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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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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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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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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우연을 가장한 만남

DUMMY

은서가 한 쌍의 새로운 커플을 위해 계획서를 만들었다.

‘오작교 프로젝트.’


글 쓰는 사람답게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갤러리에서 하는 모임에 영준을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 이미 서로 알 수도 있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된 두 사람을 달숲의 특별 이벤트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벤트요? 무슨 이벤트?”

“이름하여 스페셜 컬렉션 데이! 달숲에서 여는 행사죠.”

“여기서요? 컬렉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은서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지금부터 만들어야죠. 일단 가온님의 초현실 작품과 엄마의 인형 옷, 아무님의 소장품이 있고요. 하륜님의 물건 중에서도 쓸 만한 것이 있을 거예요. 이 기회에 창고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제 것이 초현실 작품이에요?“

”정체를 숨긴 추상이잖아요.“

이런. 나름대로 현실을 재현한다고 한 것인데 정체불명으로 보였나.


은서는 이미 갤러리 모임 일정도 확인해 놓았다. 그녀의 추진력과 적극성은 존경할 만했다.

”다음 주에 갤러리 창립기념 행사가 있어요. 10주년이라고 했던가. 거기 초대할게요.“


”초대하는 방법도 있군요?“

”안내장을 보내는 거예요. 일단 갤러리 관계자 명단에 넣어 일괄 발송하죠.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한데···.“


은서는 팔짱을 끼고 계획서를 노려보았다.

짧은 탄식이 몇 번 지나고 은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륜님이 암시를 걸면 되겠네요. 꼭 가보라고.“


그런 암시라면 나도 할 수 있지만 나서지 않기로 했다. 영준에게는 아직 지후가 겪은 기억 찌꺼기가 남아있으니.


”갤러리에서는 저와 바우가 소개하면 돼요. 가온님은 이제부터 이벤트를 준비하시고요.“

”알았어요. 아무님과 하륜님께도 부탁할게요.“

은서는 스페셜 컬렉션 데이의 기획안도 내놓고 갔다. 나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날짜는 앞으로 삼 주 뒤 토요일 오후 두 시부터, 장소는 달숲과 가게 앞 공터라고 자세히 적혀있었다.


컬렉션은 네 개의 테마로 나누는데 초현실, 심해용궁, 키덜트, 빈티지였다.


내가 준비할 물건은 초현실이었다. 테마별 담당자도 적어놓았고 이 주 이내에 물건을 준비하고 인터넷에도 올린다는 전략이었다.


그럴듯해 보였다. 원래 목적은 영준과 이현이 가까워지는 것인데 이렇게 보니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떻든 재미있겠다.


*


하륜의 카페에서 아무를 불렀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스페셜 컬렉션 데이 행사에 물건을 내놓을 수 있는지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둘 다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물건은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천 년 동안은 필요 없어서 말이죠. 쓰던 것 전부 내놓을게요.“

아무는 신이 나서 말하는데 하륜은 여전히 진지했다.


”가능하긴 하지만 적당한 것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지하창고에는 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하륜이 컵을 닦던 움직임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주인이 따로 있다면 다른 문지기를 말하는 건가.

”누구 건데요?“

”손님들이 놓고 간 것이 많아요. 찾으러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안 왔어요.“


”예? 그럼 이천 년 전부터 쌓인 거라고요?“

”그렇게 되나요?“

”그 정도면 주인이 없는 거죠. 창고의 먼지와 갇힌 공기보다는 새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무가 빨대로 테이블을 톡특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대신 적당한 것을 찾아야 해요. 너무 비싼 것도 안 되고, 너무 커도 안 돼요. 추적 들어오면 골치 아파요.“

”소품샵에 어울리는 작고 앙증맞고 귀여운 것으로 통일하죠. 어때요?“


하륜은 여전히 묵묵부답인데 아무가 엄지를 치켜 보였다.

”오케이. 감 잡았어요. 이참에 짐 정리도 하고 잘됐네요.“


”그런데 왜 아까부터 어디 갈 것처럼 말해요?“

”아하하, 농담, 농담. 어쨌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아무는 웃으며 말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와 꽃술이 없는 파라다이스빌라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아무가 말했었지.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으면 언제 떠나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가 복원술을 왜 가르쳐주는지 아냐고 물었는데···.


아무는 말없이 싱글거리며 컵 밑바닥을 빨대로 불어댔다. 하륜을 쳐다보았지만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는 주스 방울이 목에 걸렸는지 갑자기 기침하면서 일어섰다. 허리를 구부리고 뒷짐을 진 채 잔기침을 몇 번 더 뱉었다. 어깨를 두드리며 천천히 말했다.


”요즘 기력이 떨어져서···. 아무래도 요양이 필요하지 싶네 그랴.“

쉰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천천히 카페에서 나갔다.


*


화려하게 세상을 물들이던 봄꽃이 지고 여름이 다가왔다. 계절의 변화를 이렇게 가까이 맞는 것이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신기했다.


보면 볼수록 곳곳에 신의 손길이 숨어있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우고 잎을 키우는 들풀부터 환경에 적응해온 모든 생명들이 가슴 벅찬 감동을 주었다. 신의 창조는 현재진행형이라더니 그 말 그대로였다.


