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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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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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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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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DUMMY

걱정하지 말라고 큰 소리 쳤지만 사실 두려웠다.

검은 그림자의 서늘한 기운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래도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의연하고 씩씩해야 담아가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담아는 영혼수집가에 대해 조사하고 가능하면 생포할 계획이라고 했다.

”오늘은 언제 돌아올지 몰라. 무조건 조심하고 있어.“

”귀에 딱지 앉겠다. 그 말만 벌써 오십 번은 한 것 같아.“

”무슨 일 있으면 얼른 하륜님에게 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니까.“


오늘은 나가지 말고 복원술이나 연습해야겠다.

담아가 나가자 깨진 그릇을 손질하며 벗겨진 칠을 되살렸다. 아무리 신경 써도 내가 작업한 것은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아무가 만지면 새것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인데.


찻잔 하나를 그럭저럭 끝내고 다음 접시를 집어 드는데 은서가 작은 화분을 안고 들어왔다.

화분 윗부분이 깨져있었다. 다행히 어린 영산홍은 무사했다.


“아침에 보니까 조각이 떨어져 있더라고요.”

”어디 부딪쳤나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이상해요. 조각이 그대로 있어서 가져왔어요.”


아무가 아프니까 나한테 온 거였다.

“해볼게요. 잘 돼야 할 텐데요.”

정성을 다해 접착제를 붙이고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문질렀다.


나무뿐 아니라 화분도 정령의 숲에서 만든 것이라 손이 닿기만 해도 느낌이 달랐다. 대지의 품속에 안기는 기분이었다.

흔한 영산홍이었지만 기운이 달랐다. 초록 잎 하나하나가 힘 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어린 나무를 위해서라도 잘 고쳐줘야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쓸 수 있을 정도면 돼요.”

내가 너무 열중했는지 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화분을 손질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온님도 솜씨 좋은데요? 전혀 표시가 안 나요.”

“정령의 화분이라 그런가, 내가 보기에도 잘된 것 같네요. 하하.”

역시 정성이 최고의 방법이구나.

뿌듯해 하는데 벌컥 가게 문이 열렸다.


유미가 뛰어들었다.

붉은 뺨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울어서 퉁퉁 부은 눈, 입고 있는 옷도 무릎이 나온 운동복이었다.


유미는 울면서 소리쳤다.

”아줌마, 아줌마. 우리 엄마가 아파요.”


은서를 알아보고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엄마 좀 살려줘요. 언니 얘기를 했더니 갑자기 쓰러졌어요.”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을지도 몰라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지. 쓰러져계실 것 아냐?”

은서가 소리치자 유미가 버둥거리며 일어섰다.


”일일구, 일일구.”

운동복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주머니는 비어있었다. 유미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은서는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잠깐 생각하더니 갑자기 화분을 끌어안았다. 저 화분을 안고 어디 가려고?

은서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온님, 같이 가요.”


나야 언제나 나갈 준비가 되어있으므로 재빨리 따라 나섰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스쿠터 타고 가나요?”

“그 고물 스쿠터보다는 뛰어가는 게 빨라요.”

유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휘청 걸었다.


은서는 가만히 서서 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미가 다닌 궤적을 찾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정령의 눈에는 보일 것이다.


”그런 때는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 해. 골든타임을 지나면 안 되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여기 올 생각밖에 안 났어요.“

”어쩔 수 없지.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은서의 걸음은 쫓아가기 어려웠다. 정령의 춤을 추던 몸놀림으로 춤추듯 껑충껑충 바람을 타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나도 유미의 손을 잡고 빨리 걸었다.

유미가 제정신이었다면 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을 알았겠지만 지금은 못 느낄 것이다. 눈물에 콧물까지 섞여 숨쉬기도 벅찰 것이다.


아이의 집은 산등성이를 따라 지어진 오래된 동네에 있었다. 유미는 이 층짜리 낡은 공동주택 중 하나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엄마!“


들어가자마자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이부자리에 눕히고 손과 말을 마사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은서가 여자의 손을 잡고 가만히 기다렸다.


