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46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28 14:10
조회
31
추천
0
글자
11쪽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DUMMY

주위는 온통 어둠이었다. 검은 안개가 공간을 채웠다.

저 멀리 반대편 문이 희미하게 점처럼 보였다.


아무를 따라 문턱에 발을 들여놨는데, 어느새 나무로 된 길 위에 서 있었다.


구름다리처럼 생긴 나무 길이 교차하며 아래위로 까마득히 겹쳐 있었다. 나무 길 사이로 드넓은 광야가 보였다. 초록빛 광야는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대기는 상쾌하고 하늘은 투명했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데 하나는 은빛이었고 다른 하나에는 아련하게 붉은빛이 감돌았다.


“여기는 아직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순수 그 자체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돌아보니 삽살이가 다가왔다. 참새도 삽살이 등 뒤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너희들, 말할 수 있구나.”

“여기는 우리 차원이니까요.”

“너도 문지기였어?”


아무가 앞장서며 설명했다.

“문지기라고 하기에는 힘이 부족해요. 사백 년쯤 뒤에는 가능하겠죠.”

“말할 줄 알면서 왜 조용히 있었죠?”

“지금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알아듣는 거지.”

“그런가요? 그럼, 왜 여태까지 못 알아들었죠?”

“그러니까요. 힘이 더 생겨야 차원을 건너가서도 소통할 수 있다고요.”


통나무로 된 길은 저절로 움직였다. 서로 붙었다 떨어지며 우리가 발을 딛는 대로 옆으로, 아래로 옮겨주었다.

이리저리 건너가며 내려다보니 중간 쉼터처럼 길과 길이 만나는 넓은 공간이 보였다.


움직이는 길에 적응하니 지평선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다채롭고 생기 있는 숲이 아득히 이어졌다.

맑은 강물을 따라 동물들이 한가로이 다녔다. 우리 차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이었다. 천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워요. 문지기들이 차원을 넘어간 것도 이해되네요.”

“맞아요. 나도 여기 와야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이대로 지켜지면 좋을 텐데.”


“차원이 맞닿아있는데 이렇게 다르네요.”

“서로 영향을 받긴 해요. 여기는 일곱 번째 지구의 과거일 수도 있고 여덟 번째 지구의 미래일 수도 있어요.”


아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차원은 훨씬 경직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육체에 갇혀 생각하니 그렇겠죠. 덕분에 편하게 차원의 문을 지킬 수 있는 거고요. 우리를 구분할 줄 모르니까.”


그의 목소리가 달라져서 돌아보았다.

여기 들어와 점점 젊어지더니 완전히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동굴에서 보았던 바위 인간도, 아무 할아버지도 아니었다.

이 모습이 진짜 기연랑인가.


“기연랑?”

내가 그의 몸을 가리키자 기연랑이 싱긋 웃었다.

“여긴 좋은 에너지가 넘치니까요.”

“보기 좋네요.”

“가온님도 천사로 돌아간 것 같아요.”


과연 몸이 훨씬 부드럽고 가벼웠다. 지평선을 살펴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응? 그런데 우리 신령수를 보러 오지 않았나?


“신령수는 어디 있어요?”

“이게 신령수예요. 우리가 걷는 이 길이.”

통나무로 만든 길인 줄 알았는데 그 길이 모두 나뭇가지였다니.


“여기서는 신령수가 차원을 지켜요. 아직 힘을 가진 생물이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차원의 문이 변덕을 부리지 않아서 한 번도 옮겨 다니지 않았어요.”


“힘을 가진 생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나요?”

“여기에서 살겠죠. 신령수와 같이 문을 지키면서. 언젠가 신령수도 수명을 다할 테고, 누군가는 계속 문을 지켜야 하니까요.”


이토록 아름답고 웅장한 나무가 사라지다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무는 다정하게 나무 기둥을 쓰다듬었다.

“신령수도 언젠가는 먹이가 되죠. 수명을 다하면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를 공양하는 거예요.”


신령수가 듣고 있을 텐데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울상이 되자 아무는 말을 바꾸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몇 천억 년 뒤 일이니까 미리 슬퍼할 필요 없어요.”

먼 미래의 일이라고 했지만, 구멍 난 마음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삽살이와 참새는 저쪽 가지에서 다른 삽살이와 참새를 만나 부둥켜안고 비벼대며 인사를 나누었다. 어쩐지 삽살개 같지 않더라니.


여기서 보니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개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초식 공룡을 닮았다. 참새는 콘도르와 비슷했다.

차원을 건너면서 거기 맞는 모습으로 바꾸었구나.


신령수의 가지 사이, 쉼터 같은 공간에 오니 나뭇가지 하나가 벤치처럼 구부러졌다. 즉흥적으로 의자를 만들다니!


“잘 오셨소. 새로운 문지기가 궁금했는데.”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신비로운 소리였다. 어린아이, 여자, 남자, 커다란 북이 울리는 소리까지 한데 어울렸다.


“당신이 가온이군.”

“네. 처음 뵙겠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신령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를 만나고 싶다니? 묘수의 차원에 가보자고 해서 그냥 따라온 건데.

