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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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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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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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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DUMMY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를 찾는 거죠. 첫눈에 반해서 가온님을 깨끗이 잊어버리게. 그리고 자잘한 기억을 조금 바꾸면 되죠.”

“그게 가능할까요?”

“일단 찾아야죠. 목록부터 만들어야겠네요. 외모와 나이, 성격, 직업 좀 알려주세요.”

영준에 대해 설명하자 은서는 수첩에 꼼꼼하게 적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그럼 가볼게요.”

은서가 황급히 노트북을 정리했다.


“소설은 다 썼어요?”

“더 시급한 문제가 생겼잖아요? 게다가 이게 더 재밌는걸요.”

그녀는 휘파람을 불며 휭 가게를 나갔다.


대체 어디에서, 누구를 찾겠다는 말이야? 은서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으니 성공할 수도.

그렇다면 카페에 오는 손님 중에 있을지 몰라. 블랙 미러 회원 중에? 어쨌든 하륜도 많은 사람을 알고 있을 거다. 카페로 달려갔다.


하륜은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려고요?”

“아직 몰라요. 은서님이 찾아본다고 했어요.”

“은서와 바우라면 잘 찾을 것 같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우울해요?”

“안 우울한 데요···.”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왠지 서글펐다.


지후의 맑은 영혼이 떠올랐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영준으로 태어나서도 나를 기억할까···. 사람의 일이란 참 변화무쌍하구나.


넋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하륜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끼아악!”

소리를 질렀다.


하륜이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폈다.

“인연이 있었다 해도 언제까지 붙잡을 수는 없어요.”

“예, 그렇죠.”

“생을 거듭해 얽힌 인연은 풀어줘야 해요. 가온님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그래야 새로운 인연을 시작할 수 있죠.”


새로운 인연이라.

내가 여기 온 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서였다.

막연한 느낌으로 나를 붙잡은 소리. 하륜이 부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후의 소리도 들어있었나. 기억 사슬을 풀고 새 삶을 살고 싶어서.


다음 날 저녁에는 바우까지 합세했다.

셋이 모여 은서가 작성한 명단을 훑어보았다. 모르는 이름이 빼곡했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을 찾아냈을까. 심지어 예미그룹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연령대가 비슷한 사원도 들어있었다.


“인터넷 찾으면 다 나와요. 요즘은 다들 개인 계정을 갖고 있으니까요. 대부분 자신을 포장해서 보여주지만.”

“은서님 혹시 해커예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뭐, 사회적 접근법이 해킹의 첫 번째 단계이긴 하죠.”

은서는 목록을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


바우는 이름과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거의 다 아는 사람이네요. 아, 이 사람. 저 몇 번 봤어요.”

바우는 영준도 알고 있었다.


“영준씨를 언제 만났어요?”

“예미그룹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공연이 있어요. 사회 환원인가, 기업기부던가 그런 거요. 그 공연에 몇 번 게스트로 나갔어요.”


“그 사람 어땠어요?”

“글쎄요. 저한테는 사람들이 다 비슷해서. 사람마다 색깔은 조금씩 달라요, 독특하고 복잡한 색을 갖고 있는데, 그 색의 파장이 맞으면 상대를 좋게 보고 안 맞으면 주는 거 없이 밉다고 하더라고요.”

바우는 애매하게 판단을 보류했다.


은서와 바우는 사진 파일을 보며 머리를 맞댔다. 은서가 이름을 가리키면 바우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 사람은 좀 까다로워요. 결벽증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 이 사람은?”

“음. 공주병?”

“맞아, 맞아. 좀 그런 면이 있어.”

“이 사람은···. 나이가 많네. 아홉 살 차이가 나니. 일단 보류.”


은서는 바우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고 혼자 명단을 확인하기도 했다.


정작 영준은 우리가 여기 모여 자신에게 소개할 여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지. 원래 천사들이 그렇게 일하니 당연한가.


한 시간 넘게 명단과 사진을 들여다보던 은서가 손뼉을 쳤다.

“찾았어!”

“누구?”

은서가 바우에게 이름을 보여줬다.


바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완전 괜찮아.”

“누군데요?”

“아, 가온님도 아는 사람이에요. 호반이음 큐레이터.”


단정한 정장을 입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렸던 여자. 강이현. 그녀 주변의 오로라를 떠올리는 순간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목소리의 파장이 비슷했다. 바우가 말하는 색 조합도 잘 맞았다.


