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7.19 17:56
최근연재일 :
2022.08.04 14:15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2,055
추천수 :
23
글자수 :
246,751

작성
22.08.03 14:00
조회
40
추천
0
글자
12쪽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DUMMY

내가 알던 고연당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몽땅 세일’, ‘헐값에 드립니다’라는 종이와 현수막이 지저분하게 붙었다. 문에도 급매물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걸렸다.


물건을 팔았는지, 아니면 정말로 헐값에 넘겼는지 가게 안이 휑하니 비었다. 그나마 남은 전시품도 거의 포장되어 있었다.

그동안 문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최씨는 잠을 못 잤는지 눈동자는 충혈 되고 눈 밑이 거무죽죽했다. 얼굴빛도 누렇게 떴다. 나를 알아볼 텐데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는 심드렁하게나마 아는 척했는데.

왜 또 왔냐며 박물관에나 가라고 농담을 던지지 않았나.


“그동안 가게 문 안 열고, 뭐하셨어요?”

“평일에는 알바 세 개 뛰고 주말에도 일해.”

“그럼 언제 쉬어요?”

“쉬면 안 돼. 돈 쓰게 되잖아. 쉬지 않고 일하면 돈도 벌고 쓸 일도 없지. 크크.”

최씨는 웅얼웅얼 대답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 말이 흐릿했다.


“가게도 파는 거예요?”

“일하느라 가게 볼 시간 없어. 이런 것들은 도움이 안 돼.”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골판지와 노끈으로 엉성하게 묶인 축음기가 보였다.


“아버지 유품이라고 아끼던 거잖아요? 이것도 팔아요?”

“그게 뭔데? 돈보다 중요해?”

최씨는 엉성한 손놀림으로 남은 물건을 싸맸다.


영혼수집가는 영혼의 일부를 가져간다.

그들에게 영혼을 빼앗겨도 금방 죽지 않는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살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살랑도 알고 있겠지. 사람이 돈을 믿으면 어떻게 바뀌는지.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도, 다른 생명도 쉽게 버린다. 그렇게 되면 일곱 번째 지구는 사람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문득, ‘영혼의 일부’에 생각이 미쳤다. 일부만 가져갔다면 아직 몸과 영혼이 이어졌을 것이다.


가게 안을 기웃거리며 최씨를 살펴보았다. 희미하기는 해도 가느다란 끈이 하나 보였다. 연둣빛을 띤 끈이 천장을 통과해 밖으로 이어졌다. 내가 사람의 몸이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거다.


최씨의 영혼을 구해오리라.

영혼을 담을 도구라면···. 나는 바우에게 받은 구슬을 소환했다. 해밀의 차원에서 건너온 스노우볼이었다.


은서는 구슬에 정령의 사랑을 담았다고 했다. 아버지 정령이 소멸하기 전이었다면 그의 영혼을 담았을 거라고 말했지.

바우가 내게 구슬을 줄 때만 해도 그저 예쁘고 신기했는데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소환에 응답해 나를 찾아온 구슬은 할 일을 아는지 푸른빛을 뿜어냈다. 살랑을 상대하게 되다니···.


나는 곧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끈을 따라 날아갔다.


연둣빛 끈은 도시를 지나 외곽을 둘러싼 산 아래로 이어졌다. 절벽으로 깎인 산 중턱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혼의 끈이 이어진 동굴은 바위 사이 잡목림으로 막혀있었다. 이끼 덮인 바위 주변에 그림자들이 모여 있어 낮인데도 깜깜한 밤이었다.


수백 개의 끈이 구멍 안으로 이어졌는데 중간에 끊어진 것이 더 많았다. 동굴 앞에 멈춰 서니 그림자 무리 속에서 살랑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천사님이 직접 오다니.”

소름 돋는 살랑의 목소리에 몸이 바짝 굳어졌다.


“고연당 최씨의 혼을 찾으러 왔다.”


살랑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어두운 그림자는 키킥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리로 웃었다.

“천사들은 그게 문제야. 자신들이 고른 사람만 구원하려 하지.”


“한 사람이라도 구하려는 거야. 영혼의 빛깔을 아니까.”

“아니. 언제나 불공평했어. 언제나!”

살랑의 그림자가 심하게 쿨렁거렸다.


“알아? 신은 너무 게을러. 갈아엎을 것은 일찌감치 엎었어야지. 그러니 내가 나설 수밖에!”

그림자와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연둣빛 끈이 점점 엷어져갔다.


“최씨의 영혼은 어디 있지?”

“영혼이야 육체 안에 있겠지. 영혼이 없으면 벌써 죽었게?”

“영혼수집가를 만들기 위해 가져간 조각 말이야!”

“크크크크.”

