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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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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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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586

작성
19.06.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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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몰려오는 먹구름 (2)

DUMMY

대장간 마을 안에서는 매일같이 쇠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근에 풍부하게 있는 참나무 숲에서는 매일같이 도끼질을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힘센 장정들이 억센 손길로 나무들을 그러모아 숯을 구워냈다. 그 참숯들은 짐말들에 실려 울타리로 둘러쳐진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곧장 쇠둑부리가마 안으로 잡철석들과 함께 들어갔다. 하루 내내 활활 달아오른 가마에서는 연달아 쇳물이 고아져 나왔다. 그 생철 덩어리들은 예전 같으면 그대로 팔렸겠지만 이제는 가마에 딸린 대장간으로 바로 옮겨져 가공 처리되었다. 전호인은 이 과정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거기, 조심해서 다루게!”


야인 대장장이 하나가 호인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망치로 내리쳤다. 그의 손길은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 대장간을 새로 확장할 때 홍위와 호인은 기존에 있던 야인 대장장이들 대신 손재간이 있는 사람들을 새로이 뽑아 쓰기로 했다. 마을마다 있는 야인 대장장이들을 뽑아내려면 원래 마을에는 대장장이가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마을에 딸린 대장장이들은 그곳에서 웬만큼 세력을 잡고 있기 쉬웠다. 그런 이들이 쉽사리 따라오지도 않을뿐더러 자칫 말이 새어나가기 쉬웠다.


이 마을의 위치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만 했다. 바깥에 알려지게 된다면 쇠붙이를 노리는 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은 물론 그렇지 않아도 야인들이 철기 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는 명이나 조선에서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이런 연유로 송유빈은 홍위를 따르는 자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마을에 울타리를 둘러 철저히 지키게 했다. 장손돌이 이끄는 상단도 이곳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고, 철저히 보안을 지켰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확장을 해 나가야 하겠는데.’


호인은 씩 웃었다. 그가 고안한 수차를 이용한 풀무를 도입한 이후 대장간의 생산력은 확실히 뛰어올랐다. 이곳은 절기에 따라 수량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수차를 쓸 수 없는 때도 있었고 개수도 한계가 있었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쇠붙이를 원하는 부족들도 줄을 잇고 있으니 이런 마을을 더 만들 수만 있다면 퍽 좋을 것이다.


물론 어떨 때는 자신이 야인들에게 쇠붙이를 공급한다는 일이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야인들이 이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어내서 조선땅을 노략질할 수도 있지 않은가? 확실히 유빈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때문에 심란한 모양이었다. 호인 자신은 쇠붙이는 곧 문명의 씨앗이니, 이를 널리 전파한다면 야인들이라고 노략질에만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실제로 부씨 부락은 이 쇠붙이로 농기구를 만들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하께서 야인족을 한 동아리로 묶어낼 수 있다면.’


그 생각을 하면 호인 역시 마음이 설레여 왔다. 야인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후 호인의 마음은 세차게 고동쳤다. 그 넓은 벌판이라니! 홍위와 함께 며칠 동안이나 자유롭게 말을 타고 노닐면서, 호인의 가슴속에도 한 가닥 야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땅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야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가 모시는 주군 홍위의 손으로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망상인지도 몰라.’


대장간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랬다. 며칠이고 말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듯한 이 땅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의 힘으로 통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렷다. 정말로 아찔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광대한 땅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도 거칠고 강단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따르는 이들이 점점 늘어만 가는 주군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까닭 모를 자신감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정작 홍위 자신은 아직 그만한 꿈을 꾸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아니다. 호인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결국 남아대장부 아니신가. 그렇다면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으실 리가 없겠지. 문득 호인은 이 생각을 누구에게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 직접 말한다? 글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 말해 본다는 말인가. 송유빈이나 장손돌······. 송유빈은 전하의 충실한 호위무사이고 고결한 사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손돌도 오랫동안 장사치로 잔뼈가 굵어 세상 보는 물정은 얼마간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포부는 장사치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누구한테 의논할까.


호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나무 울타리 위로 솟아 있는 망루 위에서 야인족 무사 하나가 외쳤다.


“대인께서 돌아오십니다!”


