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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45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2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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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DUMMY

요정들과 함께 빛결도 다가왔다.

우람한 몸집에서 저토록 우아한 걸음걸이가 나오다니!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지.

어색하지만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빛결도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보름의 손님이군요. 어서 오세요.”

목소리가 깊고 부드러워서 귓가에 울림이 오래 남았다.


“손님이 찾아오다니 더없이 좋은 날이네요.”

빛결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주춤주춤 따라가 그가 앉아있던 바위 위에 앉았다.


해가 지고 노을이 피어올랐다. 물감이 번지듯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였다.

지금껏 보던 것보다 두 배나 큰 보름달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달을 따라 하늘도 서서히 어둠에 물들어갔다.


“나빌라의 춤은 처음 보시죠?”

나빌라?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맞아! 그믐의 손님이 말했던 그 요정.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준 그 요정들이군요?”

아는 척하자 가까이 있던 요정들이 사르륵 웃었다.


“다른 나빌라일 거예요. 우리는 여러 곳에서 살아요. 하나이면서 여럿이지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죠. 아, 달이 빛나기 시작했어요.”

요정들이 반짝이는 잔상을 남기면서 날아올랐다.


그들의 춤을 보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손과 어깨가 저절로 움직였다.

빛결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천사님이 찾아와서 더 기쁜가 봐요.”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요정의 빛줄기를 잡았다. 요정의 빛은 가늘고 긴 끈처럼 숲속 공터를 누볐다.


그의 몸짓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저렇게 거대한 몸집으로 나비처럼 움직이다니.


빛결과 요정들이 너무 즐거워해서 나도 덩달아 축제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정신없이 춤을 추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숲속 풍경 위로 환영이 나타났다.


절벽 아래 작은 초가에서 명상하는 하륜이 있었다.

바다속 동굴, 다리 달린 거대한 물고기 모양의 바우도 보였고, 정령들과 함께 나무를 가꾸는 은서도 보였다.

신령수에 걸터앉아 피리를 부는 기연랑과 늘어지게 하품하는 삽살이도 보였다.


인간계의 전쟁터를 골똘히 바라보는 담아의 모습이 스쳐갔고,

치유의 알로 실려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환영 속의 나는 정신을 잃고 시든 풀잎처럼 축 늘어졌다.

치유의 알을 닫는 천사장도 보였다. 화가 난 듯 슬픈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기억에 없는 모습이지만 요정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는 다 괜찮은 일이었다.


요정들의 노래에 맞춰 나도 소리 높여 노래했다.

신나게 춤을 추다가 숨이 차서 간신히 멈추었다. 참, 나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디더라?


숨을 헉헉대며 손을 들었다.

“난 돌아가야 해요. 내가 어디서 나왔죠?”


처음 나를 발견한 요정이 다가왔다.

“아쉽지만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 선물을 드릴게요.”


요정은 하얀 조약돌 하나를 건네주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거예요.”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여기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인간계에도 천사가 모르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라면 계속 머물러도 좋겠는걸.

하륜의 따뜻한 눈길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작별 인사를 했다. 날 기다리는 신선이 있으니 돌아가야지.

“고마워요. 오늘 밤은 정말 행복했어요.”


*


달숲으로 돌아와서도 나빌라와 빛결을 잊지 않으려 하얀 조약돌을 손에 꼭 쥐었다.


‘이렇게 만난 인연이라.’

선반 위 요정 마을에 조약돌을 올려놓았다. 행복한 기억을 가져다준다니 요정들이 덜 슬퍼 보이려나.


춤을 너무 열심히 췄나.

너무나 피곤하고 너무나 달콤해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평소보다 샌드위치를 두 개나 더 먹으니 하륜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어제 신나게 놀았더니 그래요. 그렇게 노래하고 춤춘 건 오랜만이에요.”


“춤을 췄다고요? 어디서?”

“아, 그 요정들요. 나빌라들.”

요정을 생각하자 마음이 들떠 어깨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아직도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흥얼거리는 나와 달리 하륜의 표정은 씁쓸했다. 웃는 데 웃는 게 아닌 것 같고.


“저를 알아보더라고요. 사람의 몸인 데도요. 다른 곳에서는 제가 안 보이거든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천사는 천사니까요.”

“아!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도 봤어요. 몸짓도 우아하고, 목소리가 정말 달콤했어요.”


빛결의 얼굴을 생각하려 했지만,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생각하려 할수록 뿌옇게 흐려지더니 실루엣만 남았다.


왜 이러지?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요정의 춤이 중요하지, 빛결은 애써 생각할 필요 없어.


“그래요? 또 그 사람을 따라갔겠네요?”

“예에? 또라고요? 저 사람 쫓아다니고 그러지 않아요.”

“아아, 그런가요?”

하륜이 큰 소리로 웃었지만 웃음 끝에 쓴맛이 서렸다.


카페에 손님이 들어오자 그는 카운터로 갔다. 손님들이 수시로 드나드니 그와는 길게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새벽에는 미션을 수행하느라, 저녁에는 피곤해서 일찍 곯아떨어지느라 카페에 앉을 시간도 없으니.


