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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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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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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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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DUMMY

조선의 주인이 바뀐 지도 4년째에 접어들어 있었다.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 (楊汀)은 늘 그랬듯이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막대한 문서들을 읽어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이 같은 일상적인 업무에 아주 신물을 내고 있었다. 아니, 이 함길도 땅이 정말로 싫었다. 대충 결제 서류를 훑어본 양정은 벌떡 일어났다.


“내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오련다.”


아직 결제할 공문서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의 부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난처한 듯이 바라보았으나 상관의 성정을 알고 있는 그들은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양정은 바람같이 밖으로 나섰다. 무예가 절륜하여 일찍이 내금위의 무사로 있다가 한명회의 천거로 수양의 측근이 된 그는 계유년 정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마침내 수양이 보위에 오른 뒤에는 좌익공신 2등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로 함길도 도절제사 자리에 잠시 있다가 한양으로 올라와 공조판서, 중추부판사 직을 역임하며 중앙에서 그의 관직은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노산군이 영월에서 탈주하였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가 올라온 그 다음날 그는 수양의 호출을 받았다. 그가 입궁하였을 때, 마침 한명회가 같이 있었고, 수양은 무언가 지도를 펴 들고 열중하고 있었다. 양정이 부복하자 수양이 그를 흘끗 보며 말을 걸었다.


- 경은 훌륭한 무장이지. 과인은 그대를 믿고 있네.


- 송구하옵니다.


양정은 영문도 모른 채 머리를 조아렸다. 수양은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기며 툭 던졌다.


- 과인이 경을 한양으로 부른 때가 언제던고.


- 작년 춘삼월이로소이다. 이제 일 년이 좀 넘었나이다.


양정이 함길도 도절제사 직을 수행하다 수양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와 공조판서 자리에 오른 것은 수양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된 1457년 음력 3월이었다. 황량한 함길도 변방 땅에 신물을 내고 있던 양정은 드디어 중앙 정계에서 한 자리 할 기회가 왔다고 기뻐했었더랬다. 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걸렸다.


- 일 년이라, 제법 몸을 풀 때도 되었군. 경에게 과인이 공조판서 직을 제수하기 전에 함길도 도절제사 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았던가?


- 실로 그러하옵니다만······.


양정의 미소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수양의 의도를 미처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수양은 한명회를 흘끗 바라보며 숱 적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마치 자신이 대군이었을 시절, 양정이 자신의 심복 부하였을 때처럼 허물없이 불렀다. 수양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 자네가 함길도에 가 주어야 하겠어. 내 믿을 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필요해.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양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 노산군이 북방으로 탈주했다는 보고가 있었네. 안 그래도 이징옥 무리가 주살당한 이후 함길도 동향이 어지러운 형편이야. 자네가 가서 사정을 돌아보게. 노산군의 행방도 추적해서 보고하고.


양정은 표정을 좀처럼 풀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후견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한명회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양정의 시선을 받은 한명회의 표정은 담담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을 함길도로 내치도록 제안한 자가 한명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정이 대답을 하지 않자 수양이 이상하다는 듯이 지도에서 눈을 떼고 양정을 바라보았다.


- 무엇하고 있어? 내 말을 들은 겐가?


양정은 겨우 더듬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수양은 지도를 다시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 그러면 그만 나가보아.


양정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전각을 나섰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양정은 자신의 중앙 출세길이 막혔음을 깨달았다. 며칠 후, 그는 앙앙불락한 마음을 겨우 삭히며 북행길에 올랐다.


그것이 벌써 일 년이 지나 있었다. 이전에 낯이 익었던 부하들이 다시 도절제사로 내려온 상관을 부산하게 맞이하는 동안 양정은 자못 착잡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처지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인가? 함길도 이 벽촌에서 이 년 정도 썩은 것으로는 부족하였다는 말인가?