대인이란 이 마을의 주인인 홍위를 말함이다. 호인은 벼락같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이 일하던 손을 멈추고 문 쪽으로 구름같이 몰려나갔다. 가마를 보아야 하거나 풀무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최소한의 이들만 남기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가 보이는 것만 해도 백여 명은 잘 되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홍위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만세를 외쳤다.


“이대인 천세!”


그 바람에 호인은 내심 뭉클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의 내력을 따져보면 부씨 부락에서 뽑혀 온 자들도 있었고, 보수를 바라고 온 자도 있었으며, 개중에는 홍위의 소문을 듣고 겨뤄 보러 찾아왔다가 부하가 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 년 넘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모두들 홍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를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다. 보수는 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지급되었고, 훌륭한 전사로 성장해나가는 홍위는 모두에게 경탄을 자아냈다. 태조대왕의 핏줄을 타고난 홍위의 활솜씨는 조선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호인과 유빈에게마저 놀라움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으니 야인 출신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였다. 만세를 부르는 야인들 무리 앞에 선 호인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길게 읍했다.


“어서 오시오소서.”


“별일 없었는가.”


“없었습니다. 수상한 자들도 없고, 기일대로 쇠붙이들이 모여질 것이옵니다.”


호인은 그렇게 대답하다가 홍위의 표정을 보고 내심 놀랐다. 말에서 내린 홍위의 얼굴은 무언가 고뇌어린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위의 음성만은 예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잘했네.”


무슨 일일까? 호인은 내심 궁금했다. 부씨 부락으로부터 퉁주강이 갑자기 찾아오고 나서 홍위는 밑도끝도 없이 바로 유빈과 몇 사람만을 데리고 바람같이 뛰쳐나갔었다. 부씨 부락에서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마치 호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홍위가 말을 걸었다.


“오늘 나와 같이 술을 나누세.”


“알겠습니다.”


호인은 적지 않게 의구심이 들었다. 영월 땅에서 처음 만난 이래 홍위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든 것일까?



그날 밤, 홍위의 거처에는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야인족 부하들이 잡아 온 멧돼지 구이를 술안주로 삼아 홍위와 함께 유빈과 호인이 함께 모였다. 외지에 나가 있어 자리에 없는 손돌을 빼자면 이 두 사람이 조선 땅에서부터 그를 따라 온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잔에 술을 채운 홍위가 다른 두 사람에게 술잔을 권했다.


“유빈 자네는 알고 있겠지만, 부씨 족장이 중병에 든 모양이더군. 얼마 전 낙마를 했다네.”


“그렇습니까?”


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홍위는 술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을 단숨에 털어넣었다.


“그분은 자기 명이 오래 남지 않았다고 보는 것 같더군.”


호인은 그제서야 홍위가 왜 그렇게 침통한지 알 수 있었다. 그간 홍위가 이곳에 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부씨 족장과 처음 거래를 튼 이후 여러 가지로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


“부씨 족장은 야인들 중에서는 드물게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지요.”


조선인들에게 있어 야인들, 특히 강 건너 살고 있는 자들은 믿지 못할 족속들이었다. 심지어 조선땅 안에 살고 있는 야인들, 즉 백정들도 툭하면 살인 방화에 강도를 밥먹듯이 한다는 편견이 있었고 어느정도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압록강 두만강 너머 살고 있는 자들이라면······. 강을 넘어 노략질을 하는 적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에 귀부한 번호들까지 수틀리면 반기를 드니 야인들이라면 도시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니 지금 부씨 부족장처럼 조선인들인 홍위 일행에게 신의있게 대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정말 큰 복이라 할 수 있었다.


“야인들이라고 해서 다 신의없는 자는 아니었지. 조선 땅에서만 있었을 때는 일개 야만족이라고 보았었네만.”


“그렇긴 합니다.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호인의 말에 홍위가 한 마디 하자 호인이 얼른 정정했다. 하긴 야인들은 강 너머 조선을 경원시하며 의심어린 눈으로 경계하며, 어느 때는 노략질을 해오는 못된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이곳에 넘어와 살아보니 관점이 또 달라졌다. 유빈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신의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조선에 대해 적개심을 숨기지 않거나 신의 없는 자들도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처음 관계를 맺은 이가 부씨 족장이라는 점이 큰 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자네 말도 맞네.”


