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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28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8.0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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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DUMMY

사람의 몸이 되려고 묶였던 덮개가 떨어져 나갔다.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갑갑하고 무거운 족쇄가 풀리니 몸이 공기처럼 가벼워졌다.


천사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바위 같던 무게가 갑자기 사라지자 몸이 휘청거렸다. 몸을 앞으로 내밀려다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아차, 살짝만 움직여도 되는데.


지난 몇 달간 몸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다 보니 힘을 많이 쓰는 버릇이 생겼다. 천사장이 말한 대로 적응 기간이 이런 거구나.


몸이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엇, 하는 순간 바닥이 코앞에 다가왔다.


땅에 부딪히나 싶었는데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어떻게 된 거야?’

눈을 돌리다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륜이었다.


흉터를 남기면서까지 기억하려 한 존재.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치유의 알도 반응해주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곳이 어디라도 찾아가겠다고 맹세했었지. 아주 까맣게 잊었지만.


하륜은 나를 안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을 바라볼 수는 없어도 그의 품 안이 포근해서 굳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대로 더 있으면 안 되려나.


다음 순간 난감함이 밀려왔다. 뭐라고 하지. 적당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은 고맙다고 해야지.

”아, 고, 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목이 잠겼다. 이런 낭패가 있나.


하륜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천사로 돌아왔군요.“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어색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고 평안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내가 발을 헛디디며 휘청거릴 때마다 그가 부축해주었다.

”조심해요. 인간계에서 사람처럼 걸으려면 연습이 필요해요.“


여태까지 하륜을 몰라본 것이 억울했다.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면 치유의 알에서 나오는 대로 하륜을 찾아갔을 텐데. 그럼 그때부터 계속 함께 지냈겠지. 시간이 아깝네, 아까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디선가 깊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로고.“


동명이 계속 내 생각을 읽었다.

”지금부터도 충분하단다.“


나는 콧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난 이만 쉬어야겠다.“

곧이어 동명의 고요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하륜이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공간을 넘었다.


*


발아래는 구름에 싸여 하얀 솜을 펼쳐놓은 듯 했다. 구름 위의 숲은 동명의 결계와도 비슷했다.


천계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천계와는 다른 기운이 넘치는 곳. 다른 빛깔의 생명력이 꿈틀대는 곳. 선계의 중산이었다.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선계의 중산이죠?“

하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죠?“

”처음···, 이라고도 할 수 있죠. 내가 막 수련기를 끝냈을 때였어요.“

”그때 저도 수습이었는데.“


수습 천사였을 때는 인간계와 천계 사이의 길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천계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꽃향기에 끌려 이곳으로 들어왔다.


나비를 따라다니다 수련중인 하륜과 마주쳤다. 그때 하륜과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생각이 안 나네.


천사장은 그 기억조차 지워버렸구나. 빛과 관계된 모든 기억을 싹 지워버리다니 천사장의 능력도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륜님이 빌라로 데려다준 거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문지기로 간 것도 알았어요?“

”그건 몰랐어요. 기연랑을 찾는 말썽꾸러기가 있다고 해서 데리러 왔죠.“

동명 선위가 그렇게 말하다니. 은근히 장난을 좋아하시네.


”그믐의 손님인 줄 알았어요.“

기연랑이 나를 받아서 달숲으로 옮겼구나. 내가 문지기인 줄 알고 있었으니.


나는 아주 깔끔하게 정신을 잃어 아무것도 몰랐고.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흠흠, 지난 일에 마음을 둬야 무슨 소용이야. 지금 하륜 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구름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인간계의 탁한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인간계에 오래 있으면 덩달아 기운이 탁해진다.


기연랑은 건너 차원에 가서 요양해야 할 정도가 된다.

하륜도 가끔 중산이나 결계에 머물다 오겠지. 월요일마다 카페를 닫고 어디 가나 했더니.


”시간의 장벽을 넘는 느낌은 어때요?“

”재미있어요. 모르던 것도 많이 알게 되고.“

과거에서 보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하성의 모습이 가장 강렬했다.


하륜을 다시 바라보았다.

모습은 달랐지만 분명 그였다. 드디어 찾은 거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차원의 문이 기억하는 과거라서 모든 걸 다 보여주지는 못해요. 완벽한 건 없거든요.“

”물건을 갖고 올 수 있었던 건요?“

”파장이 맞아서 가능한 거죠. 완벽하지는 않아도 차원의 문이 가진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과거를 바꿀 수도 있거든요“


”과거를 바꾸면 현재가 달라지잖아요?“

”완전히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각각의 사건은 바뀔지 몰라도 큰 흐름은 변하지 않더군요. 사람의 눈에는 엄청난 변화로 보이겠지만 천 년을 두고 보면 결국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죠.“


”저 어떻게 알아봤어요?“

하륜이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겉모습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까요. 가온님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거든요.“

다시 만나면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녔는지 알려주려 했는데 할 수 없었다.

