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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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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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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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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DUMMY

마당에서 대문을 닫자마자 병사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지나갔다.

그 순간, 남자의 미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병사들이 지나가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머릿속에 찌릿 번개가 치며 지끈거렸다. 이 남자는 무언가 알고 있다!


“저는 하성이라고 합니다. 방을 안내해드리죠.”

하성은 우아하면서도 힘찬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지후에게는 이 층에 있는 방을, 내게는 삼 층에 있는 방을 열어주었다.


“저는 선녀, 아니 아가씨 옆을 지켜야 하는데요.”

대문 앞에서부터 주눅 들어있던 지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안심하십시오. 계단 바로 옆으로 아래위층이니까요. 안전이 걱정이라면 저희도 호위대가 있답니다.”

하성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위엄 있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지후를 안심시켰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식사부터 하시지요.”


식당으로 안내하는 하성을 따라가며 지후가 내 뒤로 다가왔다.

“설마 나중에 돈 내라고 하지는 않겠죠? 그럼 큰일인 데요···.”

“그건 모르지만, 일단 따라가 보죠.”


마음 졸이던 모습과는 달리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자 지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먹어도 된다고 손짓하자 정신없이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직 열여덟. 한참 먹어야 할 나이에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지후가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식당과 연결된 누각으로 나가 앉았다.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기에 적당한 자리였다.


하성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여기는 주인이 직접 음식을 나르나? 신기하네.

그가 찻잔과 찻주전자를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나를 신의 계시로 여기나. 그건 좀 미안한데.


“얼마 전 귀한 차를 얻었으니 맛을 보시죠.”

붉은빛이 도는 찻물이 또르르 잔에 차올랐다.

“귀한 손님이 오실 줄 알고 먼저 와 기다렸나 봅니다.”


찻잔을 들고 향을 맡다가 멈칫했다. 인간계에서 나는 차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기력을 보호해준다는 선계의 차였다.


지금껏 두 번밖에 마셔보지 못했다. 그것도 선계에서 온 손님이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수련 천사들이 천사장 몰래 나눠 마시며 감탄한 것이 전부였다. 우리끼리는 ‘붉은 약선차’라고 불렀다.


차 맛에 놀라 하성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는 식당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신선 같지 않은데···.


빈 잔을 내려놓자 그는 조심스레 한 잔을 더 따랐다.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꿈에서 받은 계시대로 손님이 찾아와 기쁘다는 뜻인가. 차의 맛과 향에 끌려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을 느꼈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비슷한 찻주전자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내게 선계의 차를 내주었다는 것은···.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빛의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


넓은 정원에 하나둘 등불이 켜졌다. 붉은 종이에 싸여 주홍빛으로 빛나는 등불을 보니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빛. 애타게 찾던 빛이 가까이 있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늑하고 평온하던 빛, 태어나기 전부터 닿아있던 것 같은 빛 속의 존재.

등불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온화하게 흔들렸다.


정원의 밤풍경을 둘러보았다. 저쪽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더 잘 보이겠는데.

언덕에 올라서니 수려한 지붕의 객사와 연못에 비친 등불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달빛과 어울려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정원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 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는 밤이 아름답죠. 오늘은 더욱 아름답네요.”

하성의 목소리였다.


“네. 정말 예쁘네요.”

정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돌아보지도 않아도 그가 내 옆에 앉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온님이 무슨 일로 사람과 같이 다니나 했어요.”

‘헉!’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굳은 목을 간신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몸을 가린 투명하고 두툼한 장막이 걷혔다. 서서히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잊었던 이름이 생각났다.

“하, 하륜님?”

“인간계에서는 신선의 기운을 가리고 있거든요.”

그는 다시 자신의 빛을 가리고 하성으로 돌아왔다.


“와,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하륜님 왜 인간계에? 여기 주인이라니요?”

너무 놀랍고 반가워 질문을 쏟아냈다.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가 있나. 그토록 찾아다니던 빛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혹시 이거 꿈인가요. 부디 꿈이 아니기를!’


그는 흔들리는 등불만큼 온화하게 웃었다.

“차원의 문지기를 맡고 있어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니 이렇게 지키는 거죠.”

“도깨비 기연랑이 지킨다고 하던데요.”

“같이 지키죠. 벌써 이천 년이나 되었네요.”

“기연랑은요?”

“그 친구는 가끔 요양이 필요해서 지금은 없어요. 저쪽으로 간지 구백 년 정도 되었으니 곧 돌아오겠군요.”


“그동안 얼마나 많이 찾아다녔는데···.”

얼른 입을 다물었다.

