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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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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78
추천수 :
1,290
글자수 :
406,586

작성
19.05.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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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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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건주위 도독 이만주 (1)

DUMMY

그날밤, 홍위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잠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한동안 뒤척거리던 홍위는 마침내 벌떡 일어났다. 툇마루로 성큼 내려선 홍위는 마당가를 거닐었다.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늑대 짖는 소리 등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 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홍위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주무시지 아니하였습니다.”


“자네도······.”


장손돌이 성큼걸음으로 홍위 옆에 다가섰다. 홍위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내 생각할 것이 좀 있었음이네. 자네는?”


“소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날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지요.”


“이만주 건 말인가.”


손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월영 일행이 떠난 후, 홍위에게 다시 건의한 바 있었다.


“꼭 이만주여야 할까.”


“지금 정세를 보면 앞으로 대명이나 조선으로부터 취해 올 압박을 누그러뜨릴 만한 이가 그 정도뿐이올시다. 이만주에게 손길을 뻗지 않는다면, 나으리께서는 그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올시다.”


홍위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손돌은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엇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신 모양이십니다.”


“글쎄, 나는 그저······.”


“월영 아씨 때문은 아니옵니까?”


손돌이 직설적으로 찔러들어온 말에 홍위는 자신의 속을 간파당한 느낌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손돌을 돌아보았다. 손돌이 능글맞게 웃었다.


“소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지요. 나으리께서도 사내대장부 아니시오이까.”


“별 소리를 다 하는구만.”


홍위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이만주는 부씨 부족과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지요. 족장이 이만주, 혹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외동딸을 출가시킨다는 것을 거절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으리께서는 그것 때문에 이만주 일파와 손을 잡는 것을 껄끄러워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홍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손돌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손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으리······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모두 취하시는 것은 어려우시오이다. 소인이 옆에서 보는 바로는, 나으리께서는 월영 아씨에게 마음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오이다. 허나,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있지 아니하오이까.”


이번에도 홍위는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손돌은 씩 웃었다.


“오랫동안 장사를 하다보면 이정도 눈치는 기본이올시다. 남겨두고 오신 부인 때문이겠지요.”


한동안 홍위는 침묵을 지켰다.


“자네 말이 옳으이.”


손돌은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 이도 저도 취하지 아니하고 우물쭈물하다 보면 모든 것을 잃게 될 뿐이올시다. 장차 나으리께서는 야인 땅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홍위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이 한 목숨을 건질 요량으로 북행길을 했을 뿐이네. 처음에는 그뿐이었네. 하지만······.”


홍위는 말끝을 흐렸다. 이윽고 손돌이 말했다.


“지금 같이 잠상 노릇만 한다 쳐도, 나으리 일신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누릴 재보를 모아들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꼭 거상이 되어야 할 것도 없나이다. 허나, 나으리께서 지금 꾀하는 일은, 일신의 복록을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위험한 일이올시다. 야인을 교화한다······.”


손돌은 고개를 저었다.


“저 중화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그 누구도 일찍이 시도하지 않은 일이올시다.”


“선대왕께서는 꾸준히 군진을 개척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야인들을 교화했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백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함 아니더이까. 나으리께서 하시는 일은 야인들에게 장차 나라를 건국할 수도 있는 힘을 주는 것이옵니다. 대명은 물론, 조선 역시 시도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시도하는 자를 용납하지도 않을 짓이옵니다.”


“그렇겠지.”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타려 하고 계십니다. 아예 아니 타려거든 모르겠습니다만, 호랑이 등에 한 다리를 걸쳐 놓았다면 이리 우물쭈물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소인의 소견으로는, 이 시점에서는 이만주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나으리께서 큰 뜻을 품고 계신다면, 적어도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누구 한 세력과는 협조해야만 합니다.”


홍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은 보잘것없는 장사치에 불과합니다. 처음에 나으리를 따라나선 것은 나으리와 행동을 같이할 경우 이익이 있어 보였기에 한 것이올시다.”


“그래, 어땠는가?”


손돌은 빙긋이 웃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일개 장사치 주제치고는 많이 벌어들었습지요. 허나. 이제 나으리께서 시도하고 계시는 일은 갈수록 장사꾼이 감당할 수 있는 바깥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한 가지만 묻겠네.”