어쩌면······ 이는 저 사사당한 혜빈 양씨 (惠嬪 楊氏)와도 연관이 있지 않은가. 본디 세종대왕의 후궁이었던 그녀는 세종의 승하 이후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가, 노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입궁하여 어린 왕을 보필하였다. 당연히 수양에게는 마땅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수양이 왕위를 선양받은 후 끝내 사사당하고 말았었다. 문제는, 이 혜빈 양씨는 양정 자신의 먼 고모뻘 되는 여자라는 데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먼 이야기다! 양정은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고, 중앙 관직에서 승승장구할 기회가 멀어졌다는 데 이를 갈았다. 아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하실 리가 없다. 계유년 그 때 이 양정이가 없었다면 어찌 전하께서 오늘 이렇게 되실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한자준 대감이? 그러나 어느 것도 오늘 그의 영락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진 못했다. 그 때 멀리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절제사 영감, 급보이옵니다.”


먼지투성이로 들어온 관원의 보고에 양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급보라니. 노산군에 대한 소식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건······ 아니올시다.”


안 그래도 울적해 있던 탓에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양정은 더욱 짜증이 동해 있었다. 차라리 지금 그 ‘급보’란 것이 탈주한 노산군에 대한 소식이었다면 혹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함길도 도절제사로 온 이후 수양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어 노산군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으로 온 이후 일 년이 넘도록 노산군에 대한 소식은 들어온 바가 없었다. 만포진까지 왔다더라는 노산군은 그 이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고, 이제 와서는 만포진까지 왔다는 것조차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면 뭐가 급보란 말이냐? 야인족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양정은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노산군의 행방만 잡아내고 그를 한양으로 압송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신에게는 형벌이나 다름없는 함길도 도절제사 자리를 물러나 다시 중앙으로 영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전까지 ‘급보’란 그에게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그건 아니올시다. 야인 땅에 철장이 들어섰더라는 첩보올시다.”


“야인 땅에 대장간이 들어섰다구······ 그게 어때서 야단인가?”


양정은 시답잖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보고하는 관원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감, 가벼이 볼 일이 아니오이다. 금번에······.”


양정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네마저 날 헛다리로 아는가? 야인놈들이 비록 미개하다고는 하지만 철장이 정도는 있다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는가. 무엇 때문에 호들갑인가?”


양정의 말대로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살고 있는 야인들은 철기를 조선이나 명에서 수입해다 쓰는 형편이었지만 대장장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뒤틀린 판이었던 양정은 이 재수 없는 녀석에게 화풀이를 할 참이었다. 그러나 관원의 표정은 심각했다.


“영감, 이번에는 다르오이다.”


“다르다니······. 나를 능멸할 참인가.”


“야인에게 철장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자들은 우리에게서 못 쓰는 고철을 받아다가 자기들 나름으로 제련해서 쓰는 것이었소이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선 철장은 그렇지가 아니하더랍니다.”


양정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으나, 그는 여전히 불퉁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야인들이 어디선가 가마 만드는 법을 익힌 거겠지. 장인을 초빙했거나······.”


양정이 뚱하게 것지르는 말에 관원이 포기하지도 않고 열심히 대답했다.


“영감, 조선 땅에서 대장장이들이 강을 건너 가는 것은 국법으로 금한 일이올시다. 야인들이 넘어와 대장장이 일을 사사받는 일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이까.”


양정은 여전히 마땅찮다는 표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런 잡스러운 보고, 달리 말하자면 귀찮고 성가신 보고는 집어치우고 노산군의 행방에 관련된 보고나 가져오라고 발을 구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로도 이 사실은 영 무언가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역대 군왕들은 모두 변방의 안녕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던가. 야인들에게 쓸데없는 무기를 쥐어주면 변경을 소란케 한다는 것이 조선 왕과 신료들의 일치된 생각이었고, 그런 이유로 조선이나 명이나 야인들에게는 아예 못 써먹을 만한 폐철을 주곤 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영감, 우선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경우에 따라서는······.”


양정은 그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격한 선제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들해진 양정은 하품을 했다.


“그러면 자네가 책임지고 알아보게. 여는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그 철장이 어디에 열었는지 알아보고 보고하게.”


