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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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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33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8.0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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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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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DUMMY

율천항은 아직 멀었지만 산 아래 반가운 주막이 있었다. 며칠 동안 나무 열매로 허기를 속이느라 지후는 허리를 펴지도 못했다.


점심으로는 이른 시각이지만 국밥 한 사발씩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막 밥 한술을 뜨는데 장사치로 보이는 사람들 네 명이 주막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입구 바로 옆 평상에 앉았다.


제일 안쪽 구석에 앉아서도 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잘 들렸다. 상암현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 상암현 저수지 소문 들었나?”

“천년 묵은 여우가 주술 부린 거 말인가. 거기 사람들 괜찮으려나.”

“거미 요괴라는 말도 있더구만. 벌써 잡아먹혔겠지.”

산을 돌아 내려오는 사이 소문이 여기까지 흘러왔나.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사람들의 소문은 항상 나쁜 쪽으로 흐른다.

더 흥미로운 쪽, 더 자극적인 쪽, 그리고 더 잔인한 방향으로. 남의 일이라면 더더욱 좋게 말하지 않는다. 가시와 칼을 던지고, 거짓도 스스럼없이 만들어 낸다.


나는 태연하게 밥을 먹으며 그들의 말에 집중했다.


“사특한 주술을 펼친 요괴를 처단해야만 가뭄이 멈출 거라네.”

“물을 채워줬다며? 해갈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그 요괴가 비를 막고 있다는 증거지.”

“자기 힘을 보이려고 하루 만에 마른 저수지를 채운 거라던데?”

“그렇군. 그래. 거 말이 되네.”


국밥을 나르며 주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요망한 것을 잡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다 말라 죽을 거래요.”

“이대로 있을 것이 아니라 그놈을 빨리 잡아야죠.”


긴 가뭄이 사람들을 흔드는구나. 그들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할 뿐.

진실이 밝혀져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니 지후의 얼굴도 굳어졌다. 주막을 나올 때까지 말이 없었다.


문 앞에 서서 지후는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셔서.”

“미안해할 거 없어요. 나도 찾을 사람이 있어서 한 일이니까요.”

이번에는 꼭 찾아야 해요.

마지막 기회니까요. 마음속으로 이유를 덧붙였다.


싸리문 옆으로 아이 둘이 다가와 안을 기웃거렸다. 낡고 해진 옷을 입고 계속 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니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주모는 손님에게 밥을 나르면서 아이들을 힐끗거렸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삐쭉거리며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지후는 담장 옆에 서성이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보따리를 펼쳐 산에서 따온 머루, 다래, 으름 열매와 구운 꿩고기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한쪽 구석에서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후가 돌아서며 웃었다.

“동생 같아서요. 짐이 은근히 무거웠는데 가벼워졌어요.”


그는 아쉬움이 남는지 아이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토끼라도 잡아 올 걸 그랬나.”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보였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


율천항은 예상보다 멀었지만 과연 외국과 거래가 활발할 만큼 큰 항구였다. 성문에서 광장을 지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거리에는 화려한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떠들어대니 생동감이 넘쳤다. 오랜 가뭄도 이곳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상단 건물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당당히 걷던 지후가 당황하며 돌아섰다.

“여, 여기는 안 되겠어요.”

“왜요?”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요.”


지후의 어깨 너머로 높이 솟은 담장을 살펴보았다. 이십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있었다.


“전에도 병사들이 있었나요?”

“상단 어르신들이 수시로 드나드니까 문이 늘 열려 있죠. 문지기가 있어도 한두 명이었고요.”

“그렇다면 저 안에 누가 와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서 지키려는 거군요.”


지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었다.

목적지도 잃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당장 오늘 밤을 보낼 곳도 마땅치 않았다.


“너 지후 아니냐?”

장터 입구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지후가 반갑게 인사했는데, 상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너 집이 상암현이라 그랬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터 안쪽에 숨어있던 검은 옷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긴 칼을 찬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지후가 내 손을 잡고 뛰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따라 얼마나 뛰었는지 지후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우리를 쫓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빛의 사람에 대해서는 실오라기 하나 찾지 못하고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나는 지후의 팔을 잡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높이 날아오를 공력은 없었기에 닿을 듯 말 듯 지붕의 선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뒷골목에서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지후는 멀미를 느끼는지 헛구역질을 했다.

잠시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다른 길로 갔거나 상부에 보고하러 갔을 것이다.


“선녀님, 다른 곳으로 피해야겠어요. 여기는 위험해요.”

지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를 쫓아가는데 높은 지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길을 헤매던 지후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높은 지붕을 따라가니 웅장하고 화려한 객사 앞이었다. 나는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열 걸음 정도 앞서가던 지후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대문을 번갈아 보더니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이것도 여관 아닌가요?”

반쯤 열린 대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지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저희 같은 사람은 절대 못 들어가요. 높으신 분들만 들어가는 곳이에요. 외국에서 온 부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요.”

지후가 기겁하며 자리를 피하려는데 대문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에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흘러넘치는 젊은 귀족이었다.


그는 고상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곧장 내 앞에 섰다.

“실례가 아니라면 여기 계시는 동안 모시고 싶습니다.”


지후는 내 뒤로 숨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선녀님인 걸 알아보나 봐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남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몸이 굳었다. 그의 눈이 신비롭게 빛나며 나를 붙잡았다.


처음 보는 떠돌이에게 너무 과도한 친절 아닌가.

음험한 속셈은 보이지 않았지만, 선뜻 호의를 받자니 내키지 않았다. 이것도 요괴를 잡으려는 술수인지도.

“꽤 비싸 보이는데, 저희는 돈이 없습니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공손한 태도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상관없습니다. 오늘 시동을 거느린 젊은 여인이 올 테니 잘 모시라는 부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온종일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셨군요. 저희 객사가 번성할 기회를 어찌 놓치겠습니까? 시주하는 셈 치고 드시지요.”


거짓말 같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아 개운하지도 않았다. 그 계시의 인물이 나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걸까.


망설이는데 시끄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러 사람이 서둘러 뛰는 소리, 그 뒤로 힘차게 구보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앞선 것은 아까 보았던 검은 옷의 사람들일 테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훈련된 병사의 걸음걸이였다.

지후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다시 젊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확신에 찬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예. 정 그러시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후의 손을 끌고 서둘러 계단으로 올라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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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5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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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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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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