홍위는 손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이 나의 행보는 일개 장사꾼의 요량 바깥으로 넘어서고 있다는 게로군. 그렇다면 자네는 어찌하겠는가? 자네 말대로, 자네의 장사를 위해서는 지금 이 정도가 맞춤할 터.”


그 말에 손돌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나으리. 소인은 나으리를 뵙기 전에도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잠상 노릇을 했습지요. 한 배를 탈 만한 자가 아니면, 소인은 미련없이 손을 끊었습니다. 만일 나으리를 그런 정도라고 보았다면, 불초 소인이 감히 나으리께 조언이랍시고 하려고도 아니하였을 겁니다.”


잠시 정적이 내리깔렸다. 홍위는 한참만에 대답했다.


“고맙네.”


“별말씀을······ 허나 나으리께서 장차 어찌하시는가에 따라 소인이 어찌 할 것인가도 결정이 나겠나이다.”


“으스스하게 들리는군.”


손돌은 가볍게 웃을 뿐 말이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홍위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이만주와 선을 놓아 볼 것일세. 다리를 놓아 주실 수 있겠는가.”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손돌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 다음날, 홍위 일행은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길잡이를 맡은 손돌이 가장 앞에 있었고 그 뒤를 홍위와 유빈이 뒤따랐다. 호인은 대장간 마을에 남아 있을 것이고, 퉁주동은 부락에 남아 있었다. 이만주와 부씨 부락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는 따라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일행의 뒤에는 이만주에게 진상할 물자들이 바리바리 실은 짐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한동안은 길이 평탄했고 늪지나 슾지 따위가 없었다. 야인 짐꾼들은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유빈은 그런 짐꾼들을 생각날 때마다 주시했다. 물론 손돌이 어련히 조처했겠지만, 짐말들에 실린 짐들은 짐꾼들이 평생 일해도 만지기 어려운 재산이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길이 험해지니 내리셔야 합니다.”


손돌이 먼저 말에서 내리자, 홍위를 필두로 한 명씩 말에서 내렸다. 과연 손돌의 말대로 앞에 펼쳐진 언덕 고개가 높고 험준했다.


“이곳이 어디인가?”


“대다완현 (大茶玩峴)이라고 하는 곳인데 이만주의 집으로부터는 이제 서쪽으로 사십여 리 정도가 남았습니다.”


손돌은 서쪽을 가리켰다.


“저 서쪽으로 육칠십리를 가게 되면 만포진이 나오겠지요.”


그 말에 사람들은 서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흉포한 야인보다도 거리끼는 것이 조선 땅이었다. 유빈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질 것 같은데.”


손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유숙하고 가야 할 듯합니다.”


그날 밤 손돌은 홍위 일행들에게 내일 찾아갈 사람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만주가 대명 조정으로부터 건주위 도독동지를 수여받은 지는 십 년도 전이올시다. 당시 대명은 와라부(瓦剌部) 야선(也先)의 난 때문에 혼란해 있었던지라, 야인에 대해 일종의 회유를 한 것이올시다.”


와라부는 곧 오이라트이고, 야선이란 오이라트의 추장 에센을 말했다. 바로 이들이 그 유명한 토목보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은 이들이다.


“그렇지만, 야선은 이미 죽지 않았던가?”


“그렇지요. 몇 년 전 일이올시다. 그러나 아직도 대명은 야인보다는 와라부 토벌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만주는 대명과 조선 조정에 심복하는 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야심으로 가득 찬 자입니다. 대명 역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일단은 두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근자에 요동도사 (遼東都司)가 바뀌는 바람에.”


홍위가 영월에서 야인 땅으로 몸을 피하던 바로 그 해 겨울, 요양성(遼陽省)에 있던 요동도사 왕상(王祥)이 병사했었다. 그 후임으로 하림(夏霖)이 부임했지만, 이래저래 명 입장에서는 여진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설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렇군······ 당분간 명에서는 따로 조치를 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굳이 이만주에 의탁해야 하는 거요?”


홍위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빈이 물었다. 그 말에 손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조선 때문이오. 안 그래도 요새 조선땅에서 간자들이 자주 넘어오고 있소. 정기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오는 토벌대의 활동도 잦아지고 있고.”