딱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천사가 애타게 찾아다녔다고 하면 놀라겠지.


하륜이 양팔로 땅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질 듯 빛났다.

“그랬군요.”


그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가득했다. 나까지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사실은 나도 기다렸어요.”

“에? 저를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계에 있으면 언젠가 만날 거라고 믿었거든요.”

하륜의 말을 들으니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이렇게 개운할 수가.


내가 찾아다닌 것처럼 그도 나를 찾았다니. 역시 운명의 상대 맞다니까.

찾을 때까지 천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다니 뜻밖의 횡재잖아.

꽥꽥 소리 지르며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터져 나오는 함성을 간신히 참았다.


소리 없이 실실 웃음을 흘리는데 하륜이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지후라는 사람과는 무슨 일인가요?”


여태까지 지후와 겪었던 일을 들려줬다.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퍼지는 소문에 대해서도.


하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뭔가가 그들을 조종하는군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알아요. 가끔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죠. 결과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돌아오지만.”


나의 원래 목적은 지후를 통해 하륜을 찾는 것이었는데.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후와 엮이면서 하륜을 찾았으니 지후의 도움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정원의 등불과 연못을 바라보았다. 하륜이 옆에 있으니 더 평온하고 아늑했다. 더불어 침묵하는 시간조차 반짝거리다니.


‘나도 같이 차원의 문지기를 할까? 그럼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우헤헤.’

그럼 늘 이렇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겠지.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밤늦도록 달과 등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달이었다.


*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인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낮에 가까웠다.


내가 답하기도 전에 문이 흔들리더니 지후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선녀님, 어머니와 막내가 잡혀갔대요.”

“뭐라고요? 누가 지후님 가족을 잡아가요? 왜요?”


“모르겠어요. 아침에 상단에 갔더니 상암에서 온 아저씨들이 알려줬어요.”

“어디로 갔대요?”

“무평으로요. 흑흑. 어머니는 몸도 편찮으신데.”

지후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무평이라면 율천과 반대방향이었다. 상암과 율천이 산으로 막혔다면 상암과 무평은 큰 강이 가로막았다. 누가, 왜, 그들을 무평까지 데려간 거지.


가족을 걱정하는 아이 앞에서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후는 벌써 떠날 차비를 마쳤다.

“제가 가야겠어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나도 같이 가요. 도와줄게요.”

“아니에요. 선녀님은 여기 계세요. 잡히면 큰일 나요.”

지후는 그동안 고맙고 죄송하다며 굽실거렸다.


“선녀님도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 일이 잘 해결되면 꼭 다시 올게요. 죄송해요.’

지후는 울면서 웅얼거렸다. 마지막까지도 죄송하다면서 부리나케 객사를 떠났다.


천사인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해주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떠나는 지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지. 나는 나대로 지후를 뒤쫓아 갈 생각이었다. 부디 그때까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마당을 지나가는 하륜이 보였다. 함께 소문을 알아봐야겠다. 나 혼자 다니는 것보다 그와 같이 다니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그런 일이 있군요. 마침 문지기 하나가 돌아왔으니 잠깐 벗어날 수 있어요.”

하륜 정도라면 분신술도 가능하지만, 그 정도로 시급한 일은 아니었다. 분신술을 쓰면 아무래도 선력이 많이 줄어드니까.


“문지기들도 많이 바쁜가 봐요.”

“문지기 말고도 맡은 일이 있으니까요. 몇 명 되지 않는 데다 최고 능력자가 다른 차원으로 가버렸거든요.”

우리는 차원의 문에 대해 얘기하며 찻집으로 향했다.

나도 하륜과 함께 차원의 문지기를 맡을지 모르니 미리 알아둬야지.


우리가 왕래하는 차원은 아직 두 곳으로 해밀의 차원과 묘수의 차원인데, 다른 차원에서도 가끔 틈이 생겨 위험한 존재가 스며든단다.

차원의 문지기도 찾아내지 못하는 틈이라니. 얼마나 위험한 존재일까.


*


찻집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차를 마시는 척 다른 손님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일상적인 안부와 뒷담화 뿐이어서 지루하고 뻐근했다.


심드렁해져서 졸음과 싸우고 있는데 새로 들어온 다섯 명의 손님들 사이에서 비현공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는 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예전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권력 싸움이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흔히 있는 문제 아닌가. 사람이야 권력과 명예에 목숨을 걸지만, 천사에게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나는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일행의 말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그래서 지금 비현공이 무평에 와 있다는 거요?”


무평이라면···, 지후의 가족이 끌려갔다는 그곳?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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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6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6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5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1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1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3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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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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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29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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