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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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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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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7.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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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DUMMY

무엇이든 너무 많으면 문제가 생긴다. 뒷정리가 너무 힘들다는 문제가.


아무는 몸이 안 좋다며 한동안 복원술을 못 한다고 했다.

“나중에 도와줄 테니 가온님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놔요.”

기력이 없어 보여 더는 부탁하지 못했다.


옥룡의 등에 자수정을 붙이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용 조각의 움푹 들어간 홈과 자수정의 크기와 숫자가 딱 맞았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초강력 접착제로 떨어지지 않게 잘 붙이고 깨끗이 닦았다. 수문장 옥룡도 마음에 들었는지 반짝하고 빛을 내뿜었다.


구해온 물건을 깨끗이 닦았다.

세월의 때를 닦기 위해서는 무념무상의 자세가 필요했다. 이 순간은 여기에만 집중하자고. 집중.


뚫어버릴 기세로 손거울을 닦는데 유미가 불쑥 들어왔다.

말도 없이 꾸벅 고개로만 인사하더니 신발 뒤꿈치로 바닥을 차며 가게 안을 어슬렁거렸다.


오늘도 바우가 없는 걸 용케도 알고 찾아왔네. 바우 대신 은서는 방에 있지만 분명 싫어할 테고.


“뭐 하세요?”

“거울 닦아.”

“완전 맛탱이 갔네. 고물상 차리려고요?”


“오늘도 중간고사야?”

“아니요. 집에 가는 길인데요.”

“그렇게 심심하니?”

“심심하기보다는 시시하죠.”


유미는 진열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멈춰 서서 무언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흘끗 보니 옛날 여자들이 머리에 꽂던 머리빗 모양의 뒤꽂이였다.


모란꽃이 장식된 것인데 내가 발견했을 때는 꽃잎이 거의 떨어져 모란이라는 것만 간신히 구분할 정도였다.

칠을 깔끔하게 벗기고 묵은 때를 닦아낸 다음 아무에게 넘겼다.

그가 물건이 기억하는 원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유미가 가격표를 보며 놀랐다.

“이게 삼천 원이라고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바구니에 넣고는 종이봉투에 물건을 담았다.


포장도 손님이 직접 하도록 바구니 옆에 봉투를 마련해놓았다. 봉투는 그때그때 구한 재료로 만들기에 포스터 종이였다가 광고전단이었다가 다양했다.


“너도 그런 걸 쓰는구나.”

“엄마 줄 거예요. 내일이 엄마 생일이거든요.”

“그래? 그럼 특별 서비스가 있어야지.”

뭘 줄까 고민하는데 유미는 뾰루퉁해서 대답했다.


“아줌마 돈 많이 벌어요?”

“아니. 보다시피 손님이 없네.”

“그런데 왜 서비스를 줘요? 많이 팔아야죠.”

공짜로 준다는데도 싫다니. 나를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딴죽을 걸고 싶은 걸까.


“어떻게 하면 많이 파는데?”

왜 많이 팔아야 하는지 물어보려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을 싫어한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해서 쉽게 피로해지나? 그런 질문에는 대답을 잘 못한다.


“인터넷에 올려야죠. 요즘은.”

유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뭔가 또 구실을 찾았구나.


“저 알바 시켜주시면 홍보해드릴게요.”

예상했던 말이었다.


결국 알바를 시킬 수밖에 없는 건가. 알바가 있건 없건 상관없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천사직을 수행하며 많은 심부름을 다녔지만 이런 여자아이와 실랑이할 기회는 없었다. 이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네.


“이름도 근사하게 꾸미고요. 명품브랜드처럼.”

“명품?”

“왜 있잖아요. 이름만 들어도 딱 아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거.”

아, 사람들이 구별 짓기할 때 쓴다는 그거.


내가 보기에 사람은 다 비슷한데 자기들끼리 구별 짓기를 좋아한다. 잠깐 살다가는 불꽃같은 시간이라 더 집착하는 걸까?

천사보다 열정적인 모습이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 세계에 사람이 너무 많은가 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줌마는 확실히 사람이 아닌가 봐요.”

“말했잖아. 천사라고.”

“치이, 그걸 누가 믿어요? 보통 사람들은 명품 좋아한다고요.”

“그런 거라면 난 안 할래. 인간의 삶은 재미없거든.”


독특한 색깔의 조약돌 펜던트를 골랐다.

한 개의 돌에 연두와 초록, 흰빛이 어울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아름드리나무 같은 무늬가 보였다. 줄은 가죽끈에 매듭으로 마무리했다.


“어머니께 드려. 생일선물.”

“비싼 것 사면 야단맞아요.”

“괜찮아. 이거 보면 그런 말 안 하실 거야.”

유미는 한참 고민하더니 펜던트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대신 공짜로 사진 올려드릴게요. 수공예 작품 판매하는 사이트도 많거든요.”

유미는 온라인 사이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달숲의 작품 몇 개를 찍어서 올렸다. 가격도 쓰고 간단한 설명도 넣고 나서 이번에는 자기 폰으로 로그인해서 댓글도 달아주었다.