하륜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에도 계속 기다렸겠지.


”기다리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우린 영원을 사니까 언젠가 만날 거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왔잖아요.“

”왜 차원의 문지기가 된 거예요?“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하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기던 그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인간계는 굴곡이 많아요. 어떻게든 바뀌고 어디로든 굴러가죠. 그런 것들을 지켜보니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가 일어섰다.

”돌아갈 시간이에요.“

”벌써요?“

”일주일이나 지났는걸요.“

동명의 결계에 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이라고? 아주 잠깐이었는데.


하륜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기연랑은 문을 지키기 힘든 상태예요. 은서와 바우는 힘이 부족하고요.“

”그럼 빨리 돌아가요.“


나는 서두르다 휘청거리며 하륜에게로 쓰러졌다. 하륜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원래 이렇게 깊었나.

하륜의 입술이 서서히 내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짜릿한 감각이 입술을 통해 온몸에 퍼졌다. 꿈속에서조차 얼마나 그리던 느낌인가.


하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그와 나 둘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지금 뭐하세요?“

갑자기 아무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달숲의 가게 안이었다.


아무는 먼지털이를 들고 진열대 옆에 서 있었다.

”아이고, 여태 한 사람인 줄 알았네. 이거.“


아무는 껄껄 웃으며 하륜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드디어 해내셨군요.“


아무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답답했게요. 이 순간을 위해 가온님께 과거를 열어주지 않았습니까. 감동이군요. 예, 감동이에요.“


하륜의 어깨를 토닥거리던 아무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바뀌었다. 먼지털이를 흔들어댔다.

”아니, 그렇다고 하루하루 기력이 사라지는 내 앞에서 그러고 싶어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다리가 후들거려 의자에 앉았다. 사람처럼 움직이려면 확실히 연습해야 했다.

사람의 몸이 되었을 때도 완전히 적응하기까지 몇 주가 걸렸는데. 또 시작이구나.


아무가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더니 코웃음을 지었다.

”으흠, 이제 천사로 돌아왔고. 기억도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되겠네요.“

”무슨 일요?“

”애당초 천사를 문지기로 보내 달라던 이유 말이에요.“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만 끄덕였다.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천사장이 말한 ‘다른 일’과 관계있을까.

아무는 고개를 젓더니 그것보다라며 운을 떼었다.

”그것보다···. 영준이라는 친구는 어떻게 할 거예요?“


아무가 핸드폰을 보여줬다. 안부 문자가 하루에 하나씩 와있었다.


영준에게는 지후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기억 조각은 새 삶을 사는 영준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기억을 지워버릴까? 공백이 생기지 않게 기억을 지우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천사장 정도라면 모를까.

공백도 상처도 주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지 묘안이 없을까.

”그러게요. 어떻게 하죠?“


하륜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영준은 영준이고 지후는 지후예요.“


아무도 의자에 앉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전생의 연이 다음 생까지 이어지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저 미련이죠. 기억의 찌꺼기는 현생의 삶을 방해할 뿐이에요. 지난 일이니 거기 얽매일 필요 없죠.“


”그래도 모른 척할 수 없잖아요?“

”그럼 양다리로 가시죠.“

아무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웃다가 벌떡 일어섰다.


”에고 내 정신 좀 봐. 약 먹을 시간이네.“

아무가 문 앞에 서서 당부했다.

”여하튼 잘 해결해야 해요. 이런 문제는 후폭풍이 거세니까요.“


그의 말을 들으니 더 난감해졌다.

최면을 거는 방법은 어떤가.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지 하륜을 쳐다보았다.


나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태연하게 일어섰다.

”카페에 손님이 오셨네요. 조금 있다 저녁 먹으러 와요.“

이 상황에 조언해줄 상대는 하륜밖에 없는데 카페에 간다니···.


하륜이 의자를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었다.

”다음에도 같이 중산에 가요.“

그의 미소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륜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초대하지 않아도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그가 돌아서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바로 이런 거야.


하륜이 나가자마자 담아의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담아의 소리가 머릿속에 또렷이 울렸다. 참으로 기막힌 타이밍이군.


”네가 자주 간다는 곳이 고연당이지?“

”응. 최씨.“

”거기 주인도 영혼을 빼앗겼네.“

”언제?“

”그건 모르지. 그 지역에서 벌써 여러 명이야.“


마음이 급해 무작정 달려 나가려 했다. 몸이 반쯤 날아올랐다.

보지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 담아가 나를 불렀다.


”너 지금 날아오르려 했지? 조심해. 거기선 뛰어야지.“

”아차, 알았어. 알았어.“

나는 걸음걸이에 조심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고연당 최씨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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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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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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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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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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