보긴 봤는데.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저기 찾아다녔지.

“그걸 모르겠어요. 한 번밖에 못 봤거든요.”

“언제였는데?”

“음, 한 이천년쯤 되었나···.”


천사장이 버럭 소리쳤다.

“인간계에선 벌써 수명을 다했지! 그 정도면 무덤도 못 찾을 거다.”


“흐흑. 사실은 이름도 잊어버렸어요. 생김새도 어렴풋하니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그 빛만은 또렷하거든요. 생각만 해도 아련하고 그립고 애잔하고 쓸쓸하고.”

이름이나 겉모습은 몰라도 만나면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인간계에 사람만 사는 건 아니잖아요. 정령이나 도깨비 아닐까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한숨을 쉬었다. 소중한 나의 사랑은 어디 있는 것일까.


아련한 분위기를 깨며 천사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인간계와 얽히지 않는 것이 좋아. 다른 천사들과 다르니까. 달라도 너무! 아무래도 다른 일을 맡겨야겠구나.“

”안돼요, 전 그 빛을 찾아야 해요. 운명의 상대라니까요.“


천사장의 팔을 잡고 매달렸지만 천사장은 단호했다.

”상대를 찾기 전에 너 자신부터 찾아라. 네가 누구인지.“


천사장의 말대로 그렇게 오래 찾아도 없다면 정말 죽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한번 만요. 한 번만 더 찾아보고 다른 일을 할게요.“

”이번 한 번뿐이다. 알았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에는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정말로 그가 죽었다면 무덤이라도 확인하겠노라 다짐했다.


*


이번에 맡은 일은 한 아기를 살리는 일이었다.


가뭄이 계속되어 마을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먹을 것이 없는데 조세는 악착같이 걷어가니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졌다.


아기가 태어나도 죽게 내버려 두었다. 젖이 나오지 않으니 아기를 먹일 수 없었고, 설령 며칠 버틴다 해도 백일을 넘기기 어려우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계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 천계에서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손을 대면 엉뚱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일일이 천사가 나서지 않지만, 이번에는 두 엄마의 소원이 접수되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상암현 변두리 마을로 내려갔다. 초가지붕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기를 살리는 일이니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산파 노인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를 자신의 조수라고 믿게 하는 건 간단했다.


문간방에서 기다리니 한 남자가 허둥대며 달려왔다. 드디어 왔구나.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산파는 내가 있는 방에 대고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겨. 기다리다 숨 넘어가겄네.“

”금방 나가요.“

나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해가 막 가라앉은 시간이라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남자는 마음이 급한지 서두르다 비틀거렸다.

산파는 내게 당부했다.

”얼라가 나오면 못 울게 막아야 혀. 얼른 델구 나가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모의 진통이 낮부터 시작되었다는데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힘을 줄 수도 없겠지. 산모가 고통을 덜 느끼도록 손쓰며 아기를 기다렸다.


오랜 진통 끝에 아기가 나오자 산파는 재빨리 아기의 입을 막았다. 아기의 숨이 잠시 멎었다.

나는 아기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부엌에서 물을 끓였다. 매운 연기에 눈도 뜨지 못하리라.

울타리 밖을 둘러보았다. 늦은 밤이라 골목에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아기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아기는 작은 소리를 냈지만 곧 얌전해졌다. 초점을 맞추지도 못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오물거렸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아기를 안고 약속한 공간으로 넘어갔다. 아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상암현 최고의 부자이며 권세가라는 대감댁에도 아기가 태어난다. 그곳에서도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멈출 것이다.


인간계의 일이 늘 그렇듯 사람이 사람의 일을 망쳐놓는다.

그 집의 맏며느리는 건강한 아기를 낳아 의무를 다하기를 오랫동안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나 시집살이가 고되니 유산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조산기가 있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부덕이라며 오히려 호통 쳤는데, 사산한 것이 알려지면 며느리의 목숨도 위태로울 것이다.


그 집에 산파로 들어간 천사가 죽은 아기를 데려왔고 우리는 무사히 아기를 바꾸어 돌아왔다. 아주 짧은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당에서 포대기를 안고 서성이자 남자가 부엌에서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불쌍한 것. 복 없는 것. 이 눔아 왜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겨.“


아기를 끌어안고 남자는 주저앉아 통곡했다. 방에서도 산모의 신음과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기를 품에 안고 삽 한 자루를 들고 나갔다.

”애비가 장사라도 치러주마. 다음엔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겨.“


그 모습이 애처로워 쉽게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환난이 지나고 내년에는 이 집에도 좋은 소식이 들기를 축복해주었다.


자신의 아기가 대감댁 장손으로 자랄 미래는 모르는 편이 좋겠지.

이들의 소원은 아기가 사는 것이고, 대감댁 며느리의 소원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는 것이었으니.


*


나는 계속 문간방에서 머물렀다. 담아가 올 때까지 산파의 조수 행세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일을 마치면 여기서 담아를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천사장에게도 담아와 같이 돌아가겠다고 말했는데 그건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담아의 일은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아는 남쪽에서 일어난 전쟁을 중재하러 갔기에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욕심에 끝이 없으니 전쟁은 점점 참담해졌다. 의식의 혼란 없이 자연스럽게 싸움을 끝내려면 치밀한 계산과 인내가 필요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를 사로잡은 신비한 빛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가뭄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아지니 비를 부르고 싶었지만, 신의 지시 없이는 천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도 사람들처럼 때를 기다려야 했다.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기적을 경험하면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기적이 나타나기만 기다린다. 조금만 노력해도 풀릴 어려움에도 마찬가지다.


왜 이번에는 기적이 안 일어나는지 오히려 하늘을 탓한다.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경험한 기적에 감사하며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함부로 기적을 베푸는 일은 금지되었다. 만일을 위해 신의 심부름이 아니면 능력도 제한되었다.


*


쾌청한 날씨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오후, 장터에서 사탕을 사 먹으며 느긋하게 시장 구경을 할 때였다.


한 남자가 그림을 구경하는 손님의 주머니를 훔치고는 쏜살같이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도둑이다!“


주인이 소리치기도 전에 나는 소매치기를 쫓아 뛰었다. 뛰면서도 속도를 조절했다. 사람처럼 움직여야하므로 조심할 수밖에.


뛰다보니 누군가 옆에서 같이 뛰고 있었다. 그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음은 날고 몸은 뛰는 사이, 그는 전력 질주하여 소매치기를 앞질렀다.

그가 도둑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소매치기의 어깨를 누르고 팔을 꺾었다.


주머니 주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주머니는 무사히 주인에게 돌아갔다.

도둑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뛰어온 포졸에게 소매치기는 넘겨졌다.


이 많은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 불꽃놀이를 본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갑작스레 마무리된 상황이 떨떠름해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해결되었으면 그만이지.


정작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혼자 으쓱대며 치마에 묻은 흙을 털었다. 갑자기 뛰느라 떨어뜨린 사탕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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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6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2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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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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