새벽마다 하륜과 함께 산책도 하니 차원의 문지기로 일하는 것도 행복했다. 기연랑이 있고 은서와 바우가 같이 있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새벽 산책은 나의 어리광에서 시작되었다. 중산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다를 것 없는 일상이 너무 허전했다.

”같이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하륜이 싱긋 웃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면 녹아버린다니까요. 아후. 숨을 들이마셨다.


”뭘 하고 싶은데요?“

”음. 아침마다 산책한다거나. 맞다! 전망대까지 갔다가 산책로를 도는 거예요.“


”좋은 생각이네요. 요즘은 길 잃은 물건 구하러 안 나가요?“

”그것도 해야죠. 그건 새벽에···.“

대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져보니 시간이 빠듯하여 말끝이 흐려졌다.


날아다닌다면 모를까 존재를 들키지 않게 힘을 조절하면서 사람처럼 지내려면 기력이 많이 필요했다.

다시 천사의 몸이 되었다고는 해도 인간계의 독소가 쌓이지 않게 관리도 해야 했다. 이래서 인간계에서도 수련이 가능하구나.


”해 뜨기 전에 함께 다닐까요? 길 잃은 물건 만큼 길 잃은 사람도 많으니까요.“


하륜이 내 손을 잡았다.

아싸, 이런 걸 일거양득, 일석이조, 일전쌍조라 하는 거군.

”하륜님이 간다면 어디든 제가 지켜드릴게요.“


”영광이에요.“

하륜은 웃을 때 더 빛이 났다. 저 빛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다행이야.


*


카페가 끝나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얘기했다. 일상을 공유하다니,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요령도 알려주었다. 인간계에서의 수련 방법에 대해서도 들었다.


“한 명의 사람은 힘이 없지만 모이면 거대한 생명체 같아요. 선계보다 변화무쌍하죠. 매 순간 조금씩 달라져요. 꽃도 지난해의 꽃이 아니고 물도 어제의 물이 아니니까요.”


차원의 문지기들이 저쪽 차원으로 넘어가서 힘들었다는 기연랑의 말이 생각났다.

“하륜님은 다른 차원으로 갈 생각은 없어요?”

그가 내 볼을 쓰다듬었다.


“천사는 이쪽 차원에만 있으니까요.”

그의 농담에 진지한 표정을 하고 싶었지만 벌써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준씨 일은 잘돼가요?”

“예. 이현씨와 인사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았대요.”

다음 단계인 스페셜 컬렉션 데이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후와 영준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행사에 대한 생각으로 억지로 방향을 돌렸다는 것이 맞을지도.


“서운해요?”

하륜이 물어보는데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모르겠어요. 이런 게 시원섭섭한 걸까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인간계에 살다 보면 사람처럼 느끼게 되니까요. 조급해지기도 하고 번민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게 될 거예요.”


*


이른 새벽부터 뒷마당의 나무를 손질하느라 다른 날보다 늦게 산책을 마쳤다.


큰 도로 건너편에 언뜻 영준이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대형 트럭이 지나가는 바람에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빌딩 뒤편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딘지 눈에 익었다.

내가 잘못 보았나?


영준을 생각하니 행사 준비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달숲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초현실 작품을 이어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은서가 테마별로 벽장식도 하자고 해서 장식을 붙이기로 했다.


행사에서 대접할 음료와 과자는 꽃술과 하륜이 맡기로 했으니, 여기서 영준과 이현이 운명적인 재회를 하도록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영준이었다.


과거를 온전히 기억해낸 이후로는 그의 전화를 받아도 예전처럼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악몽도 꾸지 않았다.


“어제는 전화를 안 받아 걱정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목이 잠겼는지 그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어제도 전화했다고? 또 소리를 못 들었구나. 아니면 충전하는 걸 잊었거나.


“아,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긴 해요. 영준씨는요?”

“카페 사장님과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도 같이 있던데.”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좀 시간이 돼서요. 그쪽으로 갈게요.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요.”


영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목소리가 왜 이리 까칠하지.


“내가 나갈게요. 네거리 빌딩 앞이요. 근처에서 살 것도 있거든요.”

아침에 언뜻 영준을 보았던 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가며 카페를 돌아보았다.

창문으로 하륜이 보였다. 손님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얼른 몸을 피했다.


도로 맞은편에 서 있는 영준이 보였다.

횡단보도까지 오십 미터 남았는데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자동차마저 빠르게 지나다녔다.


시끄럽게 지나가는 차들 사이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영준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나는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발 앞에 놓인 검은 물체가 수상했다. 물건이 움직이다니.


위험을 알릴 사이도 없이 바닥에 있던 물건이 영준의 손으로 튀어 올랐다. 비디오 게임기처럼 보였다. 양손으로 잡을 수 있고 스틱도 보였다.


영준이 검은 스틱을 잡는 순간, 그의 몸이 털썩 내려앉았다.

게임기는 그의 손에서 떨어졌지만, 바닥에 닿지 않고 스멀스멀 모습이 바뀌어 검은 그림자가 되었다.


‘살랑?’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순간 살랑은 바로 내 앞에 와있었다.


“잘해보게. 크크크.”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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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4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7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6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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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1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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