여자가 눈을 떴다.

”서야···?“


여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은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없이 손만 붙잡았다.

”서야니?“

”네. 저예요.“

은서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를 보게 되다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여자가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북받치자 가쁜 숨을 내뱉었다.


”조금 기다렸다 얘기하세요. 지금 상태가 안 좋아요.“

나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천사장의 봉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능력이 돌아왔으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여자의 숨이 편안해졌다. 숨을 고르면서도 여자는 은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해파님은?“

”소멸하셨어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며 결계 밖으로 나가다가.“


”흑흑···. 유미가 태어날 때···.“

이번에는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여자는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이름이 한송화라고 알려주었다. 그녀가 은서를 낳고 정령의 숲에서 나간 일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원래 몸이 약했대요. 정령의 숲에서 나오는 기운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은서도 그것을 기억했는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은 본 적이 없대요. 내가 엄마를 닮아서 아주 예쁘다고 했거든요. 언젠가 엄마를 보면 금방 알아볼 거라고 했어요.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라고. 아빠의 표현이 참 재미있지 않아요?’

송화를 다시 보았다. 확실히 은서와 닮았다.

사랑에 빠지는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송화는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미리 준비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 건너뛰며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세히 말하기에는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정령의 숲에서 지내다가 인간계로 돌아온 후, 송화는 부모의 강요로 결혼했다. 남편은 이 년 전 사고로 떠났고 혼자 유미를 키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송화는 차를 대접한다며 일어나려 했다. 유미가 부엌에서 투덜거렸다.

”물 끓였거든요. 엄만 가만히 계세요. 또 쓰러지면 안 되니까.“


가게에 투정부리던 유미는 그 나이에 맞는 아이였는데.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계의 아이들은 복잡한 사정이 많구나.


유미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은서는 가져온 화분을 송화의 머리맡에 두었다.

”이건 정령의 나무예요.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


은서는 화분을 쓰다듬었다.

”이게 왜 깨졌나 했더니···. 아빠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닌가 봐요. 여기 있었던 거죠.“

은서도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천사의 은총도 받게 하려던 거겠죠?“

은서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정령의 나무라.

온실 같은 은서의 방이 생각났다. 원룸인데도 나무들이 가득 했다. 그곳도 작은 정령의 숲이구나.


차를 마시고 은서는 내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게요. 가온님 먼저 가세요.“

”알았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송화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유미를 불렀다.


내가 부르자 유미는 퉁명스러운 중학생 눈빛으로 돌아왔다.

”왜요?“

”데려다줘야지. 나 길 몰라.“

”어휴, 아줌마. 온 길도 몰라요?“


“유미야.”

송화가 부르자 유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도 얘기 듣고 싶단 말이에요.”


“네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은서는 저 모습 그대로일 텐데 뭐가 급하다고?”

“네?”

이번에는 유미가 따라 나왔다.


“엄마는 괜찮을 거야. 은서님은 정령의 에너지가 강하거든.”

“언니는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아까 엄마가 얘기하셨잖아?”


“그러니까···, 정령과 인간의 혼혈?”

“응. 네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저 모습일 거야.”

“아우씨, 나를 그렇게 낳아주지.”

유미는 허공을 주먹으로 쳤다.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는 건.”

“쳇. 아줌마는 정체가 뭐예요?”

“나? 천사라니까.”

“아휴. 진짜. 아줌마가 무슨 천사예요? 날개도 없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사 그림에 나오는 그런 날개 말이지. 그건 날개가 돋은 것이 아니라 옷에 붙어있던데. 날개옷인가.

천사가 날개로 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인 장치가 필요하긴 하지.


날개 달린 천사를 생각하니 궁금해졌다.

등에 날개가 달리면 옷을 어떻게 입지? 옷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날개를 빼내나? 지퍼를 채워서 열었다 닫나.


혼자 상상에 젖어 걷다 보니 어느새 가게 앞이었다.


“가끔 놀러 와.”

내 말에 유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자주 갈 거예요.”

유미는 꾸벅 인사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제대로 인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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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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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1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2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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