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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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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44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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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DUMMY

잠결에 은은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실눈을 떠보니 달빛이었다.


달빛이 창을 가득 채워 창틀 그림자가 반대편 벽에 길게 늘어졌다. 구름이 흐르며 달빛을 가려 방안이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천계에서도 담아와 함께 달을 보곤 했다. 저런 달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달과 별을 내려다보며 인간계에서 가져온 술을 나누었다. 인간계에서 쓸 만 한 건 술밖에 없다고 웃곤 했는데.


천사장 모르게 마시긴 했지만 진짜 몰랐을까. 모르는 척해주었는지도.

그저 달빛과 술 향기에 젖어 읊조리는 시간이 좋았다.


술 생각이 나자 입에 침이 고였다.

‘오! 꽃술이 냉장고에 넣어둔 과실주가 있었지.’


꽃술은 술빵도 잘 만들지만, 과실주 담그는 것도 좋아한다. 이번에는 특별히 잘 되었다며 한 병 갖다 주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실 수 있다니 횡재인걸.

가게에 고풍스러운 술잔도 몇 개 있지 않은가. 아무의 복원술로 최상급으로 탈바꿈한 술잔.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움직였다. 달빛이 사라지기 전에 이 순간을 즐기려면 서둘러야 했다.

달빛이 잘 드는 쪽으로 탁자를 옮기고 술과 술잔을 올렸다.


똘똘똘 맑은 소리를 내며 붉은 물이 잔을 채웠다. 향을 맡은 다음 입술을 축이니 짜릿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스며들었다.


“아, 좋다.”

달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구름은 흘러가는데 달은 계속 그 자리였다.

가만. 저 달이 오늘 뜬 달 맞아?


시간과 공간이 뒤틀렸나 보네. 그걸 깨닫고도 꿋꿋하게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달빛이 고고하니 아름다우면 그만이지. 술잔에 비친 달이 벗이 되면 그만이지.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술을 한 잔 더 따르는데 가게 안의 공기가 수증기처럼 뭉클거렸다. 휘어지는 공간을 뚫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빛결님!”


빛결은 몹시 당황했다.

“당신이 어떻게?”


“시공간이 뒤틀렸나 봐요. 자, 자. 앉으세요. 달빛이 너무 예쁘니 그냥 지나갈 순 없죠.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요정의 축제에 초대받은 인사도 할 겸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가게를 둘러보았다.

“여긴 더 좋아졌군요.”

시간여행을 하는 중인가.


가게를 둘러보던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버릴 건데.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요.”


그가 술잔을 비우자 얼른 다시 채워놓았다.

“고마워요. 당신이 마지막 말동무군요. 이것도 다 지워질 기억이지만.”

“어디, 가세요?”

“할 일이 있어요. 친구를 위해 약속한 일이지요.”

“친구? 누구요?”


내 물음이 들리지 않았는지 그는 굳은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 강하고 숭고하지만, 어딘가 슬퍼보였다.

목숨을 걸고 작전에 뛰어드는 사람의 눈빛, 몇 백의 숫자로 만이 넘는 적과 맞서는 병사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다.


“차원을 건너는데 시간이 구부러졌군요. 당신이 있어서 그럴까요?”

“그럴 리가요. 달빛 때문이겠죠.”

그는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오묘한 빛깔로 바뀌었다.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것이 노을을 머금은 물방울 같았다. 달빛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달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삼 층짜리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어디 틈이 있다고 빛이 이렇게 듬뿍 들겠는가.


그러니 더욱더 이 시간을 즐겨야지. 다시없을 기회였다.

빛결의 각오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냥 보내면 안 되겠어.

“조금만 더 보고 가세요. 저 달빛은 이제 어디서도 못 볼 거예요.”


“그렇군요. 앞으로는 달도 별도 보지 못하겠죠.”

“꼭 소멸을 앞둔 영혼 같네요.”


빛결은 대답 대신 술 한 잔을 비웠다.

“미련이 남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의 혼잣말이 가게 안에 메아리쳤다.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쏟아질 정도였다. 문득문득 마주치는 빛결의 눈동자도 영롱하게 빛났다.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동굴 속 메아리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중후한 악기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술을 따라주고 마시며 달빛에 흠뻑 취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나와 함께 눈물을 떨구던 빛결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달빛은 또렷하게 빛났다.


*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용케 침대를 찾아 잠들었구나.

깨어나니 머리가 더 아팠다.

‘아이고, 머리가 조각조각 쪼개지는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니 하륜이 팔짱을 끼고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낼름 혀를 내밀었다.


엄청 화난 얼굴인데. 이번에는 아주 심각해 보였다.

그런데, 이 신선은 왜 매번 내 방에 들어와 있지? 이 정도면 무단침입?


“아니에요.”

하륜이 정확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당황하여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그럼, 이번에도 내가 벽을 두드렸나?


“보름달이 밝다고 구경하러 오라더니···.”

