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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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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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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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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몰려오는 먹구름 (5)

DUMMY

노산군부인으로 강등된 송씨가 살고 있는 흥인지문 바깥 청룡사 근처에서는 아낙네들이 모여서 수군대고 있었다. 몇몇은 딱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몇몇은 눈물마저 짓고 있었다.


“아유, 마님께서 이 일을 어째.”


“하늘도 무심하시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두고 보시지 않을게야.”


아낙네 하나가 안타깝게 부르짖자 옆에 있던 다른 아낙네도 맞장구를 쳤다. 노산군부인 송씨가 신대감의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이미 동리에 쫙 퍼져 있었다. 그러나 송씨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수강궁에서 쫓겨난 이후 그녀는 청룡사에 살면서 염색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일거리가 없을 적에는 그녀는 매양 동망봉 (東望峯)에 올라 지아비 있는 영월을 바라보곤 했는데, 홍위가 영월에서 종적을 감춘 후에는 불문에 귀의하다시피 해 청룡사 불당에서 매양 불공을 드리곤 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목숨도 거두어 간 것으로 모자라서 조카며느리까지······. 천벌을 받지, 암, 천벌을 받고말고.”


“에구, 감골댁! 그러다 큰 일 나요.”


한 노파의 말에 주변에 있던 아낙네들이 질겁했다. 자칫하면 경을 치를 수 있는 말이다. 노산군부인 송씨의 사정이 가긍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역죄인의 딸이자 역시 대역죄에 연루된 자의 아내였다. 아낙네들이 송씨의 형편을 딱하게 여겨 끼니거리를 십시일반으로 주는 것조차 관가에서 막는 통에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가져다 주는 형편이다. 하물며 나랏님이 천벌을 받으리란 소리가 관가에 들어가면 몸이 성할 리 없는 것이다.


“내야 나이도 이미 먹을 만큼 먹는 할망구가 아니여.”


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아낙네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 이야기가 뚝 그쳤다가 이윽고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듣자니까 노산군께서 영월서 목숨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데.”


“그게 무슨 말이야, 칠성댁?”


아낙네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홍위가 영월에서 종적을 감추고 몇 개월이 지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수양이 보낸 자객이 이미 후환을 없이 한 지 오래고, 노산군이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은 단지 세간의 눈을 속일 양이라는 말도 널리 퍼졌다. 왕위를 손에 얻기 위해 수많은 양반님들이며, 혈육지간인 안평이나 금산대군도 죽인 사람이 수양 아니던가. 노산군이 아직 살아서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소문도 물론 돌고 있었기에 의견은 분분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미 노산군이 죽었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송씨가 아직 청룡사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아는 아낙네들은 노산군이 살아 있으면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았겠느냐며 그가 죽었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던 참이었다.


“성 안에서 돌고 있는 말인데, 노산군께서 영월에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멀리 야인 땅으로 피신하셨다더래.”


“야인 땅으루······?”


“그렇더라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노산군께서 지금 임금을 치기 위해 군대를 기르고 있더라지. 듣기로는 그 때문에 나라에서 군대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도 있다더래.”


여인의 속곳 속처럼 깊은 비밀도 결국 말이 새어나가게 마련인 것이다. 수양의 장자방이라는 한명회와 위징이라는 신숙주가 돌연 각기 함길도 도체찰사와 평안도 도체찰사로 명을 받아 떠난다는 말이 돌자 입 가진 사람들은 그에 대해 쑥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장자방이야 중국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으뜸 책사였고, 위징은 당태종 이세민의 치세를 도운 명신이니, 한명회와 신숙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변경 외직으로 간다는 것은 세간의 이목을 쏠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목적이 마침내 노산군이 야인 땅에서 변고를 도모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를 단속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도성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놀랐다. 노산군이 살아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야인들을 포섭해서 힘을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믿기 어려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때 자신이 다스렸던 나라에 칼을 들이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개국 이래로 변경을 어지럽혔던 야인들을 이끌고!


“원 아무려면 노산군께서 그러실라고. 그래도 나랏님이셨는데.”


“그게 또 모를 일이지 않는감······.”


근 백 년 전, 아직 고려 왕조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을 때 북쪽에서 홍건적이 밀고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옛적 몽골족의 침략이라든지, 요나라나 금나라 같은 나라들이 밀고 내려온 사실은 이제 전설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야만스러운 야인들이 도성으로 밀고 내려오는 상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마님을 신대감의 노비로 떨어뜨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래. 인질로 잡는다는 거지.”


그 말에 아낙네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노산군 부부의 사정이 딱하다고는 하나, 노산군이 야인들을 이끌고 난리를 일으킨다면 이야기는 또 다른 것이다. 아낙네 하나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에이그, 모르것소 나는.”


아낙네들이 분분히 일어났다. 그 중 하나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우뚝 섰다.


“어머나, 저기 좀 봐. 웬 행차가 이리로 오네.”

아낙네들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과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높으신 분의 행차신가베.”


아낙네들은 때아닌 행차를 구경했다. 바람결에 실려 앞장선 자의 외침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들은 귀를 의심했다.