그 말에 홍위와 유빈은 입을 다물었다. 조선땅에서 넘어오는 간자들이 누구를 쫓고 있는지는 알 만했다. 강 너머에 주둔해 있는 조선군은 정기적으로 친 조선 노선을 들고 있는 번호 부락을 보호하고 그에 반대하는 반호나 적호 부락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강을 넘어왔다. 조선의 군사력을 보임으로써 야인들이 섣부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만 잡시다. 내일 이만주의 마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니.”

홍위 일행이 이만주의 부락 언저리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 점심께가 훨씬 넘어서였다. 험한 고개를 돌파하고 나서 일행이 말에 다시 올라서려는데, 홍위는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손돌을 돌아보니 그도 이미 눈치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홍위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야인 기병 몇 명이 나타났다. 아마도 순찰을 나온 모양이리라.


“무기에는 손을 대지 마소.”


손돌이 주의를 주었다. 이내 그가 앞장서 가더니 우두머리인 듯한 자와 무어라무어라 대화를 나누었다. 우두머리는 못 미덥다는 듯 인상을 내내 찌푸리고 있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양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일행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유빈은 느낌을 통해 인근에 다른 놈들이 더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타고 있는 말도 불안한 기척을 눈치챘는지 나직하게 울었다. 유빈은 겁먹은 말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야인이라도 다 같은 야인은 아니군.”


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곳, 이만주의 밑에 있는 야인들은 부씨 부락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보았던 야인들과는 또 달랐다. 똑같이 유목 생활이나 수렵 생활을 하더라도 얼마간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야인들과 달리, 지금 보는 이 자들은 말 그대로 싸우기 위해 태어난 전사들처럼 보였다. 유빈은 앞장선 야인 무사들이 농기구를 손에 쥐는 광경을 상상해보려 했으나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앞장선 손돌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앞에 보이는군요.”


과연 눈 앞에 부락이 보였는데, 녹각 목책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고 돌담이 높게 둘러쳐져 있었으며, 나무 판자로 만든 문 앞에는 병사 몇 명이 창을 겨눠들고 있었다. 돌담 곳곳에는 나무 기둥을 얼기설기 이은 감시대가 있었고 보초병들이 다가오는 이들 쪽으로 활을 겨눈 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적대적인 태도가 역력했다. 유빈은 홍위를 보았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초연했다.


일행과 같이 있던 야인 기병 우두머리가 앞장서 말을 달리더니 문간에 있는 야인들에게 뭐라고 외쳤다. 창을 겨눠든 야인들이 길을 비키자 말에서 내린 그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남은 이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이내 안에서 몇 명이 나왔다. 이들의 복장은 똑같이 털가죽 옷이었으나 보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 하신다.”


홍위 일행은 말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적의가 뚜렷이 담긴 눈초리가 그들을 에워쌌다. 부락은 규모가 대략 백여 채 정도 되었으며 한눈에 보기에도 살림집보다는 오히려 병영과 같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큰 집으로 안내받았다.


범가죽 장막을 배경으로 맨가슴 위에 털가죽 옷 하나만을 걸친 남자 하나가 앉아 있어, 들어오는 홍위 일행들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는 각지고 울퉁불퉁한 얼굴뿐 아니라 가슴팍이며 오른팔 여기저기에 흉터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는 그런 상처자국들을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영광의 흔적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언제라도 전장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주위 도독동지를 뵈오려 찾아왔습니다.”


이 시기 건주위 도독동지란 엄밀히 말해서는 이만주가 아니었다. 십여년 전 이만주 본인이 명으로부터 도독동지에 임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년 들어 명 조정에서는 이만주의 나이를 이유로 그 아들 이고납합을 도독동지에 제수했고, 이만주는 건주위 사무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조치가 내려진 것이 이제 몇 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만주를 이도독이라 불렀다. 손돌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이도독께서는 바쁘신 분이다. 나는 이도독의 오른팔이자 지휘 비리해림돈 (飛理該琳頓)이다.”


손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주위 야인 부족장 안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고, 건주위의 최강자 이만주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이도독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껄껄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오로지 비리해림돈만이 웃지 않았다.


“이도독의 일은 곧 나의 일과도 같다. 시건방떨지 말고 말해라.”


손돌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도독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이라. 흠!”


비리해림돈은 코웃음을 쳤다.


“내 듣기로 너희들은 부씨 부락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러합니다.”