남은 과제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은서는 괴기 소설가답게 여러 가지 희귀한 상황을 내놓았다. 도저히 인간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바우는 수많은 가설을 듣더니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팔짱을 꼈다.

“그건 판타지에나 나올 이야기인데.”


셋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아, 바우 오빠!”

유미는 바우를 보더니 흥분해서 폴짝 뛰었다. 나는 보지도 않고 바우와 은서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줬어요. 언니한테 고맙다고요.”

도시락에는 알록달록 예쁜 모양의 김밥이 들어있었다. 먹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때 그 나무 덕분에 엄마가 건강해졌어요. 기분도 너무 좋대요.”

“음. 정령의 나무니까.”


유미는 김밥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갖고 온 것을 혼자 다 먹을 태세였다. 한창 자랄 나이니 많이 먹어야겠지.


나는 도시락보다 유미 엄마가 만든다는 인형 옷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여전히 인형 옷 만드시니?”

“예. 뜨개질로도 만들고 재봉틀도 쓰고요.”

“그래? 엄마 작품을 여기서도 팔아볼까.”


요즘은 거의 가게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물건도 지킬 수 있을 거야.

유미 엄마의 인형 옷이나 아무가 만드는 독특한 주술용품과 수집품들. 팔리지는 않더라도 물건이 많으면 풍성해 보이니까.


“그럼 저 알바 시켜주는 거예요?”

“너는 지치지도 않는구나.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있니? 봉사라면 몰라도 그건 어려워.”

“치이.”

유미는 볼을 부풀리더니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은서가 웃으며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 뒤에 집 도배해줄게. 벽지가 많이 찢어졌더라. 조명도 어둡고. 집안이 밝아지면 엄마 기운도 좋아질 거야.”

“그런 거라면 나도 도와줄 수 있어.”

바우가 나섰다.


바우의 말 한마디에 유미는 얼굴을 붉혔다.

“바우 오빠가요? 직접···.”

“벽지랑 조명만 바꿔도 새집 같을 거야.”

“아잉.”

유미는 콧소리를 내며 은서의 팔을 꽉 붙잡고 어깨에 기댔다.


“언니가 있어서 너무 좋아.”

“닭살 돋는다. 너 이런 애 아니었는데?”

“나 원래 착한 애였는데?”

유미의 밝은 미소를 보는 것이 좋았다.


세 사람을 보며 얼마나 웃었는지 입 주변 근육이 얼얼할 정도였다.


*


며칠 만에 고연당에 가보았다.

살랑이 말한 대로 최씨는 나를 몰라보았지만 가게 안은 깨끗했다. 꽁꽁 싸맸던 물건도 자리를 찾았고, 못 보던 물건도 많아졌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


최씨는 해맑은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도 모르는 손님처럼 인사했다.

“정리를 잘해놓으셨네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아버지 단골이셨구나.”

최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생각은 안 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물건이 없어졌더라고요. 도둑맞은 줄 알았는데 세상에, 내가 다 팔아버린 거예요. 그것도 완전 헐값으로. 말도 안 되죠.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다니.”


최씨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나를 지운 사람과 마주하고 서서 나 역시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 기분 참 묘하네.


침을 튀기며 지난 이야기를 떠들던 최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내가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죠?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그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내가 천사라서 마음의 빗장이 저절로 열렸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해 하니까 거기 반응한 것이다.


“다음에 또 물건 보러 올게요.”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최씨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진짜는 여기 없으니까 진품 찾으려면 다른 데 가보세요.”

역시 돈 벌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골목에 서서 고연당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최씨의 영혼을 구해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씁쓸했다. 하륜도 그동안 이런 마음으로 나를 보았을까.


영혼을 빼앗기면 수명이 줄어든다. 빠져나간 영혼 조각이 남은 생명력도 흡수하니까. 빨리 다른 영혼도 구해야 하는데.


그 후에 다시 살랑을 찾으러 갔지만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내가 아는 영혼이 잡혀야만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일부러 그런 일을 꾸밀 수는 없잖아.


어떻게 살랑을 없앨 수 있을까.

바우의 구슬에 반응하던 살랑이 생각났다. 그 뒤를 이어 달숲에서 나를 찾아온 물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필연이었던 것들. 리엘의 구슬과 신령수의 지팡이. 그리고···. 요정의 돌.

자연스럽게 빛결로 생각이 이어졌다.


빛결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끈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를 찾고 싶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빛결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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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4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6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2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1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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