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위난 (3)
마을로 돌아간 홍위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홍위가 왔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송유빈과 전호인이 허둥지둥 나왔다. 말을 매어 두는 홍위를 보자마자 호인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나으리······ 나으리 도대체 어디를 가셨습니까요.”
“내 잠시 마음이 산란해서 돌아다녔었네.”
“혼자서 돌아다니시면 해를 입으실 수도 있습니다.”
호인의 말에 홍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이. 허나 내 목숨이 끊어질 운수였으면 진작에 끊어지지 않았겠는가.”
“나으리께서 잘못되시면 소인은 제 아버님을 무슨 낯으로 뵈오리까.”
그 말에는 홍위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네.”
“호인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옥체 보존하셔야지요.”
그 동안 잠자코 있던 송유빈이 나섰다. 홍위는 계면쩍게 웃을 뿐이었다. 유빈은 그제서야 홍위와 함께 있던 정호찬을 알아채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삿갓 쓴 그의 얼굴을 살피던 유빈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이 분은······ 아니, 이 사람 예까지 어찌 왔는가?”
반가움에 넘친 유빈의 외침에 홍위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놀랐다. 삿갓을 벗은 호찬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그간 격조했었군.”
“격조하다뿐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삼 년 전인가?”
“그쯤 되었지. 자네가 만포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엇갈리게 되는군그래.”
유빈과 호찬은 양반 체통도 잊고 서로 얼싸안았다. 홍위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건넸다.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였구려.”
“그렇습니다. 이 사람과는 소싯적 동문 수학한 사이였더랬습니다.”
송유빈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송유빈과 정호찬은 본디 같은 스승 밑에서 글공부한 인연이 있었고, 공부를 마치고 헤어진 후에도 간간히 만나 술잔을 나누곤 했더랬다. 유빈이 호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 집안이 구왕조를 섬기던 집안이라, 이 친구는 일찍이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아 관직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소신의 부친께서 절재 김종서 대감을 따라 북변으로 올라가게 되면서 소신 역시 북변에 올라가는 통에 한동안 격조했습니다만, 이 친구가 종종 북변에 찾아와 주었습니다.”
“거 참, 의리가 깊은 친구구려!”
이야기를 듣던 호인이 감탄했다. 호찬이 빙그레 웃었다.
“자네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이를 말인가. 소신이 무과 등과하고 함길도에서 근무할 적에 이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매우 적적했을 것이오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음양 술수에 능한 친구입니다. 올 때마다 점괘를 보아 주곤 했는데, 신통합디다.”
그 말에 홍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내 점도 보아 준 적이 있었으이.”
“그러시었습니까?”
홍위의 말에 유빈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홍위는 자신이 영월 정배갈 적 이야기를 간략히 풀어놓았다.
“이 사람 아니었으면 내가 오늘 이렇듯 야인 땅으로 올라갈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일세.”
“그런 인연이!”
유빈이 감탄하는 가운데 홍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귀한 손님이 오신 듯하니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세. 안 그래도 중대한 이야기도 있고 말일세.”
마을 우두머리가 하는 일이라 주안상은 금방 차려졌다. 근처 숲에서 야인 부하들이 사냥해온 노루가 잘 손질되어 나왔고, 담가 두었던 청주가 나왔다. 정호찬이 그것을 보고 감탄했다.
“훌륭합니다. 음식들이 조선 습속대로 입에 맞습니다.”
그 말에 홍위가 호인을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제법 재간꾼일세. 농사도 지을 줄 알고, 음식도 더러 지을 줄 알고, 이제는 쇠질도 할 줄 아니 말일세.”
“원 나으리께서도······.”
칭찬을 들은 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술잔에 맑은 청주를 가득 담은 홍위가 호찬을 필두로 일동에게 술을 권했다. 그들이 막 잔을 들어올리려는데 바깥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유빈이 밑에 두고 부리는 야인족 청년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대인이 도착했습니다.”
“손돌이······? 거 참, 바빠서 얼굴 보기 어려운 사람이 때를 맞추어 잘 왔군! 들라 하게.”
야인 청년이 꾸벅 절을 하고 바깥으로 나섰다. 이내 장손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입성은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 다소 먼지투성이었으며 피로한 기색이 배어 나왔으나 표정만은 늘 그랬듯이 밝았다.
“소인, 다녀왔드랬습니다.”
“어서 앉게! 마침 잘 왔네.”
장손돌이 자리에 앉으면서 맞은편에 있는 정호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몸소 술을 따르던 홍위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심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이 사람, 어떻게 보면 내 목숨을 구해 준 인연이 있고 또한 송 군관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장손돌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주의 깊은 눈으로 호찬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밀수꾼 노릇을 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렇게 경계부터 하는 것이다. 호찬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눈길을 받았다.
“처음 뵙겠소이다. 시생 정호찬이라 하외다.”
“장손돌이라 하오. 저······.”
장손돌은 홍위 쪽을 쓱 바라보았다. 홍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정호찬도 홍위의 진짜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 아니지 나으리 밑에서 상단을 꾸리고 있소이다.”