관원이 하직하고 물러났다. 양정은 몸을 휙 돌렸다. 그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다소 비열해보이는 후련함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 하급 관원이 지적한 것은 틀리지 않았지만, 약간의 화풀이도 얹어서 그더러 귀찮은 일은 알아서 하라고 시킨 것이니까.


한편 양정 앞을 물러난 관원 엄복동 (嚴福同)이의 심사도 편할 수가 없었다. 책임지고 알아보라······ 말이 쉬웠지 사실상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그의 동료들이 미리 귀띔한 대로였지만, 어쩌란 말인가. 사안이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어쨌든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일이니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저 도절제사 영감은 그 때 가서는 왜 자기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화증을 낼 것이다. 결국 만만한 것이 중간 보고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제에기······. 난장맞을!”


짜증이 난 엄복동은 애꿎은 문기둥에 발길질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문기둥이 아파할 리도 없으니 결국 아픈 것은 자신의 발등일 뿐이다. 발 빠르기로는 과장 섞어 하루에 천릿길도 달린다는 엄복동이는 자신의 발을 붙들고 펄쩍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동료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흘끗거릴 뿐이다. 복동은 낯을 찌푸린 채 고개만 저었다.


복동은 하릴없이 자신이 쓰고 있는 사처로 향했다. 어찌한다······. 이제는 천상 야인들 속에 끼어들어서 대장간이 어디 있는지 탐문하고 다녀야 했다. 우선은 만포진 관시 주변에 있는 객점들에서부터 탐문을 시작해야 할 터였다. 그런 다음에는 압록강을 드나드는 잠상 중 그와 끈이 닿아 있는 자들에게도 캐고 다녀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하-나이, 시부럴!”


복동의 입에서는 짜증기 어린 탄식이 나왔다. 그 다음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스스로가 야인 땅에 기어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압록강 남안에서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야인 땅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도 이보다는 쉬우리라.



도절제사 처소를 나온 엄복동이 씨근대고 있는 동안, 판중추원사 (判中樞院事) 홍달손은 내금위 (內禁衛)를 방문해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병조 판서에서 영전해 지금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오가는 내금위 갑사들이 홍달손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었는데, 홍달손은 그것이 내심 기꺼웠다. 수양의 밑에 들고 계유년 정난에 적극 참여한 이후 크게 영달한 그였지만 그는 아직도 옛날 내금위 갑사 시절의 가락을 잊고 있지 않았다. 간혹 내금위에 들어설 때마다 그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젊은 군관 하나가 다가오자 홍달손이 물었다.


“종사관 (從事官) 최형욱이가 아직 퇴청을 하였느냐.”


“금일 입궁하였사온데 막 퇴궐하여 들어왔습니다. 아직 퇴청하지 아니한 줄로 아뢰나이다.”


군례를 올린 군관이 보고하자, 홍달손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 자리를 떴다. 군관의 말대로 홍달손이 찾는 사람은 그 때 막 궁궐에서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종사관 최형욱 (崔烱旭)은 수양이 직접 하사한 환도를 들여다보며 얄팍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의 옆얼굴은 흠 없이 매끈하니 마치 백자 술병과도 같았다. 내금위란 조직은 본디 국왕을 호위하는 조직으로 5품 이하 벼슬아치들의 자제 중 특별히 무예가 뛰어나고 키가 크며 용모가 수려한 자들을 뽑아들인 바 있다. 내금위 종사관에 있는 최형욱도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한다하는 한양 기녀들의 이목을 끌어들일 정도의 사내였다. 그러나 그를 자세히 본다면 수려한 외모 속에 숨겨져 있는 차갑고 냉혈한 이면을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양이 집권하고 내금위를 확충하면서 새로 들어온 그는 협객 시절부터 검을 쓰는 솜씨가 빼어나기로 이름높았고, 그가 즐겨 쓰는 물미장 창포검이 그리는 유려하고도 사정 없는 검격 앞에 피를 뿌린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최 종사관 있는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형욱은 움찔 놀랐다. 그 목소리는 그도 잘 아는 바 있었다. 허둥지둥 일어난 최형욱이 문을 열고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홍가칙 대감께서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오이까.”