“주상 전하의 행차시다 -!”



곤룡포를 입은 수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 앞에 있는 절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에는 역시 곤룡포를 입은 어린 소년이 약간 주눅든 표정으로 같이 있었다. 이제 막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는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수양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저곳이 바로 청룡사이올시다.”


평안도 도체찰사의 직을 받고 임지로 떠나게 된 전임 우의정 신숙주가 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수양과 함께 궐문을 나선 이래 줄곧 입을 굳게 다문 채 있었다.


“으음.”


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 창업군주 태조 왕건 시절 당대의 으뜸 승려였던 도선대사의 유언에 따라 창건되었다는 절이 청룡사로, 지금 홍위의 처 송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수양은 잠시 청룡사를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다. 신숙주는 그런 수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실는지······. 어쩌면 자신의 조카며느리에게 내려질 처분에 대해 마지막으로 되새김질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신숙주는 마른침을 삼키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줄곧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말을 지금 꺼내 볼지 참으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겠는가. 신숙주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전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하게.”


수양이 대답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숙주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호방한 그로서도 참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수양은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고, 자신이 정한 일에 토를 다는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신숙주는 수양이 가장 믿는 신하 중 하나였으며, 수양은 자신의 심복들은 무슨 짓을 하건 내버려두곤 했다. 그렇지만 수양이 이미 송씨에 대한 처분을 결정했는데, 그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일은 경우에 따라서 왕의 뜻에 의심을 제기한다는 말이 되었다. 수양의 ‘위징’으로서도 쉬이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놀랍게도, 수양은 신숙주의 말에 가만히 웃었다.


“그것이 마음에 거리끼었는가.”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수양은 나지막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허긴······ 경은 세간의 이목이 두려운게지.”


신숙주는 속으로 뜨끔했다. 수양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자신이 송씨를 노비로 들이는 일이 설령 자의로 한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욕할 것이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진 저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동기들과 대비해서. 그러나 수양의 앞에서 차마 그렇다고는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자네의 마음을 잘 알지. 하지만 말이야.”


수양이 섬뜩한 눈초리로 신숙주를 바라보았다.


“경의 평판이 중요한가, 아니면 과인의 명령이 중요한가.”


그 말에 신숙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대는 나의 사람이야. 몸도 마음도 모조리 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말이다. 내가 가라 하면 가고, 말라 하면 마는 것이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시오소서.”


신숙주가 허리를 숙였다. 수양은 대답 대신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범옹 같은 이도 그리 생각할진대······ 그래, 이에 대해서 세자의 생각은 어떠하느뇨?”


부왕의 서릿발 같은 말에 세자는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다. 일국의 세자라지만 이 열 살 난 얌전한 소년 이황은 기가 강한 아버지를 늘 어려워했다. 그의 성정이 아버지와 달리 드세지 못하기도 했지만 본디 왕위에 오를 형 의경세자 (懿敬世子)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도 그로 하여금 주눅든 태도를 보이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여러 모로 보아도 당시 해양대군으로 불리웠던 그 자신보다는 훨씬 군왕감인 형님이 2년 전 불과 20세의 나이에 요절했기에 세자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소, 소자도 신 대감의 의견에 동감하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사온지.”


긴장한 탓인지 세자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었다.


“흐음!”


세자의 말에 수양은 못마땅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바람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이 신숙주를 보며 말했다.


“과인이 세자를 굳이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그려.”


무슨 말일지? 세자는 적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양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만 가세그려. 내 속히 돌아가 쉬고 싶으니.”


수양은 요즘 들어 날로 심해져 가는 피부병 때문에 안 그래도 심기가 편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할 일은 아무리 냉혈한 그라지만 쉽게 할 일은 아니었다.


왕의 행차가 청룡사에 닿자 주지를 포함해서 절의 승려 모두가 허둥지둥 나와 엎드렸다. 숭유억불의 기조를 내세운 조선에서는 중들의 지위는 하잘 것 없었다. 개국 초 태조대왕을 모신 무학대사 같은 고승이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송씨가 있느냐.”


“법당에서 불공중입니다.”


수양의 카랑카랑한 질문에 주지승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수양이 차갑게 내질렀다.


“그럼 빨리 나오라고 하라.”


잠시 후 법당 문이 열림과 동시에 중 두 명 사이로 소복을 입은 여인이 사뿐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수양 일행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오랜 고생으로 인해 그녀는 적지 않게 초췌해져 있었고, 의복은 궁핍한 생활을 짐작케 했다. 출궁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몸 고생뿐 아니라 마음 고생도 심하게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평온함마저 감돌고 있었고, 행동거지에는 한때 일국의 국모다운 기품이 있었다. 신숙주는 내심 감탄했다.


‘진흙 속에 파묻혀 있어도 진주는 본디 빛을 잃지 아니하리니.’