“장대인의 소문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정호찬의 말에 장손돌이 겸연쩍게 웃었다.
“허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큰일인데. 밀수꾼 노릇하는 놈이 소문을 내고 다닌다면 이거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장대인에 대해서 구체적인 소문이 나돈다는 것은 아니고, 일대에 암상 하는 자들은 다 들어 알고 있더군요.”
“어이쿠, 이런 큰일이올시다! 암거래 하는 놈이 이렇게 이름이 알려져서야······ 허, 허, 허.”
손돌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모두에게 술잔이 돌아가자 홍위가 잔을 들었다.
“자,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인연이니 술이나 듭시구려.”
일동은 술을 쭉 들이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손돌은 이번 여행의 성과를 이야기했다. 그는 이전까지는 미처 거래를 트지 않았던 두만강 하류까지 상단을 이끌고 갔었다.
“이전까지는 그 쪽 사람들과 직접 거래를 트지 않았는데, 이번에 상로를 개척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지요. 한데,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홍위의 물음에 손돌이 입가에 묻은 술방울을 슥 털어내고 말을 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창업군주이신 태조대왕의 성망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있더군요. 태조대왕께서 승하하신 지 이러구러 오십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더이다.”
“호오, 그건 놀랍구려.”
그 말에는 홍위뿐 아니라 유빈이나 호인 모두가 적지 않게 놀랐다.
“본시 태조대왕께서는 부친 되시는 환조대왕과 함께 작금 야인들 무리 안에서 세를 떨치시지 아니하였습니까. 개국공신 이지란 (李之蘭) 께서도 역시 야인 출신이셨고.”
환조대왕이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李子春)을 말함이다. 홍위가 동의했다.
“그렇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정호찬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전하께오서 야인 땅으로 오신 것도 하늘이 점지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무슨 말인가. 오늘 나를 이 곳까지 인도한 것은 자네의 점괘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마음을 먹었겠는가. 다 그대의 공일세.”
정호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괘란 결국 하늘의 운수를 짚어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사는 인명이요, 성사는 재천이라, 운칠기삼이라 하되,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이 움직이지 아니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오이다. 시생은 단지 전하께 동기를 부여했을 뿐······ 정작으로 움직이신 것은 오로지 전하의 공이시오이다.”
“그러한가.”
홍위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호찬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홍위를 바라볼 뿐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내 요새 심기가 산란하던 차일세. 마침 그대를 만나게 되니 내 마음이 트이는 것 같네.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나에게는 자네가 영월에서 내게 건네 준 그 표적과도 같은 것이 절실했던 참이야.”
홍위의 말에 유빈과 호인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홍위의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알 만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자네는 이곳에 찾아온 연유를 내게 장차 닥쳐올 환난을 알려 주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나 좀 전에는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였지. 무슨 일인가.”
정호찬은 주위를 가만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생이 천명을 돌아보고, 조선 팔도를 주유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무릇 환난이라 함은, 사람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한 단계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홍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겠지.”
“소인이 이제 전하를 다시 뵈오니, 영월에서의 일 이후 전하께서는 스스로를 옭아매었던 매듭을 한 단계 풀어 헤치셨나이다. 허나, 외람되온 말씀이오나 진실로 크게 비상하시려면 아직도 미진하오이다.”
“무슨 말인가?”
정호찬은 대답 대신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전하, 처음 뵈올 때 전하의 상은 과연 길상이시었으나, 이미 지나간 세상의 모든 업을 홀로 짊어지려고 하기에 그 길한 상이 가려지는 듯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괴로워하셨기에 타고난 운수를 살리시지 못하였나이다. 만일, 전하께오서 지나간 업에 얽매여 영월에 머무르시었다면, 지금쯤 이 자리에 있지 못하시었을 겁니다.”
그 말에 호인이 불편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고, 유빈은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홍위는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나는······ 자네의 글발을 보고 나서도 눈이 어두워 영월에서 그대로 명을 마칠까, 그러하고 있었소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께오서는 영월을 벗어나 북행길을 결단하실 때부터, 과거의 업을 끊어 내려고 작정하신 것이오이다. 그렇기에 전하의 운수가 트이게 된 것이오이다. 보십시오. 전하의 주위에 모여든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정호찬이 주위에 앉은 세 사람, 송유빈과 전호인, 장손돌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전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원 그런 말씀을 다 하시우.”
“이런 충심 있는 이들이 전하께 모여든 것은 거저 정해진 일이 아니올시다.”
“과연 그렇소. 나 역시 그대들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느니.”
홍위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이자, 호인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고 나머지 두 사람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진실로 전하께오서 영월에서 벗어난 결단을 내리신 것은 앞날을 위한 커다란 한 걸음이셨습니다. 다만······.”
“다만?”
정호찬은 홍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께서의 타고나신 인자한 성품 탓에, 전하께서는 스스로 여러 업을 짊어지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월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하신 이후 어느 정도 나아지셨습니다만······ 아직도 전하께서 짊어지시려 한 업이 많아 보입니다.”