“여가 내 집에 온 셈인데 어찌 이토록 격식을 차리는가.”


안으로 들어선 홍달손은 껄껄 웃으면서 최형욱의 등을 두들겼다. 자리를 권한 최형욱은 홍달손이 좌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두 사람은 잠시 실없는 한담을 나누었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자들의 무예 솜씨에서부터, 옛날 겁 없고 혈기 넘쳤던 시절들에 대한 추억들. 이야기가 잠시 끊긴 틈을 타 최형욱이 홍달손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감히 여쭈오는 바······ 소인과 그저 옛 이야기만을 나누러 오시지는 아니하셨으리오이다.”


“정확히 보았네.”


홍달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준에게 들었네. 자네, 노산군의 행방을 쫓기 위해 북행길을 한다면서?”


자준이란 곧 한명회였다.


“실로 그러하오이다.”


“야인 땅으루······ 간다면서.”


최형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없겠지. 노산군의 행방을 쫓자면 역시 야인 땅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자네가 욕을 좀 보겠어.”


홍위가 영월 땅에서 종적을 감춘 이후 수많은 이들이 북으로 향했으나 대부분은 홍위에 대한 자그마한 소식 하나를 물어오는 데도 실패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홍위가 인적 없는 어느 산골에서 외로운 혼이 되었으리라고 지레짐작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수양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수양은 이상하리만큼 노산군 홍위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 그간 수색을 신통치 않게 여긴 수양은 급기야 왕실 호위군인 내금위에서 사람을 뽑아 파견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최형욱이 바로 그렇게 지명된 경우였다.


“보아하니······ 자네, 어도 (御檢)까지 수여받은 모양이군?”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최형욱이가 들여다보고 있던 환도를 흘끗 본 홍달손의 말에 최형욱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훌륭한 칼이로고······ 그래, 노산군을 찾아내면 어찌 할고.”


홍달손의 말에 최형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전하께서는······ 산 채로 압송하되 부득이하면 처분은 맡기겠다고 하시었습니다. 선참후계 올시다.”


선참후계······ 홍달손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양의 의지는 이것으로 확실했다. 노산군의 운명은 이것으로 봉인을 해 둘 참이렷다. 하지만 수양 그만큼 노산군의 운명에 집착하는 자는 한 명 더 있었다.


“여가 그대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할 것이야. 그래, 내 자네를 아직도 잊지 아니했지. 기실 자네만한 무사를 그 전이건 후건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일세.”


“송구하옵니다.”


홍달손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최형욱이 그것이 뭔가 싶어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는 안되지만 가는 길에 요긴하게 쓰일 은자일세. 자네는 내가 키운 사람이기도 하네. 이만한 정은 있어야지.”


최형욱은 크게 절하며 은냥을 받아들였다. 수염을 쓸어내린 홍달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노산군을 찾아내는 대로 나에게도 언질을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최형욱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노산군의 행방을 쫓는 것은 한자준 대감이 맡아서 하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노산군이 종적을 감춘 지 이제 일 년이 훌쩍 넘어 이 년이 되어 가네. 그런데 영월 그 땅에서 내가 직접 키운 애들이 열 명이나 넘게 죽었어.”


홍달손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최형욱은 그제서야 영문을 알았다.


“상왕이니, 왕족이니 떠나서 이건 내가 용서치를 않아. 하물며 노산군은 인제는 대역죄인 신분이야. 바로 처단해도 무방하지.”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유백섭이는 저와 같이 칼을 배운 놈이기도 했습니다.”


최형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때 영월부로 떠났던 자객들의 조장 유백섭은 그와는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실력을 아는 최형욱으로서는 구중궁궐 밖을 벗어난 일도 드물었을 노산군이 그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노산군을 그의 손으로 처단할 작정이었다.


“하여튼······ 노산군은 꼭 내 손으로 처단하고 싶네. 야인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이제 볼 것도 없는 셈이지. 한데 문제는.”


