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지후는 곡괭이를 잡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저 사람에게 부탁하면? 상단에서 일한다니 많은 사람과 끈이 닿아있을 것이다.
사람인 척 숨어있는 선사를 찾을 수 있겠지.
‘지후를 만난 것도 그 빛과 나 사이에 이어진 끈일 거야. 어쩌면 계시일 수도···.’
거래를 해야겠다.
함부로 기적을 베풀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도 될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도와줄게요.”
“네? 정말요?”
지후가 뒤돌아 성큼 뛰어왔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녀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은혜라···. 그럼 날 도와줘요. 찾을 사람이 있어요.”
“걱정 마세요. 세상천지 안 다니는 곳이 없으니 꼭 찾아드릴게요.”
지후가 배시시 웃었다. 그 맑은 눈망울을 믿기로 했다.
수로를 놓는 일은 간단했다.
재료도 다 있고 위치도 잡아놨으니 거기 맞춰 옮기기만 하면 된다.
내 생각에 따라 나무통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지대와 함께 제 위치를 찾아 들어갔다.
지후가 어엇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순간 이미 깨끗하고 튼튼한 수로가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호수와 맞닿은 구멍을 뚫어주니 맑고 깨끗한 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줄기를 지켜보던 지후가 함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이렇게 멋진 광경은 처음이에요.”
지후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선녀님, 빨리 내려가 봐요. 저수지에 물이 잘 차는지 봐야죠.”
그는 마음이 급한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갔다.
저수지 바닥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곧 물이 차오를 것이다.
지후는 날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선녀님 덕분이에요.”
기뻐하는 지후의 모습을 보니 나도 흐뭇했다. 내가 한 일은 지극히 미미했지만.
*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거미줄 같은 좁은 골목이 많아 어디가 어디인지 혼자서는 길을 찾지 못했다. 천계에서도 길 잃어버리는 건 내 특기니까.
“선녀님은 누구를 찾으세요?”
“이름을 몰라도 찾을 수 있나요?”
“어떻게든 찾아낼게요. 제 소원을 들어주셨잖아요. 저도 선녀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게요.”
“목숨까지 바칠 일은 아니죠.”
지후는 자신만 믿으라며 큰소리쳤다.
집 앞에 이르자 지후는 주위를 돌아보고는 낮게 속삭였다.
“수로는 비밀로 할게요. 선녀님이란 사실이 탄로 나면 위험하거든요. 선녀님도 조심하세요. 네?”
목소리에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묻어났다.
드디어 빛의 사람을 찾는다니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나면 뭐라고 인사할까. 나를 알아보기나 할까.
그를 찾기 위해 단서가 더 필요하다. 생김새는 기억 못하니 분위기로는 찾기 어려울 거고.
빛이 난다는 것? 사람의 눈에도 그 빛이 보일까.
*
지후와 만나 어디부터 시작할지 상의했다.
신선의 호수와 멀지 않은 곳, 사람들에게 소문을 수집할 수 있는 곳은 역시 율천항이었다.
“거기 가면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무역항이니까 다른 나라 사람도 많아요. 단서를 찾기에는 가장 좋죠.”
“율천항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저 산을 넘어야 하니까 닷새는 걸려요.”
나 혼자라면 단숨에 날아가겠지만 지후와 함께이니 걸어야했다.
게다가 최대한 능력을 아껴야 했다. 신의 심부름이 아니면 천사도 한계가 있으니까. 혹시라도 잘못 판단하면 인간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지후는 채비를 갖추어 내일 동틀 무렵에 떠나자고 했다.
“어머니한테 인사하려고요. 오늘 저녁은 맛난 음식도 사드리고.”
지후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역시 나 혼자 찾아 나설 걸 그랬나.
*
뒤척이다 밤이 깊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는데 누군가 창문을 흔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지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녀님, 빨리 나오세요. 빨리요. 지금 당장 떠나야 해요.”
“무슨 일이에요?”
지후는 양손을 맞잡고 덜덜 떨었다. 쉬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등에는 봇짐을 짊어지고 채비를 다 갖추었다.