*


고연당의 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문에는 종이쪽지 하나가 달랑거렸다.

‘개인 사정으로 잠시 쉽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개인 사정이 뭐기에?


달숲으로 돌아오니 가게 앞에서 유미가 서성거렸다.


전에 보았을 때와 똑같은 교복에 머리부터 신발까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아이도 시간을 넘나드는 재주가 있나?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데.


“중학생이 이 시간에 다닐 수 있어?”

“중간고사라 일찍 끝나요.”

“그 학교 다닐 만하네. 시험 본다고 일찍 끝내주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나 좋겠죠.”

“바우는 연습하러 갔는데?”


“아줌마, 아니. 사장님, 저 알바 시켜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갑자기 숨이 막혔다. 바우에게 집착하는 거야, 알바에 집착하는 거야?


유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지난번 보았던 병약한 중년 여인은 그대로였고, 소박한 살림살이도 보였다. 교실 뒤편에 혼자 앉아 창밖만 바라보는 유미가 겹쳐 보였다.


더 집중하려니 유미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줌마, 또 내 과거를 보는 거죠!”

“아니, 아니.”

어설프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지만 설명은 안 하는 걸로.


“알바 없어도 돼. 너도 봤지? 무인 판매하고 있어.”

“그럼 청소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전화도 받을게요.”

“전화는 내 휴대폰으로 하면 되고, 원래 깨끗해서 청소 안 해도 돼. 손님이라고는 일주일에 서너 명인데. 무슨 알바가 필요하니?”


“그럼 제가 아이디어를 낼게요. 홍보도 하고요.”

“어떻게?”

“인터넷에도 올리고, 물건마다 사연도 재미있게 쓰고요.”

으흠···.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미의 간절함 때문에 망설여졌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작전을 바꾸었는지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엄마 약값도 벌어야 하는데 다른 데서는 미성년자라고 안 시켜준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엄마까지 동원하다니. 점점 유미가 궁금해졌다.


“바우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헤헤. 돈도 벌고 오빠도 지키고.”

“은서님도 좋은 사람이야.”

“오빠의 영혼은 숭고하고 청정해서 티끌 하나 없어요. 그걸 그 여자가 오염시키는 거예요.”

“하하, 그럼 너랑 만나면 청정지역을 유지할 수 있어?”

“아뇨. 아무도 만나면 안 돼요. 전 탁한 영혼에게서 오빠를 지킬 거예요.”


너도 그 탁한 영혼이라는 걸 모르니?

사람은 말을 배우면서 탁해지기 시작한단다. 이걸 알려줘 말아?


그 순간 대문이 열리고 은서가 스쿠터를 끌고 나왔다. 유미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예. 편집장 만나러 가요. 새 소설 때문에 상의할 게 있다고 해서.”

“와, 벌써요? 이번엔 어떤 거예요?”

“어머, 그건 비밀이죠.”


유미는 뻣뻣하게 서서 입을 잔뜩 내밀었다. 신발 끝으로 바닥을 퍽퍽 찼다.


은서가 유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손님이에요?”

“알바 지망생요.”

“중학생이 알바를? 뭐. 그럴 수도 있죠.”


은서는 유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일할 생각을 하고 기특하네. 열심히 해.”


은서는 진심으로 유미를 격려했는데, 스쿠터가 사라지자마자 유미가 버럭 화를 냈다.

“쳇,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유미는 투덜거리며 뛰어갔다.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가버렸다.


서운하면서도 아픈 이빨이 빠진 것처럼 후련했다.

인간계의 아이를 상대하는 일은 확실히 평범을 벗어난 일이야. 고개를 저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


바느질도 제법 손에 익으니 시간 가는 걸 모르겠다. 사람들이 취미를 갖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보고 따라 하는 연습이지만, 제법 모양이 잡혀가니 손에서 놓기 어려웠다.


배가 고파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야 정신이 들었는데, 이미 저녁이 지난 시간이었다. 거리에는 벌써 가로등이 켜졌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허기가 심하게 밀려왔다. 빨리 충전하러 가야지.


달숲을 나서려는데 아무와 꽃술이 들어왔다.

“가온님이 밥 먹으러 안 오다니,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아무는 바구니에 음료수와 주먹밥을 넣어왔다. 꽃술은 옥수수빵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끼니때가 되면 재깍재깍 와야죠.”


날 위해 왔으면서 핀잔을 얹어 주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한두 번인가. 말은 그러려니 넘기고 고맙다는 인사만 건넸다.


“웬일이에요? 이렇게 둘이?”

“부탁할 일이 있어서죠.”

세상에, 기연랑이 나한테 부탁한다고?


“부탁요? 저한테요?”

“하, 가온님이 뭘 해줄 능력도 없잖아요. 저 벽 좀 쓰려고요.”


시간의 장벽을 쓰겠다고? 기연랑은 어디로 가려는 걸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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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4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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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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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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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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