잠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홍위는 묵묵히 잔에 술을 채웠다.
“전하, 전하의 상은 틀림없는 패업의 길을 걸어가실 상이오이다. 허나, 전하께서 패도의 길을 걸어가시려면 지금 같아서는 아니 되십니다. 패업이란 비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인이 말한 환난은, 어떤 점에서 보자면 전하의 마음가짐에 따라 어떻게 될지 달려 있음입니다. 마치 영월에서 북행길을 택하시느냐, 택하시지 않으시냐에 따라 그 환난이 어떻게 돌아올지 달라지듯이 말이옵니다.”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호찬의 말에 유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홍위가 그를 가로막았다.
“아닐세. 내 느낀 바가 많이 있네.”
홍위는 정호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패업의 길이라······ 자네는 내가 정녕 그리할 수 있다고 보는가. 사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숙부되는 자는 어떤가. 그야말로 패도에 어울리는 이가 아니던가.”
싸늘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호인은 불안한 눈치로 홍위와 호찬을 곁눈질하고 있었고 유빈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손돌은 태연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확실히 그러했습니다.”
정호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홍위는 단숨에 술을 입 속에 털어넣었다.
“패도의 길을 걸으라······ 과거의 업을 내려놓으라.”
“그렇습니다.”
홍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괴로운 한숨이었다. 정호찬은 그런 홍위를 바라보았다. 잠시 텅 빈 잔을 내려다보던 홍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조언 고맙게 듣겠네.”
그 때 유빈이 호찬에게 눈짓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빈이 잠시 소피 좀 보러 뒷간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홍위가 시름없이 그러라고 답하자 유빈이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호찬도 일어섰다.
정호찬이 바깥으로 나오자 송유빈은 마당에 그대로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새벽 하늘을 바라보던 유빈은 호찬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이 사람, 너무 멀리 나갔어.”
“그렇게 보는가.”
호찬은 미미하게 웃었다. 유빈이 돌아보았다.
“그럼 그렇지 않고? 자네 같은 이가 전하의 성정을 꿰뚫어보지 못했을 리가 있는가. 그분은 어지신 분이야. 안 그래도 요새 그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는 듯해 보이셨어.”
“그 말이 내가 한 그 말 아닌가. 모든 나쁜 일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괴로워하는 분이지. 그야말로 과거의 업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에게 대놓고······.”
유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호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만약에 과거의 업에 얽매이기만 하시는 분이라면 애당초 괴로워하지도 않으셨어. 애초에 조선 땅을 버리고 야인 땅으로 오겠다는 결심이 아무 사람이나 하는 것이던가. 어떻게 보면 북행길을 내가 권유한 것은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기도 했다네. 그러함으로서 과거의 업을 내려놓은 첫 걸음을 떼는 것이지.”
유빈은 묵묵히 호찬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 분도 내심으로, 마음 속 한 구석에는 포부가 없지는 않아. 그분의 눈빛을 통해 보면 알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이지.”
“그러한가.”
유빈은 한숨과 함께 그 말을 토해냈다.
“나는 그 분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셨으면 성군으로 될 법한 분이셨는데, 어쩌자고 이런 난세에 태어나셔서.”
“어떻게 보자면, 이런 환난이 그 분에게 잠재되어 있던 패도의 길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겨낸다면 말일세.”
호찬의 그 말은 거의 중얼거림이나 다름이 없었다. 탄식하던 유빈이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닐세.”
두 사람은 잠시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먼동이 틀 때였다. 호찬이 말을 걸었다.
“새벽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네.”
“그렇겠지.”
“아까 전에 환난이라고 했지만, 전하께서 비로소 비상하기 전까지는 자네 같은 주변 사람들이 더 힘들 게야. 자네가 전하를 안쓰러워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자네가 더 안쓰럽다네.”
호찬의 말에 유빈이 쓸쓸하게 웃었다.
“애초에 만포진을 박차고 나올 때부터 감수했던 일이야.”
호찬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자네같이 올곧은 사람이 더욱 힘든 법이지. 아무쪼록 전하를 잘 보필해드리게.”
“자네는······.”
유빈이 놀란 듯 호찬을 바라보았다. 호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때가 아니야. 조만간 전하께서도 시련의 길에 들어설 것이 보이더군. 그분이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따라서, 나나 자네, 그리고 나와 전하의 길이 다시 엇갈릴지 모르지.”
유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되었건 그는 홍위를 따르겠노라고 맹세했던 것이기에 호찬의 당돌한 말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빈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호찬의 인물됨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네라면 전하에게서 매정하게 등을 돌리지만은 않을 거라 믿네.”
“어떻게 아나?”
호찬이 처음으로 흠칫 놀란 체 하며 유빈을 돌아보았다. 유빈이 빙긋 웃었다.
“눈빛이야. 자네가 전하의 눈빛을 읽은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읽을 수 있더군.”
어스름이 조금씩 옅어져 가는 새벽 하늘에 두 사람의 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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