이번에도 그림자가 요동쳤다. 사방으로 흩어질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림자는 사방으로 퍼졌다가 곧 하나의 덩어리로 돌아왔다.

“천사는 어쩔 수 없다니까. 그렇게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다니.”

“뭐라고?”


“벌써 잊었나. 너의 목을 쳐서 성문밖에 걸어놓으려 했던 사람을.”

“비현공···.”

“천사의 능력이 필요할 때마다 네가 걸려드는군. 너와 나의 인연이 깊은 건가. 크크.”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목에 칼날이 들어오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현공을 움직인 그림자가 살랑이었나.

그때는 이유를 찾을 정신도 없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누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까.


“그때 성공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끼끼긱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달라졌어. 사람들 스스로 영혼을 바치려 하지.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거든.”

그림자가 커지며 옆으로 길게 이어졌다. 울타리처럼 나를 완전히 둘러쌌다.


“그때 얻지 못한 것을 지금 가져야지!”

살랑이 웃는 것처럼 꿈틀댔다.


“영혼은 어디 있냐고!”

화가 치밀어 소리 지르는데도 살랑은 느물거리며 몸을 흔들어댔다.


“왜 그자의 것만 찾으려고? 다른 사람은 영혼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사라졌는데 하나만 찾으려 한다니. 그건 집착이야. 네가 지후 때문에 목숨을 건 것도 어리석은 집착이었지.”

그림자의 쿨렁거림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는 있겠군.”

살랑의 그림자가 다시 한곳으로 모이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림자의 한쪽이 막대기처럼 툭 불거져 나왔다.


그림자 팔은 허공에 크게 원을 그렸다. 원을 따라 공간이 나뉘었고 출렁거리는 막이 생겼다. 수직으로 서 있는 연못 같았다.


“정확히 그 혼을 찾는다면 돌려주지. 그까짓 영혼 하나쯤 없어도 그만이거든. 혼을 바치려는 사람은 넘쳐나니까. 네가 찾는다 해도 그자는 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림자 팔이 흔들리자 공간을 여는 막도 출렁거렸다.

“길을 못 찾으면 너도 갇히게 될 거야. 길을 잃는 건 네 특기잖아?”


출렁이는 물비늘에 시선을 맞추는 순간 몸이 휙 빨려 들어갔다.


물비늘 안쪽은 끝없는 허공이었다.

온갖 색깔이 섞인 어지러운 허공에는 가느다란 끈과 끈이 그물처럼 얽혀있었다. 대부분은 끝이 잘려있었다.


연둣빛 끈을 따라갔다. 줄 끝에 연둣빛 공기 덩어리가 있었다. 육체의 맥박에 맞춰 꿈틀거리는데 움직임이 미약했다.


최씨의 혼에 바우의 구슬을 갖다 댔다. 구슬 꼭대기에 물결이 일 듯 공간이 열리더니 영혼을 빨아들였다.

혼이 들어가자 구슬은 곧 딱딱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살랑의 영력 때문인지 구슬을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내 몸에 구슬을 감추고 끈을 따라 거꾸로 나아갔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허공이 무섭지 않았다. 고요하고 아득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모든 색이 섞여 어지럽게 보이면서도 적막했다.

‘여기는 어디지? 다른 차원은 아닌데. 살랑이 만들어낸 공간인가?’


허공을 둘러보다 보라색 끈이 눈에 띄었다.

보랏빛이 선명한 끈을 보니 누군가가 생각났다. 누구였더라. 그와 비슷한 색을 가진 사람이.


과거에 갔을 때 얻어온 자수정 조각과 같은 빛. 가슴이 뛰었다.

달빛 아래 오묘하게 색이 변하던 눈동자, 그를 떠올리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빛결!”


그의 선하고 슬픈 눈이 생각났다. 이 끝에 빛결이 있어!

급한 마음에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순간 휙 하는 마찰음과 함께 내 몸은 공간 밖으로 튕겨졌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이었다면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여기까지. 그 정도면 네 능력을 인정해주지.”

살랑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음엔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할···.”


내 몸에 숨겨둔 바우의 구슬에서 뜨거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살랑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진저리치더니 사라졌다.


서둘러야 했다. 끈이 더 희미해지면 혼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곧장 고연당으로 날아갔다.


고연당 앞에서 구슬을 쓰다듬자 스르르 혼 덩어리와 끈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우왁! 이거 뭐야! 도둑이야! 도둑!”

최씨가 미친 듯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터덜터덜 거리로 나섰다.

빛결이 살랑에게 잡혀있다니, 생각도 못 했다. 다음에 살랑과 대적할 때는 리엘의 구슬을 소환해야지.


여왕의 신력으로 만든 구슬에 정화의 힘까지 넣었다고 했지.

거기에 빛결의 영혼을 담으면 다시는 살랑에게 삼키지 않을 것이다.