홍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인이라고 다 신의 없는 족속이라는 평가도 편견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신의 없는 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부씨 족장이 위독하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퉁주동이 후사를 이을 걸세.”


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퉁주동은 전하와 함께 결의형제를 맺은 자였다. 처음에는 생판 처음 보는 야인놈을 어떻게 믿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보고 알수록 호인은 자신의 주군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퉁주동이라면 부씨 족장이 죽더라도 홍위를 배신치 않을 사람 같아 보였다.


“부씨 족장이 위독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뒤를 이을 사람이 퉁주동이라면 다행한 일로 생각됩니다.”


홍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를 들어 고기 한 점을 집었다.


“부씨 족장이 내게 월영이를 거두어 달라고 말하더군.”


그 말에 호인은 입을 딱 벌렸다. 유빈을 돌아보니 좀체 놀라는 일이 없는 그의 눈에도 놀란 빛이 언뜻 스쳤다. 유빈이 조용히 말했다.


“부월영 아씨를 말입니까.”


“음.”


야인에 대해 편견이 있는 호인의 소견으로 보아도 부월영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조선 땅은 국초 자유분방한 기풍이 아직 쇠하지 않았지만 여자가 보란 듯이 남자와 함께 말을 달리고 활쏘기와 무예를 즐기는 모습은 신선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경박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를 몇 번 보면서 그런 마음은 꽤 사라졌다. 야인 족장의 딸이지만 아씨라는 존칭이 어울릴 정도로 당찬 여장부였다.


“자네들 생각이 듣고 싶네.”


홍위의 말에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소인의 생각으론, 확실히 당찬 여식이긴 합니다만.”


한참만에 호인이 입을 열었다. 일개 향리의 아들인 그는 아무리 홍위가 그를 허물없이 대한다 해도 신하가 군주에게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게 퍽 거북살스러웠다. 또 걸리는 점이 없지 않았다. 월영은 분명 얼마간 기품이 있고 족장의 딸에 걸맞는 위엄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홍위는 한때 조선의 국왕이었고, 야인 땅으로 쫓겨온 지금에 이르러서도 호인에게는 변함없이 조선의 정당한 왕이었다. 그런데, 일개 야인 족장의 딸이 가할까 싶기도 했다. 그 때 유빈이 조용히 말했다.


“월영 아씨를 전하께서 거두신다면, 부씨 부락 안에서 전하의 입지는 가일층 탄탄해지겠습니다.”


“어······ 그렇겠습니다.”


그 말에 호인은 유빈을 다시 보게 되었다. 유빈은 만포진 군관이라 본시 무반이니 무식한 무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직책을 맡아보지 않고 줄곧 홍위의 호위무사 격으로 따라다니기만 할 뿐 특별한 식견을 내비칠 일이 없다보니 방금 그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홍위는 묵묵히 술잔을 입가에 가져댔다. 세 사람은 제각각 방금 유빈의 말이 함축한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지금도 전하께서는 야인들의 인망을 적지 않게 얻고 있다. 차기 족장과 결의형제를 맺은데다, 전 족장의 외동딸을 취한다면, 그리고 그 족장이 야인 족장 사이에서도 명망 있던 자라면 틀림없이 전하의 위망은 높아질 터.’


생각할수록 이 혼인은 홍위에게 해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홍위는 무언가 착잡한 기색이었다. 유빈이 그의 기색을 살피더니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전하께서는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아니하온 모양이십니다.”


“음.”


홍위는 술잔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월영이를 내 거리끼는 것은 아닐세.”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상 위에 놓였다.


“허나 몇 가지 생각거리가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그 말이 거의 목젖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호인은 채 묻지 않았다. 유빈 역시 묵묵히 기다렸다.


“덕망이 없어 왕위를 숙부께 물려주고 수많은 충신들의 죽음을 보았던 내가 아닌가. 심지어 지아비 된 도리도 내팽개치고 혈혈단신 북으로 올라온 몸일세. 내가 어찌 새로운 이를 맞아들일 자격이 있겠나.”