“너 대단하구나.”

“우리 엄마도 인형 옷 만들어 팔거든요.”

“그래? 그거 괜찮네?”

인형 옷을 가게에 내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가게를 지키며 앉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사진 찍어서 이렇게 올리면 돼요.”

유미가 알려준 대로 몇 개를 더 찍어서 올려보았다.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할 만하겠는걸.


“고마워. 이걸로 손님이 오면 좋겠다.”

“목걸이 값이에요.”

이번에는 유미가 인사를 제대로 하고 나갔다. 웬일이지. 배웅하는 척 따라 나갔다.


유미는 거리에 서서 이 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의 시선이 멈춘 곳은 은서의 방이었다. 처음에도 저 방을 보고 있었는데. 바우의 방이 어딘지 모르는구나.


터덜터덜 걸어가는 유미의 뒷모습을 보니 여전히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다음에는 제대로 물어봐야지.


유미가 가고 나서 사진 찍는데 열중했다. 이것도 꽤 재미있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올릴만한 물건이 너무 부족했다. 복원하려면 아무가 낫기를 기다려야 하고, 내가 만든 것은 다른 사람의 작품에 비해 너무 형편없었다.


도저히 올릴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남의 돈을 받으려면 제대로 해야지.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과거로!”


*


이번에 찾은 곳은 전에 보았던 그 객사였다. 같은 장소에 두 번이나 오다니. 이런 우연은 처음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데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이 지난번과 똑같았다.

맞아. 그때 나와 똑같은 사람을 보았지. 그 여자가 지금 여기 있을까.


하륜이 아니라 내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장소에 다시 오는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찾아야 한다.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뚫고 다녔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등불이 켜졌다.

꽤 운치 있는걸. 등불을 바라봄과 동시에 몸이 굳었다.


세상이 모두 무채색인데 등불만 색을 가졌다. 전에 보았던 보라색 자수정처럼. 그 후로도 과거에서 색깔을 본 적이 없는데.


붉은 종이로 만든 등불이라 주황빛이 감돌았다.

멍하니 등을 보고 서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나 할 일이 있잖아. 내 모습을 한 여자가 있는지부터 찾아야지.’


건물 안과 밖을 헤매고 다니다 겨우 여자를 찾아냈다. 그녀는, 아니 또 다른 나라고 해야 하나? 건물 뒤 언덕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덕에 오르니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원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나무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나보다 먼저 여자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자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무 뒤에 숨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내가 안 보이는 걸 알지만 왠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엥? 하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분명 하륜이었다. 나인 줄 알았던 저 여자는 내가 아닌가 보네.

여기서 그와 나란히 앉은 사람이 나일 리 없지. 전혀 기억이 없거든.


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워낙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앉아있는 언덕 아래로 주황빛 등불만 환하게 빛났다.

좀 크게 말씀하시라고요. 마음속 외침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륜이 여자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힘차게 여자를 끌어안았다.

이건 또 무슨 일? 뭐야, 뭐야! 답답해 미치겠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 그럼 그 사람은 어디로 갔지?


다정하게 끌어안은 두 사람이 천천히 떨어졌지만, 둘은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다.

잠시 후 여자가 언덕을 내려갔다. 어허라,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나.


난감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쪼그리고 있어서 발과 종아리가 미치도록 저렸다. 빨리 여자를 따라가야 하는데.

발을 주무르며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쪼그린 채로 다리를 움직여 엉거주춤 걸었다. 움직일 때마다 발이 찌릿찌릿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서 보는 건데.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걸 왜 이렇게 미련하니.

‘어휴, 천계에서는 날리던 재간꾼이 바보가 되다니!’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무를 붙잡고 다리를 폈다. 빨리 숙소로 가보자. 거리에서 여자와 함께 도망 다니던 사람의 얼굴도 봐야지.

어떤 남자인지 몹시 궁금했다. 여자의 정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길래 하륜에게 딱 붙어있냐고!


허리를 펴고 발을 내딛는데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하륜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도 하륜이 아니었나? 그가 저렇게 울 이유가 없는데?


그가 누구이든 울음을 삼키는 모습은 가슴 아팠다.

달빛이 반짝이는 연못과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이 무채색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빛을 밝히는 등불. 아름다운 배경을 두고 흐느끼는 모습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가 일어나 언덕을 내려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런, 나는 또 왜 우는 거야.


결국 같이 온 남자는 보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모습이 안 보인다 해도 방마다 열어보며 은밀한 사생활을 밝힐 수는 없으니.


물론 밤의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주워온 물건은 몇 개 있었다. 풍경은 풍경이고 일은 일이니까.

부러진 비녀, 떨어진 구슬, 색 바랜 조각보도 찾아냈다. 다른 부속과 연결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할 것이다.


가슴이 먹먹한 데도 손은 알아서 움직였다. 이렇게나 빨리 능수능란해지다니. 나의 적응력은 눈부실 정도구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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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3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6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39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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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1 0 10쪽
»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3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1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5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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