기연랑은 모른 척 다른 곳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를 믿다니. 이번에도 너무 순진했어.’


가장 가까이 있던 가지가 스르르 움직여오더니 눈앞에서 멈추었다. 살랑거리던 나뭇가지가 뚜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발 앞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이럴 수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어, 어. 이거, 이거 제가 그런 거 아닌데요.”

“하하하하,”

신령수가 큰 소리로 웃자 가지 사이에 앉아있던 수천 마리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새들의 울음과 날갯짓이 엄청난 위력으로 주위를 감쌌다.

부딪히지 않으려 웅크리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기연랑도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미처럼 딱 붙어있었다.

신령수는 쉽게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당황한 것이 그렇게 재미있나.


잠시 후 새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선물이네.”

떨어진 나뭇가지는 스르륵 모양이 다듬어져 지팡이로 바뀌었다.


손잡이 부분은 더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군데군데 옹이가 있긴 해도 곧은 몸매를 가진 지팡이가 되었다.

모양은 지팡이라도 신령수의 몸 아닌가.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찌리릿 전류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무 향기와 함께 신령수의 힘이 느껴졌다.


기연랑이 바짝 다가왔다.

“와, 너무 하시네. 내가 달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시면서.”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너는 내 기운을 받아 살지 않느냐.”

신령수는 산들바람을 만들어냈다. 바람에 나무 향기가 실려 왔다.


은은하면서 강한 힘을 가진 향기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정하고 엄격하면서도 지혜로운 스승 같았다. 이 비슷한 느낌, 어디선가 느꼈는데.

맞아. 동명의 결계 안에서 느꼈던 기운과 비슷해.


“저 아이들에게 불과 도구를 알려주시오.”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뿌리 근처에 작은 정령들이 오르르 모여 재잘대며 까르르르 굴러다녔다.


“와, 너무 귀여워요. 작은 기연랑이네. 언제 저렇게 많은 자식을 낳았어요?”

“무슨 말이에요. 난 혼인도 안 했고, 저 아이들은 도깨비가 아니에요.”

기연랑이 발끈해서 대답했지만 그의 기운과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여기서 천년씩이나 머무는 거군요. 아이들을 키우느라. 와우, 힘도 좋으셔.”

살다 보니 내게도 기연랑을 놀릴 기회가 오는구나.


“저 애들이 나를 닮는 거예요. 인간계 사람들이 천계와 선계의 모습을 닮아 왔듯이.”

기연랑이 툴툴거리며 휙 돌아서더니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신령수의 잎이 산들거렸다.

“저절로 태어난 아이들이지. 내 뜻이 아닌 걸 보면 태어나고 싶은 그들의 의지가 있었던 거다.”

“그럼 여기도 사람이 나타나나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모르네. 완벽한 세상은 없으니까.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틈이지. 틈은 벌어지고 언젠가 무너지겠지. 별도 태어나 자라고 사라지듯. 그런 날이 올 테니 준비하는 것이오.”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이 땅에 멀리 퍼져 그곳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자라겠지. 처음부터 거기서 태어난 것처럼 이곳을 잊을 거요.”

신령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울컥했다.


신령수는 내가 앉은 가지를 움직여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정령들에게 불을 피우는 법과 꺼지지 않게 보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와 줄기, 돌을 엮어 도끼와 망치를 만드는 법도 알려주었다.

정령들은 금방 따라 했다. 심지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기연랑도 열심히 시범을 보였다.

“기연랑이 가르쳐줘도 되는 걸 왜 나를 불렀을까요?”

“글쎄요. 이 애들이 파견될 때라 그런가···.”


“여기 오면 뭘 하고 지내요?”

“그때는 이미 기력을 다 쓴 상태라 뭘 할 수가 없어요.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살죠. 시간의 흐름도 못 느껴요. 너무 편안해서 마치 공기가 된 것 같거든요.”


완벽하게 불을 피우는 정령들을 지켜보며 이곳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상상했다.

“여기에도 천사가 태어날까요?”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꼼꼼하게 마무리한 도끼를 들어 보였다.


“그래도 가온님 같은 천사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평소의 기연랑과는 다르게 진지하니 낯설었다. 여기가 묘수의 차원이라서일까.


신령수의 기둥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아무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돌아갈 시간이에요.”

“벌써요?”

“벌써라니요? 이틀이나 지났는데.”

“에?”

나는 들고 있던 돌을 놓치고 벌떡 일어섰다.


정령들이 달려들어 손을 잡아당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삼십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정이 흠뻑 들었다.

다음에 여기 올 때 이 아이들은 여기 없을 것이다. 가슴이 아렸다. 신령수의 지팡이를 꼭 끌어안았다.


기연랑의 뒤를 따라 차원의 문을 여는데 신령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것이 당신을 도와줄 거요.’


“이걸 어떻게 쓰나요?”

‘때가 되면 알 것이오. 당신과 당신을 부르는 존재 모두.’

나를 부르는 존재라니.


지팡이를 잡으니 어렴풋이 떠올랐다.

인간계에 내려오기 전 간절하게 나를 부르던 느낌. 그 느낌이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간직할게요.”

지팡이를 품에 안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4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7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6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2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2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9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30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