호인은 그의 고뇌를 알 것도 같았다. 홍위는 보기보다 마음 속에 억눌러온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후계자 수업을 받아오면서 그랬고, 이런 저런 설움을 당하다 보니 더욱 그랬다. 야인 땅에 올라와 거친 야인들의 틈에 섞여 어느 정도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내는 듯했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공허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다른 종류의 공허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부왕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기대와 더불어 홍위 자신이 스스로를 옥죄어 오면서 형성했던 책임감이 홍위의 마음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는데, 계유년 정난 이후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면서 생겨난 공허였다.


“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월영을 맞아들이고, 나에게 모여드는 야인들을 잘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내 정당히 물려받고 맞아들인 이들마저 간수하지 못하고 그저 도망쳐나오지 않았던가.”


홍위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호인은 젓가락을 깨작깨작 놀리기만 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상왕 전하께서 왕위를 선양한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왕위를 도둑맞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전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신 후 호인은 전하의 도량이 넓으며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는 소견들이 많고 많음을 알았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마음속의 수렁이 깊었다.


그렇지만 이런 때 전하께서 마음 속 수렁에 깊이 빠져들어가도록 두어서도 안될 노릇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말로 전하를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호인은 유빈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소신 전하께서 심려하시는 것을 천분지 일, 만분지 일이나마 어찌 짐작하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그와 같은 번뇌를 하심을 이제 알았나이다.”


이윽고 유빈이 먼저 운을 뗐다.


“그렇지만 소신이 전하를 모실 적에, 전하께서는 조선 땅에서 있었던 것을 모두 조선 땅에 놓아두고 북행길을 떠나기로 하시었던 것이 아니오이까.”


홍위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술잔을 움켜쥐자 호인이 대신 술병을 들어 술을 한 잔 따랐다. 유빈이 말을 이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시오소서. 그 때 설혹 전하께서 불운하시었든, 옥체 미명하시어 미처 미진한 것이 있으시었든 간에,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올시다. 전하께서 이 북방 땅에서 무엇을 꾀하시든, 그것은 전하께서 이전에 겪으신 일과는 무방하오이다.”

홍위는 술잔을 쭉 비웠다.


“전하. 마음을 굳게 잡수시어 꿋꿋이 나아가시오소서. 소신들은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빈의 말에 호인도 동의하고 나섰다. 홍위는 얼마간 흐릿해진 눈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네. 하지만 말일세. 나는 이 복잡한 심사를 누를 길이 없네그려. 이 나를 믿고 따라주겠다는 자네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고 면목이 없는 일이네만,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겠네. 어찌 내가 제왕 될 재목이라 하겠는가.”


“그렇지 아니하오이다.”


홍위는 유빈과 호인을 바라보았다.


“내 허투루 말을 했네그려. 술이나 드세.”


술자리가 파하고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 홍위는 문득 갑갑함을 느끼었다. 그는 툇마루로 나서 밤하늘 달을 올려다보았다.


‘내 아직도 덜된 사람이구나.’


홍위는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 부끄럽지 않으냐. 나를 믿고 따라준 부하들 앞에서 나는 어찌 이다지도 나약하다는 말이냐. 저들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복잡한 심사를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조선에 있을 때는 일국의 왕이고 상왕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에게 기대는 사람들이고 신하들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몰라 늘 조심해야 했다. 태어나기를 제왕 될 몸으로 태어난 홍위는 고독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자신을 믿고 이 야인 땅까지 오기를 자청해 준 유빈과 호인이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그들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일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었다. 오늘은 술기운을 빌어 그 울적함을 살짝 풀어보려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들이 나의 이 나약한 마음에 전염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홍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자의 적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 하였으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아 또아리를 틀고 있는 자괴감을 채 떨쳐 내지 못하면, 그는 앞으로 크게 치고 나갈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홍위가 깊게 탄식하는 사이, 압록강 갈대밭에는 나룻배 한 척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는데, 손님은 달밤 흥취에 젖어 있는 모양이다.


“갈대밭 달밤 정경이 퍽 좋습니다.”