홍달손은 최형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때 자준은 분명 노산군에게 사람을 딸려 보냈었어. 그런데 그 자가 멀쩡히 한양으로 돌아왔지.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말에 최형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듣고 보니 이상합니다만, 자준 대감이야 작금 전하의 장자방 같은 존재가 아니옵니까. 그분이 딴뜻을 품을 리는 없지만······ 그 딸려 보냈다는 사람이 누구오이까?”


“자네도 아는 사람이야. 한가령이지.”


홍달손의 말에 최형욱의 눈빛이 변했다.


“한가령 말씀이옵니까? 익히 알고 있는 자입니다. 소인과도 겨룬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홍달손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최형욱을 훑어보았다.


“그래······? 어떻던가.”


그 말에 최형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력은 있는 자올시다.”


최형욱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을 익히 알고 있는 홍달손은 그 이상 묻지 않고 대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내가 키운 내 자식들이 당하는 마당에 한가령이가 뭘 하고 있었는지가 수상하더란 말일세.”


홍달손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심복들을 ‘키운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의 분노는 깊고 차가웠다. 그가 어떤 심경일지 알 수 있는 최형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령이를 족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뭔가 숨기고 있겠지요.”


“내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섰을 것이야. 자네 말대로 틀림없이 그자는 뭔가 속이고 있는 것이 있어. 하지만 자준 대감이 영 말을 들어먹지 않아. 오히려 한가령 그자를 싸고돈단 말일세.”


“과연, 고약한 상황이올시다.”


홍달손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최형욱도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어찌되었건······ 내 자네가 야인 땅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선발로 뛰어왔네. 자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지.”


“여부가 있겠나이까.”


“현재 야인 족장들은 한결같이 노산군의 행방은 들어본 적도 없다더라는 게야.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자준이 나에게까지 그것을 속일 리는 없을 터.”


“야인놈들은 믿을 수 없는 족속이올시다. 그 자들은 틈만 나면 거짓을 말하지요.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올시다.”


최형욱의 대답에 홍달손이 웃었다.


“여의 뜻도 그대와 같네. 좌우지간 자네가 함길도로 간다면, 거기 있는 양정이에게도 내가 언질을 주겠어. 그 친구, 전하께서 자기를 벽지로 내몰았다고 아직도 꽁해 있는 모양이지만······.”


그 말에 최형욱은 고개를 저었다.


“암행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만포진으로 갔다가, 잠상들 틈에 끼어서 강을 건널 작정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나?”

“그 편이 쓸데없는 의심을 피할 수 있습니다. 노산군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필경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오이다.”


약간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짓던 홍달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긴······ 죽지 않고 여직것 살아서 그 수많은 간자들을 피할라치면······. 그래, 자네 말이 옳으이. 하기는 자네 정도의 사내가 그만 생각하지 못하겠나.”


홍달손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래, 때마침 자네가 어명을 받들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구먼. 아무쪼록 부탁하네.”


최형욱은 떠나는 홍달손을 전별했다. 자리로 돌아와 환도를 어루만지는 최형욱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수많은 왈자 패나 건달패들이 창포검 일격 아래 죽기 직전에서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는 바로 그런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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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몰려오는 먹구름 (5) +3 19.06.05 914 26 17쪽
35 몰려오는 먹구름 (4) +12 19.06.03 866 23 16쪽
34 몰려오는 먹구름 (3) +6 19.06.02 869 29 15쪽
33 몰려오는 먹구름 (2) +4 19.06.01 877 26 22쪽
32 몰려오는 먹구름 (1) +14 19.05.28 983 29 19쪽
31 음모가들 (2) +6 19.05.27 838 24 23쪽
30 음모가들 (1) +7 19.05.26 1,017 28 13쪽
29 변화구 (2) +5 19.05.23 911 32 13쪽
28 변화구 (1) +8 19.05.22 946 31 11쪽
27 건주위 도독 이만주 (2) +14 19.05.21 946 27 12쪽
26 건주위 도독 이만주 (1) +2 19.05.20 960 32 20쪽
25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3) +9 19.05.19 1,084 29 12쪽
24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6 19.05.17 940 27 21쪽
»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11 19.05.16 1,009 3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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