지아비를 잃은 슬픔과 고된 염색일조차도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기품을 모두 앗아가버리지는 못했다. 요컨대 영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왕비다운 체통을 잃지 않았다. 수양마저도 그녀의 모습에는 큰 인상을 받을 정도였다. 수양이 눈짓하자, 옆에 있던 도승지 윤자운 (尹子雲)이 크게 외쳤다.


“대역죄인 노산군의 아내 송씨를 평안도 도체찰사의 사노비로 하사한다는 어명이시다.”


신숙주는 두 눈을 감았다. 수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씨를 노려보았고, 세자는 그 옆에서 아버지 수양과 송씨를 연신 곁눈질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한편 송씨는 침착했다. 잠시 정적이 내리깔렸다.


“기어이 이리하셔야 하겠습니까.”


마침내 송씨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윤자운이 발끈하고 나섰다.


“주상전하 앞에서 무엄하다.”


“그만두어.”


수양이 가로막고 나서자 윤자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수양의 시선이 천천히 송씨 쪽을 향했다.


“조카며느님이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홍위가 기어이 빠져나가 야인 땅에서 있다더이다.”


그 말에 송씨의 말이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굳었다. 수양은 자애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야인 땅에서 세력을 모으는 모양이랍디다. 이 나에게 대항해서 말이지요.”


법당 안은 흡사 무덤과 같은 적막함이 흘렀다. 수양이 돌연 신경질적으로 메마른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이 나에게 말입니다!”


껄껄 웃어제낀 수양이 송씨를 돌아보았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나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홍위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한심하고 가엾은 일이고, 의도했더라면 한없이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숙님.”


수양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어떻든 좋습니다. 홍위가 이 나의, 그리고 나의 나라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다면, 응당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겝니다. 그 치러야 할 대가에는.”


수양은 뱀 같은 시선으로 송씨를 응시했다.


“조강지처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나에게 대항하려 했다면, 그만한 각오는 치러야 할 터.”


세자는 겁먹은 시선으로 수양을 바라보았다. 신숙주는 두 눈을 감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송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수양의 말이 한 자 한 자 청룡사 법당 앞에 내리 떨어졌다.


“조카며느리님. 압록강 너머에서 똑똑히 지켜보시구려. 그대의 지아비이자, 이 나의 조카가 어떤 운명을 맞는가를. 홍위도 또한 자신의 아내가 어떤 운명을 맞는지 똑똑히 보아 두어야 할 겁니다. 아울러 나에게 대항할 마음을 먹는 자들 역시 눈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나의 무서움을 말이지요. 그리고.”


수양은 자신의 아들을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 밑에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말입니다.”


인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눈초리를 받은 세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때 송씨의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모로 쓰러졌다. 옆에 섰던 중들이 화들짝 놀라 실신한 송씨를 부축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수양이 도승지 윤자운을 바라보았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죄인이 깨어나는 대로 신대감 행차를 따르게 하라.”


“어김없이 시행하겠나이다.”


윤자운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수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자락을 떨치며 바로 중문 쪽으로 향했다. 세자와 신숙주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중문 앞에 선 수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세자를 휙 돌아보았다. 그 서슬에 세자가 움찔했다.


“세자. 똑똑히 보아 두었느냐.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았느냐는 말이다.”


“예······ 아바마마.”


마치 고양이 앞에 놓인 쥐가 이런 심정일까, 세자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세자의 마음을 뚫어내기라도 할 듯이 수양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왕이란 말이다, 자신에게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인정을 보아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적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굳세야 하고, 적을 향해 내리칠 손에 자비를 두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너를 가볍게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세자는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수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아들었느냐고 물었다.”


“······ 알아들었습니다.”


한참만에 세자의 입에서 새어나온 대답은 모기소리만큼이나 가냘펐다. 수양은 그런 세자를 쏘아보았다.


“내 오늘 너를 굳이 이 자리까지 끌고 온 것은 네 마음의 약하고 어리숙함을 채찍질하기 위함이다. 너에게 거역하는 자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란 말이다. 대항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잔혹해야 할 땐 한없이 잔혹해져야 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하잘 것 없는 인정을 두지 말라는 말이야.”


세자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수양은 신숙주 쪽을 돌아보았다.


“경도 알겠지······. 홍위가 살아있다면, 그 녀석이 나에 대해 대항할 마음을 완전히 꺾어버릴 필요가 있다. 송씨에 대한 태도에 한 점의 온정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담대한 신숙주조차도 수양의 그 말에는 절로 소름이 돋았다.


“알아들었는가.”


“알아들었습니다.”


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안도 땅은 험한 곳이지. 앞으로 일이 년은 자네 할 일이 많아. 두 번 다시는 홍위에 대해 쓸데없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게.”


신숙주는 고개를 조아렸다. 수양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두 번 다시는 말이야. 그 점을 잊지 말게.”


작가의말

소설을 처음 쓸 때는 종래의 통념대로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가 정업원 터였고,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에 거처했다고 보고 썼는데 이제 보니 정업원은 창덕궁 후원에 있었고 송씨 역시 그곳에서 거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송씨가 창덕궁 내에 거처하지 않고 청룡사에서 살게 되었다고 해두겠습니다. 어차피 바뀐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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