사공은 대답 대신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잠상들을 실어나르는 사공 입장에서는 만월 달빛이 성가시기만 할 뿐이고, 관헌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타고 있는 정호찬은 느긋했다. 함길도 일대를 두루 주유하고, 백두산에 올라 오래된 지인을 만나고 내려온 정호찬은 이제 야인 땅으로 넘어갈 마음을 먹었다. 그는 백두산 한 작은 암자에 은거하고 있던 고승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영월 땅을 밟아본 지도 두 해가 지났소이다. 정 선비께서 마음이 있다면 한번쯤 찾아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인데.


- 대사께서는 시생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그려.


백운 대사의 말에 정호찬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 선비께서 굳이 출사를 아니하시고 다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근자에는 특히 함길도 땅을 돌아다니는 것도 이유가 있지 아니하오이까.


정호찬은 백운 대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대사께서는 천시를 어찌 보시옵니까.


- 달이 차면 이울게 되는 법이 아니오이까.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시가 따른다 하여도, 사람이 뜻이 굳세지 않으면 일이 성사되지 아니하오리다.


백운 대사는 차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정호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필시 귀인께서도 선비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올시다.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정호찬은 제풀에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잘은 모를 일이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한 번은 발걸음을 해야 했다. 정호찬과 백운 대사가 영월에서 홍위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이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주위상책, 북행길이라는 글귀를 남겨 그를 격동시켜 보았으되, 홍위가 그를 따를 가능성은 오십 대 오십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해가 지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홍위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지금은······ 그가 무탈히 살아 있다면 야인 땅에서 발 붙인 지 두 해가 되었을 터. 영월에서 한 말로 그의 마음을 조금 흔들어놓았던 결과가 이제 어떤 결과로 돌아왔을지 궁금했다.


‘잘 되면 그분은 뭇 사람이 따를 만한 재목으로 거듭나고 있을 터이고, 아니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본인을 위해서는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재목이 어떻게 자라났을지는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으렷다. 정호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압록강을 바라보았다. 느리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압록강 검은색 수면 위로 달 그림자가 눈부시도록 무수히 흩날리고 있었다.

킬빌.jpg


작가의말

p.s. 글을 쓰며 마음에 두고 있는 캐릭터들의 이미지 세 번째.


한가령 -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빌 (故 데이비드 캐런딘 분)


故 데이비드 캐런딘의 최후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킬 빌>에서 빌로 분한 캐릭터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물론 나이는 그보다는 젊게 생각하고 있지만, 카리스마는 어디가지 않는다. 여기에 학경을 쓰는 기믹은 <임꺽정>에 등장하는 단천령, 그리고 형가와 고점리에서 모티브를 땄으며, <장길산>에서도 차용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캐릭터는 훌륭한 검객이면서 신비주의적이고 동시에 복잡한 캐릭터이다. 충무공의 시가에서도 드러나듯이 호젓한 밤에 홀로 앉아 피리를 부는 모습은 그의 복잡한 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The Lonely Shepherd>가 어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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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다가오는 위난 (3) +4 19.07.30 713 18 17쪽
40 다가오는 위난 (2) +3 19.07.28 727 19 17쪽
39 다가오는 위난 +9 19.07.27 791 27 10쪽
38 전령 (2) +4 19.06.13 932 30 10쪽
37 전령 +2 19.06.11 871 26 15쪽
36 몰려오는 먹구름 (5) +3 19.06.05 914 26 17쪽
35 몰려오는 먹구름 (4) +12 19.06.03 866 23 16쪽
34 몰려오는 먹구름 (3) +6 19.06.02 869 29 15쪽
» 몰려오는 먹구름 (2) +4 19.06.01 878 26 22쪽
32 몰려오는 먹구름 (1) +14 19.05.28 983 29 19쪽
31 음모가들 (2) +6 19.05.27 838 24 23쪽
30 음모가들 (1) +7 19.05.26 1,017 28 13쪽
29 변화구 (2) +5 19.05.23 911 32 13쪽
28 변화구 (1) +8 19.05.22 946 31 11쪽
27 건주위 도독 이만주 (2) +14 19.05.21 946 27 12쪽
26 건주위 도독 이만주 (1) +2 19.05.20 960 32 20쪽
25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3) +9 19.05.19 1,084 29 12쪽
24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6 19.05.17 940 27 21쪽
23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11 19.05.16 1,009 3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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