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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74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19 18:01
조회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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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0쪽

파라다이스 빌라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야

DUMMY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지독한 아픔이었다.

‘응? 천사가 이 정도로 아프다니?’


눈꺼풀에 힘을 주었지만 떠지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데?

‘맞아. 나 사람으로 바뀌었지···.’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이 쑤시고 지끈거리는데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집어낼 수 없었다. 여기저기가 한꺼번에 욱신거렸다.


눈을 감고 그대로 누워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


천사직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천사장이 펄쩍 뛰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이보게, 가온. 가뜩이나 천사가 부족한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오래전부터 생각한 거예요. 은둔하면서 침묵 수련하고 싶어요.’

‘뭐? 천사 가온이 침묵? 은둔? 수련? 하!’

천사장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맞는데. 오랫동안 간절하게 바라던 소망인데···.

그날부터 매일 천사장을 볼 때마다 빠짐없이 매달렸다.


그런 천사장이 삼 일 전 좋은 방법을 찾았다며 나를 불렀다.

‘차원의 문지기가 필요하다고 연락 왔다.’


‘문지기요? 은둔 수행이 아니고요?’

‘이것도 수련이라 여기고 열심히 하려무나.’


천사장이 심각한 얼굴로 한마디씩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차원의 문이 인간계에 있으니 사람으로 지내야 한다. 천사의 능력은 봉인될 거고, 사람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살아야 해.’


아무리 인간계에서 지낸다고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어쨌든 소원이 접수되다니 기뻤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천사장이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에 그런 힘이 있다고, 그런 과업을···.’

‘네? 무슨?’

‘아니다. 아무것도.’


그리고 인간계로 내려오기는 했는데, 어디서 또 길을 잃었나···.


*


사람이 되니 지독하게 아프구나. 팔, 다리, 허리, 어깨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원의 문이 하필 인간계에 있을 게 뭐람.’


배는 또 얼마나 고픈지 몸이 종잇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누워있을 수는 없어. 살기 위해서 뭐라도 먹어야 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눈을 뜨게 했다. 낮은 천장과 밝은 불빛이 보였다.

끄응. 몸을 돌리는데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돌아누우니 옆에 앉은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보았다.

“기연랑?”


예전에 만났던 모습은 아니지만, 도깨비가 도깨비인 것이 변하지 않듯 어떤 모습으로 바꾸어도 그가 기연랑임은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백발이 듬성듬성한 할아버지였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어깨도 적당히 구부리고 앉아있으니 완벽한 노인이었다.


“기연랑, 왜 여기 있어요?”


그는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비스듬히 일어났다.

“그건 내가 할 말이죠! 천사의 능력이 필요해서 문지기를 보내달랐더니 능력은 어따 팔아먹고 껍데기만 와요? 참 내, 천계도 어지간히 가난한가 보네.”


모습이 바뀌고 목소리까지 바뀌었어도 기연랑의 독설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작도 하기 전에 돌아간다고 잠꼬대나 하고 말이죠.”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기에요? 아야야.”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신음해도 그는 막대기처럼 뻣벗했다. 팔짱을 끼고 쯧쯧 혀를 찼다.


“올 거면 여기로 바로 와야지, 산은 왜 헤매고 결계에는 왜 들어간 답니까?”


말문이 막혔다.

‘이봐요, 난 댁이 살던 동굴을 찾아다녔다고요. 차원의 문이 언제 어디로 옮겨졌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의 말투를 흉내 내서 쏘아주고 싶었지만, 지난 일을 시시콜콜 꺼낼만한 힘이 없었다.


“사람이 되더니 생각도 멈추었나 보네요.”

도깨비라 그런가, 점잖은 태도로 가시 같은 말을 잘도 쏟아냈다. 느물느물 웃는 얼굴로 비아냥거리는데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말투와는 다르게 상처마다 정성스레 약을 발라주었다. 기연랑이 끌끌 혀를 찼다.

“이만하기 다행이지. 결계는 사람의 몸으로 살아 나오기 힘든 곳이에요.”


“기연랑이 구해줬어요?”

“아니오. 나는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면 말지 뭘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다니.


내 뒤편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눈빛이 더 짙어졌다. 벽에서 눈을 떼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턱을 긁적이며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데, 뭘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능력이 사라진 전직 천사를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겠지.

하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는 빵 접시를 내밀었다.


빵을 보자 입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먹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먹기 위한 존재였다.


기연랑이 비스듬히 돌아앉으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주름진 손으로 볼펜을 꽉 잡았다.

“천천히 먹어요. 어차피 장부에 달아놓는 거니까.”

“장부?”


“인간계에 왔으니 사람들 방식에 따라야죠. 여기선 일해서 돈도 벌고 집세도 내야 해요. 그나마 빈 가게가 있으니 굶어 죽진 않겠네요.”