“저수지 물이 요괴의 소행이라면서 잡아간대요. 빨리 도망가요.”
“요괴?”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단어에 어리둥절해졌다.
인간계에 비슷한 존재가 있긴 하지만 그들이 사람과 함께 살았던가?
지후는 내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몸은 이미 울타리 대문으로 돌아섰다.
“빨리요, 빨리.”
그대로 지후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갔다.
요괴의 누명을 쓰다니. 이것이 함부로 금기를 어긴 대가인가.
마을을 벗어나며 돌아보니 공터마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곡괭이나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해괴한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어떻게 하늘의 도우심이 아니고 요괴로 방향이 틀어졌을까.
바짝 마른 평야를 지나 남동쪽으로 들어섰다. 신선의 호수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지후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율천항에는 다른 나라로 가는 큰 배가 있어요.”
“배를 탄다고요?”
“잠시 숨어 계세요.”
그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지후가 왜 그러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위험하니까 지후님은 그냥 가요. 나 혼자서도 피할 수 있어요.”
“선녀님!”
“바라는 일을 이루었으니 서로 갈 길을 가요.”
“안 돼요. 전 은혜를 갚고 싶어요.”
“이제 내가 찾을 수 있어요.”
금기를 어긴 것은 내 잘못이고 그는 순수한 소망을 가졌던 것뿐이다. 요괴로 몰린 것은 나니까 지후는 돌아가면 될 일이다.
가련한 인간에게 이런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지.
“선녀님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가시면 전 내내 죄인의 마음으로 살 거예요.”
지후는 울상이 되었다. 계속 애원했다.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으면 짐승보다 못하다고요.”
이미 천사의 능력은 한계치에 가까웠지만 나와 지후 한 사람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좋아요. 율천항에 가서 결정하죠.”
“네. 선녀님, 제가 길을 잘 알아요.”
지후는 앞장서 산길을 걸어 올랐다.
*
지후는 나를 선녀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사람처럼 대했다. 길이 험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나를 살펴주었다.
계곡물을 만나면 물을 떠다 주고 열매가 보일 때마다 주머니에 따서 담았다. 지치고 피곤할 텐데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날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힘을 아꼈다. 빛의 사람을 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여기에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 빛이 나를 부르는지도 몰라. 자신을 찾아달라고.’
모닥불을 피우고 낙엽과 나뭇가지로 잠자리를 만들었다. 지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일을 잘 해냈다. 조금만 더 배우면 큰 장사꾼이 되겠구나.
“열심히 배워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아픈 사람들에게 약도 지어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요. 그러려면 부자여야 하더라고요. 돈이 없으면 내가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니까요.”
지후는 자신의 포부를 당당하게 말했다.
가끔 상암현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족들이 무사한지 걱정하는 소리가 내게도 들렸다.
“선녀님이 찾는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가진 단서는 한 가지뿐이었다.
“몸에서 빛이 났던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지후는 곰곰이 생각하느라 팔짱을 끼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하지만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소문이 떠도니 누구든 아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못 찾을 것도 없죠.”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그 빛을 이천 년 전에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인이 산다면 어디에 살든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니 해괴한 소문을 따라가면 된다.
지후가 잠들고 나서도 나는 편히 누울 수 없었다.
사람은 군중이 되면 믿지 못 할 만큼 잔인해진다. 불안에 휩싸이면 이성을 잃고 희생양을 찾는다. 오랜 가뭄이 사람들의 정신을 흐려놓았나.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소동도 금방 잊힐 것이다. 쉽게 끓어올랐다 쉽게 잊으니까.
이 지독한 가뭄도 언젠가는 끝날 테니 비와 함께 기괴한 소문도 가라앉을 거다.
그때까지 지후가 버틸 수 있을까. 혼자 요괴에 대한 책임을 떠안으면서. 마을을 위해 소원을 빈 것뿐인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새근새근 코를 골며 잠든 지후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본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하루 만에 사람들이 모였고, 요괴의 소행이 되었다. 보통은 하늘의 도우심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릴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뭔가가 있구나.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지후를 남겨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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