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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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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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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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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DUMMY

고개를 드니 어느새 빌라 계단이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무가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이건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 돼요. 만지기만 해도 힘에 눌리거든요.”

“이렇게 귀한 걸 왜 줬을까요?”


”나도 모르죠. 엄청난 횡재라는 것밖에는. 신령수가 누구한테 선물을 주다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아무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뒷짐을 지고는 투덜대며 올라갔다.

자기한테는 왜 안 주냐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힘에 눌릴지 몰라도 지팡이를 만지면 평안해졌다.

나를 지키는 무기이자 방패인가. 천사의 능력도 돌아오고 있고, 무기도 얻었으니 당장 천계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달숲에 나무 향기가 가득 찼다.

묘수의 차원에서 본 새와 열매, 나뭇잎을 본떠 작품을 만들리라. 일찌감치 문을 닫고 작업등만 켰다.


문득 하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준씨, 언제 왔어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영준이 돌아왔구나. 연락도 못 받았는데.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앞치마를 정리하는데 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출장은 잘 다녀왔어요?“

”예. 가온씨는 어디 갔나요? 전화해도 안 받네요.“

하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셔터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도 알겠지.


‘내가 전화를 안 받았다고?’

두리번거리다 물건들 사이에 파묻힌 핸드폰을 찾아냈다. 며칠 동안 충전도 안 하고 있었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멍으로 하륜의 뒷모습과 영준의 얼굴이 보였다.


하륜이 뭐라고 말할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군요.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았네요.“

”문자를 읽지도 않고···.“

영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임은 안 나와요?“

”요즘 바빠서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으니 안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영준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륜이 느리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는 것이 진짜는 아니에요.“


그믐의 손님에게 최면을 걸 때처럼 깊고 진중한 소리였다.

“애써 덮어놓은 페이지는 열지 않는 것이 좋죠.“


영준은 졸음이 밀려오는지 크게 하품을 했고, 힘없이 늘어졌다.

”예? 무슨 말씀인지···.“

”인연이 길어질수록 빚이 쌓이는 사람도 있어요. 어쩌다 열렸어도 멈춰야 해요. 매듭을 지어야죠.“


두통이 밀려왔다. 길고 뾰족한 것이 머리를 찌르는 듯 한 아픔,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하륜은 알고 있다. 영준이 누구의 기억을 가졌는지, 나와 어떤 인연이었는지, 내가 왜 악몽을 꾸는지.

그래서 악몽을 꿀 때마다 그가 도와주었나. 그럼, 이것도 미리 알았다는 거야?


”예.“

대답하는 영준의 목소리는 느리고 기운이 없었다.


하륜이 천천히 그리고 힘 있게 말했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그만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요.“

영준이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륜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다리와 허리가 아팠다.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엉킨 끈을 풀어야 한다고?’

영준은 인간계에서는 드물게 맑은 사람이었다. 내게도 친절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고 나니 안심이 되다니.


사람은 동시에 반대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 편으로는 감사 기도를 하며 한 편으로는 저주를 퍼붓는 능력.


한 편으로는 나가고 싶고 한 편으로는 머물고 싶은 마음. 좋으면서도 싫은 것. 인간계에 얼마 머물지 않았어도 그런 마음을 벌써 배웠구나.


하륜에 대한 의문도 커졌다. 그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수수께끼가 너무 많다. 마음을 다잡고 경계해야 해. 진실은 때로 잔인하다잖아.


*


언제부터인가 시간의 장벽을 넘어가면 물건 말고 다른 것도 찾게 되었다.

하륜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었다.


기연랑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었지만, 하륜은 거의 자리를 지켰다. 적어도 시간의 장벽이 기억하는 범위에는 그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인간계에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정령들이 문지기를 맡았다.

그때 정령들은 여러 동물의 모습이었다. 묘수의 차원에서처럼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인간계 사람들도 다른 차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차원과 차원은 경계가 맞물려 있어 어쩔 수 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시간의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은 공허한 마을이었다. 사람이 떠나고 빈집만 남았다.

담이 무너지고 집도 부서졌다. 폭발이 일어난 걸까?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공사 감독관과 인부들이었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돌아다닐 생각은 전혀 없으므로 하륜부터 찾았다.


담장을 돌아나가니 구멍가게 앞에 하륜이 앉아있었다. 지금의 하륜과 비슷했다.

슬라브 지붕 집에 가게의 유리문은 떨어져 나갔고 그가 앉은 나무 의자도 높이가 맞지 않아 삐걱거렸다.


가게 이름이 천사 문방구?. 푸흡 웃음이 터졌다.