“차원의 문지기가 일인데 따로 돈도 벌어야 한다고요?”


“그러게요. 그러니 나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기연랑이 손바닥으로 수첩을 탕탕 두드렸다.


“여기가 원래 허허벌판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네 땅 내 땅 나누면서 돈을 내라잖아요? 어이가 없어서. 허!”


“차원의 문을 들키면 안 되니까 주변과 어울리게 집까지 지었지 뭡니까? 그러느라 빚을 꽤 졌죠.”

자신이 겪은 고난을 떠올리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가슴에 들어찬 공기를 모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땅은 땅의 것인데 제멋대로 나누고 사고팔다니. 요즘 사람들은 돈을 신처럼 믿는다니까요.”

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기연랑은 밝고 장난기 많은 얼굴로 돌아왔다.


“가온님도 얼른 일해서 월세 내야죠. 가만있자. 월세를 얼마 받아야 하나?”

그는 손가락으로 열심히 셈하기 시작했다.


뭘 계산하는지 몰라도 관심 없었다.

그동안 남은 빵을 다 치우고 컵에 담긴 우유도 남김없이 마셨다.


기운이 돌자 머릿속에 생각이란 것이 슬슬 돌기 시작했다.


차원의 문을 지키러 왔는데 가게를 맡으라는 둥 월세를 내라는 둥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사람의 일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기연랑은 주섬주섬 약상자를 챙겼다.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도 불었다.

그의 휘파람 실력은 삼천 년 전 그대로였다. 문득 숲속 한가운데 앉아있는 착각을 느끼게 했다.


기분 좋은 착각은 잠깐이었다.

밥벌이와 월세라는 현실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이 사태를 어떻게 감당하나.


떠나기 전 천사장이 해준 말이 생각났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돌아와라. 다른 천사를 보는 눈은 남겨놓을 테니까. 신호만 보내면 곧 데리러 가마.’


천사장은 내가 버티지 못하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믿었나 보다. 그렇다면 아주 현명한걸. 지금은 간절히 천계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일어나 앉으려고 힘을 주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연랑이 부축해주고 베개를 등에 받쳐주었다.


내 어깨를 다독였는데 할아버지로 변신해서인지 손에 힘이 없었다. 삼천 년 전의 기연랑은 힘이 세고 몸집이 커서 바위 같았는데.


“처음엔 누구나 그래요. 그래도 어찌합니까? 사는 데까진 살아야지요.”


이 무거운 몸뚱어리를 어떻게 하나. 중력을 감당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대단한 존재였다.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방법을 터득하는데 기연랑이 부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선 나를 아무 할아버지라고 부르세요. 이 파라다이스 빌라 주인이고요.”


“나무 할아버지?”

“아무것도 아니다 할 때 아무요. 아무도 아니라는 거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요. 하하하.”

말해놓고도 자기가 한 말이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가능한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요. 다른 식구들도 잘 해내니까 가온님도 잘하겠죠?”

그건 잘할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잘하라는 경고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말고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 존재를 들키지 말라는 건데···.

내 몸 하나도 일으키지 못하니 문제를 일으킬 낌새는 전혀 없었다.


기연랑, 아니 아무가 나가고 움직이는 연습을 해보았다

몇 번 해보니 금방 요령을 터득했다. 뭐든 하면 할 수 있다니까.


*


좁은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 작은 옷장 하나, 앉은뱅이책상이 전부였다. 전에 살던 주인이 아주 소박했나 보다.


방에는 동쪽으로 창문이 하나 있고 남북 양쪽에 문이 있었다. 남쪽은 뽁뽁이 비닐이 붙은 커다란 유리문이고 북쪽은 작은 나무 문이었다.


유리문부터 밀어보았다.


아담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뽀얀 먼지가 반짝거렸다. 그 정도면 십 년 넘게 쌓인 먼지였다.


벽면을 빙 둘러선 진열대에는 어느 시대 것인지 모를 앙증맞은 물건이 띄엄띄엄 놓여있었다.

손으로 깎은 나무 인형, 액세서리 같은 소품이었는데 주인이 피난가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것처럼 썰렁했다.


나무로 만든 작은 요정 인형들이 특히 예뻤다.

날개 달린 여섯 명의 요정이 각기 다른 자세로 춤추는 모습이었다.

‘오우, 요정들은 나무집과 울타리 장식까지 한 세트구나.’


정교하지 않지만, 정성이 느껴졌다. 요정들은 웃고 있는데 어딘지 아련하고 슬퍼 보였다.


굳게 닫힌 바깥 샤시도 밀어 올렸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끊임없이 끄응끄응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샤시가 올라가자 풀풀 먼지가 피어올랐다. 막혔던 공간이 묵은 숨을 몰아쉬느라 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여기가 내가 살 곳이란 말이지. 며칠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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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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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1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4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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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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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6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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