비리해림돈의 눈에는 경멸감이 담겨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조그만 땅뙈기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하잘 것 없는 놈들 아닌가······. 그마저도 요즘에는 허리가 제대로 휘지 않는다더군. 틀림없이 농사일 때문일 테지만, 우리에게 나긋나긋하지 않을 정도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안그런가?”


그 말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홍위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비리해림돈은 그런 그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모처럼 이도독께 선물을 가져왔다 하니······ 정성은 갸륵하군.”


“송구합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비리해림돈은 장막 뒤로 사라졌다. 뒤에 남겨진 홍위 일행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잘랑거리는 소리가 장막 너머에서 들려온다 싶더니, 비리해림돈의 안내를 받아 머리가 하얗게 센 왜소해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다. 홍위는 생각보다 왜소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에게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는데······.”


이만주가 작은 갈색 눈을 번들거렸다. 한순간이었지만 홍위와 그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그 작은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동시에 깊숙한 저 편에서는 악의와 모략의 낌새가 담겨 있었다. 홍위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겉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은 사내임을 직감했다.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지······. 그 사이 예를 표한 손돌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밖에 있는 짐말에 실려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안에 들어올 때는 몸수색을 하고 들어와야 하는지라.”


“몸수색에 걸리는 물건이라······ 하면 무기인가?”


“천하의 건주위 도독동지 나으리께 쓰임새가 있을 만한 물건이 무엇이겠습니까?”


“허허허!”


이만주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가지고 오도록 하라.”


손돌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만주는 자리에 앉은 채 남아 있는 홍위와 유빈을 생각에 잠긴 눈으로 노려보았다. 홍위는 눈을 내리깔았다. 누르팅팅하게 주름져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전연 드러나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손돌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환도 한 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홍위에게 건네었다.


“건주위 도독동지께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환도를 진상하러 왔나이다.”


홍위가 메마른 목소리로 고했다. 이만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못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환도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그의 힘은 보기보다는 근력이 강했다.


“호오······.”


환도를 요모조모 살펴보는 이만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 다음 순간 그는 홍위와 손돌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이를 어찌한다?”


손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기도 전에 이만주가 벽력 노성을 터뜨렸다.


“나는 조선인들의 환도는 마땅찮게 보거든!”


짤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환도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자리로 되돌아간 이만주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칼을 바친 자는 이름이 무엇인고?”


“이장경이라 합니다.”

홍위는 거짓 이름을 대었다. 이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인인 모양이로고······ 한때는 조선인들도 기개가 있던 때가 있었다고 했지. 내 조상들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말을 달렸을 적 일이니 먼 옛날이지. 하지만 지금은 남쪽 땅으로 내려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보잘것없는 농작물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지······. 참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까운 일이고말고······.”


이만주가 씩 웃었다.


“하찮은 농사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우리 생활풍습을 같이하면 좋으련만.”


그의 말에 옆에 시립해 있던 비리해림돈은 거만하게 웃었다.


“잘 만들어진 칼이지만, 그 콧대 높은 부씨 일가가 이제 와서 선물을 바친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군.”


이만주는 코웃음을 쳤다.


“자네들은 처음 보는 자로군. 돌아가 족장에게 고하게. 이제 와서 이런 호의는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듯합니다.”


홍위의 대답에 이만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손돌은 당황해서 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부씨 부락의 사람이 아니오이다. 따라서 이 선물은 그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칼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오. 도독동지께 야인족의 으뜸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오.”


이만주는 말없이 홍위를 노려보았다. 홍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에, 그런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신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홍위가 막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이만주가 차갑게 내뱉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이 내게, 건주위 도독동지 벼슬을 받았던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것은 둘째 치기로 하고 야인의 으뜸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홍위는 물러서지 않았다.


“쇠붙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오. 쇠를 구한다고 명이나 조선에 고개를 조아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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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77 The도리깨
    작성일
    19.05.20 07:19
    No. 1

    궁벽한 합이빈의 완안씨도 고려와의 전쟁을 통해 경험을 쌓았는데다 제강의 능력은 지녔기에 떠오를 수 있었거늘, 이만주는 전례를 자세히 살피진 않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1 22:36
    No. 2

    중간보스 정도 깜냥이니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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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3) +9 19.05.19 1,085 29 12쪽
24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6 19.05.17 940 27 21쪽
23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11 19.05.16 1,009 3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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