바로 옆 가게는 신세계 만물상회였다. 저 이름은 어디서 들었는데?

아! 달숲의 전신이라는. 신세계 만물상회에서 시크릿으로 바뀌었다고 했지.


기연랑이 만물상회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여기서 그는 십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바구니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달숲에 있던 물건이었다.


처음 왔을 때 진열대에 있던 물건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기연랑이 하륜 옆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벌써 칠백 년이 넘었어요. 빛결님은 안 올 거예요.“

”금방 돌아올 것 같았는데···.“

”빛결님이 너무 순수해서 그래요. 오히려 사람들이 더 당당하잖아요.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하륜은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하륜과 빛결이 아는 사이일 거라 예상했다.


빛결과 술을 마셨다고 했을 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음에는 같이 마시자고도 했다. 표정을 보니 빛결을 많이 좋아한 것 같은데.


”가해자는 웃을 수 있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해요. 심지어 죄를 지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잖아요.“

“그의 분노가 더 많은 죽음을 부를 텐데.”

하륜의 말에 기연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차원의 문은 어쩌죠?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텐데.”

“잠시 허공으로 올려놓을 수는 있어요.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제가 도울게요. 그 정도 힘은 있어요.”

“충격이 클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건너 차원에 갔다 올 거니까요.”


기연랑이 바구니를 들고 가게 옆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나온 곳과 반대편 통로였다. 한 짝뿐인데도 덜렁거리며 비스듬히 걸쳐있었다.


하륜은 기연랑을 따라 들어가다 멈칫하더니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이크.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얼른 담장 뒤로 숨었다. 보이지 않는 걸 알면서도 본능이 먼저 움직인다.


뒷걸음질로 빠져나와 골목을 돌아갔다.

이 마을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 거지.


주거환경개선이라는 현수막이 여러 군데에서 펄럭였다. 벽마다 ‘철거’라고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과거는 흑백의 세상이라 검은색이지 색이 있었다면 피를 뿌려놓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공사 담당자들마저 가버린 마을은 무덤 속이었다. 공포 영화처럼 으스스하고 괴기스러워 어디선가 시커먼 괴물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나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폐가 안쪽 방에 낡은 경대가 덩그러니 놓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보상받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안 쓰는 물건을 버리고 갔다는 얘기. 그 순간 나는 하륜도 잊고, 기연랑도 잊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다.

‘이건 완전 대박인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달숲에 어울릴만한 소품을 찾기 시작했다.

물건을 다 잡을 수는 없고 그중에서 내게 오는 물건을 찾느라 집중 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눈이 가는 곳을 따라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문득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발소리를 들었는데. 내 발소리인가?’


배낭을 가득 채우고 겨우 허리를 폈다. 뚜두둑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여기가 어디지?’

그제야 여기가 과거이며 모르는 동네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길을 잃은 거야?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모르는 길이었다.

혹시 삽살이가 오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삽살이를 찾았다. 길을 잃을 때마다 도와줬는데.


아, 맞아. 그 아이들은 묘수의 차원으로 돌아갔지.

‘이제 어떻게 하지?’


발을 동동 구르며 두리번거렸다.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사람이 있어도 여기서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콩콩 쥐어박는데 길바닥에 떨어진 보라색 조약돌이 보였다. 이 흑백의 세계에서 보라색이 튀어나오다니?


자갈보다 조금 커서 색깔이 없다면 못 보았을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냥 돌이 아니었다.


‘자수정 조각 아냐?’

냉큼 주머니에 넣었다. 와우, 여기서 색깔을 보는 것도 기묘한데 자수정 조각이라니.


반대편 골목에 자수정 조각이 하나 더 떨어져 있었다. 보라색 눈물방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영롱했다.

이걸 왜 못 보고 지나쳤을까. 이제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야.


하나를 줍고 나니 갈림길에 또 하나가 보였다.

그렇게 다섯 개나 되는 자수정 조각을 주워드니 내가 나왔던 집 앞이었다.


골목을 둘러보았지만 더는 보이지 않았다. 설사 있다 해도 이 집을 벗어나면 돌아가지 못하므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적당히 해야지. 중용을 걸어야 해.’

혼자서 길을 찾아낸 내가 너무나 대견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에는 삽살이가 없어도 돌아갈 문을 찾은 거잖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륜을 보러 과거로 갔다는 것도, 빛결에 대한 궁금증도 깨끗이 잊어버린 뒤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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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6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4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7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6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6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5 0 10쪽
47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0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7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39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0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2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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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1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6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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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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