*


며칠을 기다려도 영혼수집가나 살랑을 볼 수 없었다.


천사로 돌아왔어도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전 모습대로 보일 테고, 차원의 문지기로 달숲을 떠날 수도 없으니 곧 일에 몰두했다.


소품을 만드는 일도 손에 익었고,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도 익숙해졌다. 하륜과 함께 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운명의 상대도 중요하고 사랑도 소중하지만 내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하륜은 인간계에 있으면서도 선위로서의 능력과 품격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나도 분발해야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는데 은서가 노트북을 들고 가게로 들어왔다. 능숙하게 테이블에 노트북과 메모를 펼쳤다.


“카페에 단체 손님이 들이닥쳤지 뭐예요.”

은서가 배시시 웃으며 손바닥으로 귀를 감쌌다.

“어휴,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가게가 쩌렁쩌렁 울린다니까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메모를 확인하며 볼펜으로 수첩을 두드렸다.

“중간에 꽉 막혔단 말이죠. 가온님 아이디어 좀 얻으려고요.”

“내가 소설을 아나요? 작가님 머릿속에 있겠죠.”

“한 곳만 오래 보면 놓치는 게 생기거든요. 그럼 주변의 변수를 못 봐요.”


숙연해진 공간에 갑자기 핸드폰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영준이었다.

‘지후는 지후이고 영준은 영준이죠.’

하륜의 말이 떠올랐다.


전화를 받지 않자 잠시 후 벨 소리가 멈추었다. 은서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안 받아요?”


은서에게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말해주었다.


영준의 전생인 지후로 인해 죽을 뻔 했는데, 아무래도 기억의 찌꺼기가 남은 것 같다, 그 때문에 내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고 믿는다.

이 찌꺼기를 지우고 새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다. 짧게 이야기를 끝냈다.


은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곧이어 손가락이 이마로 올라갔다. 한참 뒤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상처를 줄 수도 없고.”

“공백 없이 기억을 지우면 좋겠는데. 이런 이유로 사람의 기억을 막 지울 수도 없고···.”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어떤 거요?”

“꽃술 할머니가 잘하는 거 있잖아요. 중매.”

“에, 중매요?”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직천사 가온의 생활적응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이번 이야기는 마무리되어도 22.08.04 36 0 -
54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2 22.08.04 47 0 10쪽
53 에필로그 – 하륜의 이야기 1 22.08.04 35 0 10쪽
52 꽃이 질 때 다시 필 것을 알고 있듯 22.08.04 38 0 13쪽
51 사라져도 좋은 추억은 없어 22.08.04 47 0 9쪽
50 마지막 대결 22.08.03 34 0 12쪽
49 우연을 가장한 만남 22.08.03 37 0 12쪽
48 비바람을 견뎌야 열리는 씨앗 22.08.03 36 0 10쪽
» 움직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야 22.08.03 41 0 12쪽
46 꽃잎에 어린 눈물이 새벽을 깨우면 22.08.02 38 0 12쪽
45 내 깊은 울음이 기억하는 이름 22.08.02 37 0 9쪽
44 잃어버린 기억 6 – 부딪치는 두 세계 22.08.02 40 0 12쪽
43 잃어버린 기억 5 – 기다림이 꽃을 피운다 22.08.02 41 0 11쪽
42 잃어버린 기억 4 – 갈 곳도 없이 22.08.01 40 0 8쪽
41 잃어버린 기억 3 – 머물지 못하고 22.08.01 63 0 9쪽
40 잃어버린 기억 2 - 숨어있는 고리 22.08.01 36 0 10쪽
39 잃어버린 기억 1 – 근원을 찾아서 22.07.31 36 0 10쪽
38 뭔가 일이 터지겠군요 22.07.31 36 0 10쪽
37 비바람이 지나면 한 뼘 더 자랄 거야 22.07.31 42 0 10쪽
36 운명적인 만남을 운명이라 믿으면 안 돼 22.07.30 42 0 10쪽
35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해요 22.07.30 34 0 10쪽
34 어떤 빛깔도 어울리는 오늘 22.07.30 37 0 10쪽
33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올 때 22.07.29 32 0 10쪽
32 가면이 두꺼워지면 눈물도 늘어나 22.07.29 30 0 11쪽
31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야 22.07.29 34 0 11쪽
30 문이 열리면 새로운 비밀이 들어서고 22.07.28 32 0 11쪽
29 길목마다 서성이는 바람 22.07.28 37 0 10쪽
28 고개를 돌려요, 그림자가 사라질 거예요 22.07.28 29 0 10쪽
27 가끔 잃어버려야 맞는 길이죠 22.07.27 30 0 11쪽
26 이렇게 만난 인연도 소중하니까 22.07.27 30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