하륜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난감한 얼굴이었다.

내가 또 이상한 짓을 했나?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그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어제는 보름이 아니었어요. 노래는 듣기 좋았지만.”


설마. 천계에서 하던 버릇대로 노래하고 춤추며 하륜이 담아인 줄 알고 끌어안기라도 했단 말이야? 얼굴이 화끈거려 이불을 놓지 못하고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어, 그게···.”

“됐어요. 깨어났으면 된 거죠. 자, 마셔요.”

하륜이 꿀물을 건네주었다.


그는 여기 오래 앉아있던 것 같은데 물은 방금 끓인 것처럼 뜨거웠다.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볼 것 같아 빨리 마시려다가 입술을 데일 뻔했다. 뜨겁다고 소리도 못 지르고 한 모금씩 오물거리며 삼켰다.


빛결은 잘 돌아갔을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슬픈 얼굴로, 그렇게 비장한 얼굴로 시간을 건너왔을까.

꿀물을 음미하는 척, 눈을 감고 어젯밤의 만남을 골똘히 생각했다.


“다른 일은 없었어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텅 빈 머리를 열심히 회전시켰다. 뭐라고 대답하지.


“다른 일? 어, 어, 없었는데요.”

“잔이 두 개던데요. 혼자 두 잔으로 마신 건 아닐 거고.”

“손님이 있긴 했는데. 그게 누구냐면···.”

빛결이 이곳을 아는 것 같으니 하륜도 알겠지. 어쩌면 그에 대해 들을 수 있겠어.


“빛결이라고요. 아, 인간계 사람은 아니에요.”

하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떨림은 곧 멈추었으나 내가 꿀물을 다 마실 때까지 말이 없었다. 심지어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벽 너머의 다른 공간에 머물렀다.


“저, 하륜님. 괜찮으세요?”

하륜을 부르자 그제야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빈 컵을 받아주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컵은 이미 쟁반 위에 있었다.


그러나 하륜의 표정은 진지하고 근엄했다.

“괜찮은 거죠?”

“예? 예. 아무렇지 않은데요.”

“다행이에요.”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컵과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푹 쉬어요.”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니 문을 열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다음에는 손님이 왔을 때 불러요. 나도 같이 마시고 싶으니까.”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는 사이 문이 닫혔다. 에이, 그런 손님이 또 오겠어. 어제는 정말 특별한 날이어서 시간이 겹친 거지.

그나저나 빛결에 대해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한동안 술은 마시지 말아야겠다.

사람의 몸은 술에도 약했다. 아무리 마셔도 이렇게까지 아픈 적이 없는데.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


천사의 능력을 되살리는데 집중한 결과일까.

해가 지고 정적만이 가득한 시간, 대기의 흐름에 의식을 집중하면 조금씩 소리가 들렸다.


아무가 한 말 그대로였다. 천계는 기회를 열어놓는다고.

‘천계에서 하는 일은 늘 그래요. 항상 마지막 기회를 열어놓죠. 완전히 버리지 않고 여지를 남겨놓아요. 가온님의 능력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봉인했어도 조만간 풀릴 거예요.’


눈을 감으니 진열대의 물건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성 들여 만든 물건은 사연이 깊어서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거리를 헤매며 세월이 묻었어도 깊이는 닳지 않는 법.


가게 분위기에 대한 감상,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하소연이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에서 ‘옥룡’이라는 말이 귀를 두드렸다. 수문장을 부르는 이름 같았다.


‘옥룡님, 등에는 뭐가 있었어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묻자 옥룡의 답을 기다리는지 재잘대는 소리가 한순간에 멈추었다.


맑고 힘찬 목소리가 대답했다.

‘옥돌 조각이 박혀있었지. 너무 화려하면 깊이가 없다고 작은 조각으로 붙여주셨어.’

‘아, 달밤에 여기 오셨던 분이죠?’

‘맞아. 솜씨 좋고 다정한 분이지.’


달숲의 수문장이 빛결의 작품이었나.

옥룡이 여기 있어서 시공간이 휘어질 때 그가 찾아온 거구나. 우연이 아니었네.


‘옥룡님은 여기 오래 계실 거죠?’

‘새 주인을 만나면 떠나야지. 우리는 세상을 떠도는 운명이니.’

‘옥룡님이 안 계시면 여기는 누가 지켜요?’

‘하하하, 그때가 되면 다른 수문장이 나타날 거다.’

‘그래도 난 옥룡님이 좋은데.’

‘나도 좋단다. 그분이 만든 요정도 있고.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하구나.’


요정들도 말하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요정 조각은 끝내 말이 없었다. 할 말이 가장 많을 것 같은데.


이쯤이면 충분해. 거리에 나가도 진짜 물건을 만날 수 있겠다.

새 주인을 만나려고 헤매는 물건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 이어줘야지. 그런 만남이 사람들도 위로할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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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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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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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9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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